〈 54화 〉탐식마(貪食魔)
“아니, 씨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가장 뒤편에서 멀뚱히 류 현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던 ‘산군’측에서 파견된 시험관이었다. 여자의 욕지거리에 처음 류 현을 말로 붙잡으려고 입을 열었던 여자와 멍하니 사태를 수수방관 하고 있었던 남자까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이상 찌푸려질 수 없을 정도로 찌푸려져 있는 얼굴을 한 채 여자는 주변을 돌아보며, 류 현의 기척을 쫓으려 했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혼자서 블루 퍼플 던전을 돌 수 있다고 하는 작자가 작정하고 숨었는데, 찾는 게 쉬울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여자는 그를 찾기를 포기하고 류 현을 말로 붙잡으려고 했던 ‘터주’쪽의 파견 인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어쩌죠?”
“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우릴 끌고 들어온 거 같은데, 우리를 죽이려 들거나 할 거 같진 않지만. 우리 입장은 그게 아니잖아요? 길드에서 던전 관광하라고 보낸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찾아 나서자니, 우리 중에 감지 타입은 없는 거 같고. 그러니까 어쩌면 좋겠냐구요. 설마 그 쪽이 감지 타입이에요?”
자신을 향한 질문에 멍하니 류 현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만 있던 남자가 질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질문을 던진 여자는 기대도 안했다는 듯이 그걸로 남자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여자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터주’측 파견 인원으로 온 여자였다. 류 현이 그랬듯이 그녀들도 서로가 괴수 잡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플레이어 잡는 플레이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서로의 길드가 왜 그들을 여기로 보냈는지도. 그녀들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이윽고 서로를 바라보며 주판알을 튕기던 두 여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찢어지죠. 뭉쳐 있는 다고해서 딱히 답도 없을 것 같으니까. 어차피 보스룸 앞에서 만나게 될 거 같고.”
“네, 그러죠. 그 편이 편할 거 같네요.”
결정이 나자마자 두 여자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두 여자의 합의에서 고립된 꼴이 된 남자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신음하듯이 내뱉었다.
“아니 나는 어쩌라고?”
그리고 류 현은 그 모습을 공터 외곽의 회색빛 나무 위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찢어지네. 하기야, 내가 검성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손잡고 뭘 하기도 좀 그렇겠지.’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대놓고 모습을 감출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때를 봐서 불가피하게 찢어지는 연출을 할 생각이었다.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들어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 이 시험 이후에 딱히 눈치 볼 생각도 없었지만, 괜한 이야기 거리가 생겨서 엮일 거리가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던전에 들어와서 냄새를 맡는 순간 그는 기존 계획을 곧바로 폐기했다. 보물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데 저 인간은...‘예거즈’ 놈들 대체 무슨 속셈인거야?’
류 현의 시선 끝에는 던전 입구 공터에 멀뚱히 서서 두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예거즈’에서 보내온 시험관. 그리고 두 여자와 달리 사람 잡는 플레이어 냄새가 아닌 보통 플레이어로 보이는 자.
류 현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저 남자는 이런 자리에 보낼 만한 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 잡기 전문을 보내온 두 단체를 칭찬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설마하니 진짜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버리는 패를 밀어 넣은 건가.’
결국 남자도 결심이 섰는지 공터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내 구덩이를 다 판 남자는 자신의 보급품을 묻고, 숲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류 현은 그것으로 남자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그의 시선이 발아래 펼쳐져있는 회색빛 수림으로 향했다.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 꼬리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운이 좋아. 너무 운이 좋아서 불안할 지경이란 말이야.’
그는 던전 안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이 회색빛 숲이 의미하는 바를 현시점에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였다. 회색빛 숲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서 코를 찌르는 아릿한 비린내가 그에게 확신을 주고 있었다.
회색 숲, 비린내. 그는 이 두 개의 키워드가 맞아떨어지는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 해 본 경험이 있었다. 보스 몬스터야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던전에서 나오는 주력 괴수는 한가지 밖에 없다.
‘송장목. 최소 여 댓 마리 정도는 있겠지? 아예 군락을 차려놨으면 바랄게 없는데.’
희귀 괴수인 송장목이다. 현재는 독기를 해독할 방법을 몰라서 외면 받고 있으며, 존재를 아는 이조차 드문 그런 괴수.
‘한 마리는 잡아다가 누나 몸보신 시켜주고...’
해독 방법이 밝혀진 이전 생에서는 팔다리는 우습게 붙이고, 사라진 신체 부위까지 재생시키는 기적의 물약의 재료가 되는 괴수였다. 류 현은 나는 듯이 나는 듯이 나무 위를 내려왔다. 숲에 보물이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인간들이 멋도 모르고 송장목 진 빼놓기 전에 다 빼돌려놔야지.’
발걸음도 경쾌하게 류 현은 숲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
회색빛 수림에는 때 아닌 콧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콧노래 소리를 들을이가 있었다면, 그 주인이 심각한 음치라는 걸 눈치 채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들을이는 없었다.
류 현은 무인이나 다름없는 회색 숲을 거닐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던전이 아니라 마치 산책 나온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손에 그의 키만 한 쥐여진 쇠꼬챙이를,
푸욱. 두 세 걸음마다 땅에 반이 묻힐 정도로 깊게 꽂았다가 뽑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세 걸음을 뗀 류 현은 쇠꼬챙이로 가볍게 땅을 짚었고, 쇠꼬챙이는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반이나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가볍게 팔을 끌어당기자 쇠꼬챙이는 땅에 꽂힐 때처럼 가볍게 딸려 나왔다.
그가 서른을 헤아리며 다시 쇠꼬챙이를 땅에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끼에엑!]
그의 뒤편에 있던 나무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왔다. 그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들의 가지를 부러뜨려가며 류 현의 등 뒤에 도달했을 때도 류 현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나무에게 지성이 있다면 승리를 확신했을 상황.
하지만,
“엇차.”
류 현은 폴짝 뛰어올라 가지 공격을 피하더니 그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나무줄기에 나있는 눈 같은 시커먼 구멍 두 개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짓기까지 했다.
“찾았다. 이 귀여운 놈.”
뻐억! 발을 슬쩍 내민 것 같은 하단 발차기가 나무의 눈구멍에 꽂혔다. 별 힘도 들어가지 않은 듯 한 발길질이었지만 부피로 따지면 류 현의 네다섯 배는 되어 보이는 나무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땅바닥에 다시 내려선 류 현은 나무가 다시 벌떡 일어서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려는 것까지 감상한 후, 쇠꼬챙이를 대각선 방향으로 조준하고 힘차게 내찔렀다!
콰악! [끼에에엑!][끄르륵-]
그러자 류 현을 향해 달려들던 나무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류 현은 부르르 떠는 그 모습을 미소 지은 채 바라보다가, 움직임이 멎자 손잡이 부분까지 바닥에 꽂힌 쇠꼬챙이를 거두어들였다.
쇠꼬챙이 끝에 진득한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그 피를 살짝 손으로 찍어 맛보기까지 한 류 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가방’을 조작해서 비닐팩과 펌프, 손도끼를 꺼내었다.
손도끼를 쥐고 나무의 시체로 다가간 그는, 콰직! 도끼질을 시작했다. 플레이어의 근력과 마력이 더해지자 도끼질을 여러 번 반복할 필요도 없었다. 다섯 번이 채 안 돼서 나무 괴수를 거의 반 토막 내놓은 류 현은 도끼를 던져버리고는 단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파낸 단면에 붉은 액체가 맺혔다. 그리고 한 두 방울씩 맺히던 그 액체는 순식간에 그가 파낸 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류 현은 재빨리 비닐팩과 펌프를 연결해서 그 액체를 비닐팩에 담기 시작했다.
‘이걸로 일곱 마리 째지? 진짜 너무 운이 좋아서 무섭네.’
일곱 마리째 송장목이었다. 현 시점에서 존재를 아는 이가 적고, 그 아는 이마저 공략법을 몰라서 애를 먹고 해독법을 몰라서 버릴 수밖에 없는 괴수였지만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잡기도 쉽고 잡는 보람도 넘치는 사랑스러운 놈일 뿐.
현시점에서 송장목에 대해서 알려진 건 달랑 두 가지이다. 나무처럼 생긴 송장목이 잠복하고 있을 때는 손으로 만져도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나무를 두들겨 패면 머리로 보이는 부분이 부서지든 말든 붉은 나무진 같은 것이 스며 나와서 상처를 재생시켜버린 다는 것.
그래서 송장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격해봐야 시체 찌른 것 이상의 효과를 보기 힘들고, 잠복하고 있으면 나무랑 구분이 불가능했으니까.
송장목의 밖으로 드러난 나무 부분은 소화기관 같은 것이고, 뇌 역할을 하는 부분은 땅에 파묻힌 상태로 생활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땅을 들쑤시고 다니면 알아서 잠복을 풀고 덤벼든다는 건 현 시점에서는 류 현 밖에 알지 못하는 지식이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죽어나갔고, 앞으로 죽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송장목의 체액이 해독만 하면 이전에 존재하던 포션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대단한 효과를 가진 포션이라는 사실도 현 시점에서는 그 밖에 모른다.
‘이제 좀 꿀 빠는 느낌 좀 나네. 그래, 이제 청뢰 확보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꿀 빨아야지. 이 정도로 운이 붙는 데 혹시 알아? 유성우도 확보 가능할지.’
모처럼 행복한 청사진을 그려보는 류 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