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탐식마(貪食魔) (53/429)



〈 53화 〉탐식마(貪食魔)

“전 일정이 변동이 없다는 가정 하에, 한  내로 퍼플 던전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백혜라 였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그녀의 차분한 어조에 일행들은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희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입하기 이주 전부터 아마 준비 작업으로 바쁘게 될 테죠. 정보가 없으니 확신은 못하지만 아마 들어가면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승하 언니가 들어갔던 곳 같이 그냥 유적형이면 좋겠지만, 규모가 큰 미로형이라면 한 달도 더 걸릴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이 주후부터는 훈련을 봐드릴 수가 없어요. 희란 언니.”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희란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언니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현 또한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에 그가 생각해 두었던 방안을  밖으로 내려던 찰나였다.

승하가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끼어들었다.

“아, 나도 혜라 준비 도와주기도 해야 돼서  때부터, 혜라가 나올 때까진 못 봐줘. 같이 들어갈 건 아니지만, 나도 슬슬 몸 만들고 해야 하니까.”
“그렇습니까...”

승하의 말에 류 현은 곤란한 표정이 돼서 턱을 긁적거렸다. 두 사람 다 봐주는 건 어렵진 않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둘을 봐주려면 자신 쪽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이전이야 그린 던전 이상의 상위 던전도 들어갈  없어서 반쯤 시간 죽이기로 훈련을 봐줬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류 현은 잠시간 고심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그럼 당분간은   다 제가 다시 봐드리는 걸로...”


화련은 적당히 자율 훈련을 시킨다고 쳐도, 희란은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어도 그녀는 각성한지 반년도 채 안된 초짜다. 화련처럼 사고 나기 쉬운 마법사는 아니지만, 류 현은 그녀를 혼자 돌기긴 영 불안했다.


류 현이 화련을 적당히 보고 목표를 정해준 다음 자율 훈련을 돌리고, 희란을 맨투맨으로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결심을 내뱉으려던 때였다. 이번에는 화련과 희란이 입을 모아 그의 말을 잘랐다.

“아, 그건 좀.”
“괘, 괜찮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기에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감의 표출이 아님에도 희란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반응에 그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괜찮으시다니요?”
“그게 개인시간이  필요해서요.”
“예?”

화련은 자신의 볼가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류 현의 시선을 피했다. 류 현이 다그쳐 물으려고 할 때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연구 시간이  필요해요.”
“네에...맞아요. 연구시간이요.”

희란이 재빨리 말을 보태었다. 연구라니? 지금 시점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연구하고 할 정도로 그녀들이 능력을 개발했다는 걸까? 특히 오희란은 각성한지  년도 채 되질 않았는데? 류 현은 아까처럼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신경 쓰며 말했다.

“두   말입니까?”
“정확히는 공동연구죠. 희란이가 다 하고,  그냥 보조지만.”
“아, 안 그래요. 마스터.  그냥 숟가락 얻기만...”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샐  같았기에, 류 현은 손을 내저으며 화련의 말을 부정하려는 희란의 말을 끊었다.

“혹시 구체적인 기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직 그런 걸 말할 정도 단계는 아니라서...대충 이론만 세운 상태에요.”
“그런가요.”
“모처럼 여유 시간도 생겼고, 우리 훈련 때문에 곧 두  있다가 던전 들어가는 마스터 시간 뺏는 것도 좀 그렇고...”
“그 부분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만...뭐, 알겠습니다. 훈련 휴식기 동안 할 일이 있으시다니  수 없군요. 제 연구 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담 없이 연락하시고...아니, 웬만한 건 그 카드로 해결 되겠네요.”
““네?””


류 현이 납득하고 넘어가겠다는 식으로 나오자, 희란과 화련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는 그냥 연구할 게 있다는 말만 믿고, 알아서 카드도, 지원도 끌어다 쓰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화련이 대꾸  말을 찾다가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그의 얼굴만 보고 있자, 승하가 끼어들어왔다.

“대체 무슨 연구 길래 마스터한테도 숨겨? 무슨 암살 모의라도 해?”
“그 쪽이 알 필요는 없잖아요.”


화련의 즉답이었다. 그녀는 언제 멍 때리고 있었냐는 듯이 날선 태도로 승하의 이죽거림을 받아쳤다. 승하는 화련의 받아치기에도 히죽거리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자기한테 돈을 쓰니,  쓰니 하더니 결국 마스터는 머슴취급이네. 아, 슬픈 리더의 숙명이여.”
“진짜  여자가, 오늘 한 번 더 붙어 봐요?”
“어, 언니 진정 좀...”

화련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승하에게 달려들 기세로 소리를 꽥 질렀다. 희란이 몇 번이고 팔을 당겨 진정시키자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화련은 그러고도 승하를 보며  마디 중얼거리며 씩씩거린 후,  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듯 내뱉었다.


“포탈이요.”
“예?”
“포탈 연구라고요. SF영화에 나오는 그거. 아직 포탈인지 아닌지도 정확하진 않지만.”

화련의 말을 들은 류 현은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승하와 혜라의 표정도 그의 표정과 비슷하게 바뀌었지만, 반쯤 정신이 빠진 그는 볼 수가 없었다. ‘포탈이라고? 벌써?’


류 현의 얼빠진 얼굴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화련은 승하에게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성과 나오기 전에는 이야기하기 싫었는데.”


그녀의 추측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류 현은 놀라고 있었다. ‘진짜 천재들이군.’ 두 장소를 연결하는 포탈 연구는 이전 생에서 ‘에스퍼’와 ‘링커’도 착수하려고 했던 주제였다. 시도에만 그쳤던 건 몸 상태 때문에 기량유지도 힘이 부친 그녀들의 상황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론 만들기는 포기하지 않았고, 류 현은 그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중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한  없었지만, 몸 상태만 멀쩡했다면 그녀들이 포탈을 만들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정도는 알 수 있었다.

화련과 희란도 언젠가 도달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이론 설계에 들어갈 정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당연히 기뻐해야  일이다. 그의 팀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 중이라는 이야기니까.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분  대단하십니다.”
“시, 시작도  한  가지고 너무 비행기 태우시네. 그렇게 띄워주셔도 나오는  없거든요?”


화련이 드물게 말까지 더듬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희란은 말도 못하고 고개만 붕붕 내저었다. 류 현은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속내는 정 반대였다.


‘이거 내가 제일 뒤처지고 있는 기분이네.’


희소식이라면 희소식을 들었음에도,  현은 입맛이 썼다.

‘그래, 여태까지 설렁설렁  감이 없잖아 있지. 오늘 누나한테 가기 전에 블루 한 군데 더 털어야겠네.’

희란과 화련이 그의 이런 결심에 자신들이 영향을 줬다는  알았다면 기겁했겠지만, 그녀들이 그의 생각을 알 방법은 없었다.


***


 달 후.

“좀 잘 부탁합니다. 일단 지시를 따르라고 말은 해뒀지만, 저 친구한테 문제 생기면  하나가 아예  돌아갑니다. ‘산군’내에서도 고급인력인지라.”
“예, 알겠습니다. 저도 저 친구들한테 뭘 시키거나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시험이니까요. 위험한 일을 부탁할 일은 없을 겁니다.”

 현은 나이 많은 남자의 손을 맞잡으며, 표정을 구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악수가 끝나고 손이 떨어지자 그는 속으로 한 숨을 몰아쉬었다.


‘길드 마스터 놈들이랑은 역시 생리적으로 안 맞아. 인간이 아니라 인간 껍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류 현의 속내를  리가 없는 눈앞의 늙은 남자, 노태웅은 서글서글한 눈에 어울리는 눈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건투를 빕니다. 아마 던전 밖에 나오시면 벼락스타가 뭔지 실감하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노태웅은 고개를 까딱해보이고는 뒤돌아서 산길을 그대로 내려갔다. 류 현은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말 들어가실 건가요?”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류 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서해란은 팔짱을 낀 팔을 풀고 거리를 좁혀왔다. 팔을 굳이 뻗지 않아도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후, 그녀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산군’측에서 보낸 시험관은 ‘산군’내부에서는 ‘해결사’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류 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타이트한 디자인의 가죽옷을 갖춰 입은 여자가 던전을 향한 채로 멀뚱히 서있었다. ‘산군’에서 보낸 ‘시험관’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여자가 어떤 부류의 플레이어인지 간파할  있었다.

‘괴수보다 사람을 더 잘 잡는 년이군.’

그리고 그의 이런  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예거즈’와 ‘터주’에서 보낸 자들은 반대편에 서있는 건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지만, 그는 이미 남은  명의 얼굴도 봤다. ‘터주’에서 보낸  또한 마찬가지 부류였다. 이 인선의 의도는 명확했다.

던전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류 현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상황이 되면 그의 멱을 노리기 위해서 선별되어 파견된 플레이어 킬러들. 시험관이랍시고 이런 작자들을 보내온 ‘모임’의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서 모른 척해주기도 어려웠다.

자신들이 먼저 뻔뻔스럽게 시험을 제의해놓고는, 시험 당일에 조력자도 아니고 킬러를 시험관이랍시고 보내왔는데, 류 현이라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하여간 길드새끼들은 마음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니깐.’

류 현은 속으로 혀를  번 차고는 해란에게 말했다.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걱정  하셔도 됩니다. 이럴 거라고 예상했기도 했고요. 솔직히 그냥 플레이어를 보냈으면 다른 의미에서 김빠졌을 겁니다.”

 현의 느긋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김이 빠져버린 해란은 경직되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하긴, 이젠 저보다 더 강한 사람한테 무슨 훈수질 인지 모르겠네요.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지만. 의지가 확고하시니, 건투를 빌겠다고 밖에  말이 없네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예, 걱정 감사합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해란 씨도 몸조심 하십쇼.”


***

빛무리를 빠져나오자 눈꺼풀을 두드리던 빛의 그림자가 옅어졌다. 류 현은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후에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하늘을 비추고 있는 빛은 구름에 가려 흐릿했고, 그가 딛고 있는 대지를 이룬 흙은 타다만 재처럼 회색이었다. 그의 시야 정면에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도 흙의 영향인지 회색이었다. 마치 산불로 다타만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듯했다. 타버린 나무들과 달리 이 나무들에는 회색 잎이 붙어있었지만.


그야 말로 블루 퍼플 던전에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거기까지 본 류 현은 조심스럽게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음미하듯이 냄새를 분석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비린내였다. 생선이 아니라 쇠 냄새에 가까운 그런 비린내. 그 외에도 잡다한 지린내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무시했다. 이 비린내만이 중요했다.


‘송장목이라, 진짜 이번 생에는 운이 제대로 붙네. 전생에서는 찾아다녀도 보기 힘든 놈들이었는데.’

그는 말려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뒤돌아섰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의 일행이 어느새 던전 안으로 들어와서 직경 5미터 남짓한 공터 주변을 휘 둘러보고 있었다. 류 현은 한 번 헛기침을 했다.

“제가 던전 안에 들어간 뒤에 여러분의 역할을 배정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맞지요?”

대답은 없었고, 세 개의 머리가 아래위로 작가 출렁였다. 류 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빠르게 말을 마쳤다.


“이번 원정에서 여러분의 역할은 알아서 살아남는 겁니다. 이 공터를 빠져나가서 단독행동을 하든, 공터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서 던전이 클리어  때까지 동면하든 그건 자유입니다만. 제가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 안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


그의 말의 중반부부터 세 명의 시험관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끼어들려고 했지만,  현은 후다닥 제  말을 마치고는 숲을 향해서 몸을 던졌다.


“아니 저...”

들을 사람을 잃은 여자의 말이 울렸을 때,  현은 이미 숲 안으로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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