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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탐식마(貪食魔) (52/429)



〈 52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웃어대었다. 보다 못한 혜라가 옆구리를 찌르는  아니라, 팔꿈치로 쳐서 진정시킬 정도로. 류 현은 혜라에게 눈짓으로 인사했고, 혜라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만 까딱했다.


 현은 한 번 목을 가다듬은 후에 말했다. 그 직전에 그는 잠깐 여전히 고개를 쳐 박고 있는 화련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화련은 변함없이 아래만 볼 뿐이었다.

“어제 서해란 씨가, 아니 정확히는 태양그룹 측에서 ‘터주’와의 협상이 끝났다고 전해왔습니다.”
“생각 보다 오래 걸렸네요...?”

희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녀가 알기로 태양그룹이 용잡이 팀의 스폰서로서 ‘터주’와 협상에 들어간 건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의 일이었다. 그 이틀 전쯤에 류 현이 팀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요구사항 목록도 작성했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야기가 끝났다니,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정확히는 ‘터주’가 그 ‘모임’을 대표해서 협상자로 나선 거니까요. 애초에 ‘터주’가 그런 건을 단독으로 덜컥 결정할 정도로 입김이 셌다면 이렇게 다리 건너서 협상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저랑 직접 얘기 했겠죠.”


‘모임’이라는 말에 일행이 일제히 움찔했다. 세 병째인 콜라 뚜껑을 비틀고 있었던 승하를 제외한 모든 일행이 말이다. 그들은 류 현이 ‘모임’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단체를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그렇게 지칭하는 건 ‘예거즈’를 필두로 ‘산군’, ‘터주’등이 연루되어 있는 ‘검성 살해 모의 모임’ 뿐이니까.


이렇게 되자 바닥만 보고 있던 화련도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류 현은 말을 이었다.

“자기들 멋대로 추측하고, 남을 제거 대상 리스트에 올리는 작자들이랑 협상하는 게 우습긴 합니다만.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뽑아먹어야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뽑아먹을 수 있는 게 있으니까요.”


‘곧 의미 없어지겠지만.’ 류 현은 뒷말을 삼켰다. 청뢰만 확보하면 협상 테이블에 마음대로 그들을 앉힐 수도 있고, 배제시킬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단독으로 퍼플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건 그런 존재다. 거기에 청뢰까지  해지면 단순히 수준 높은 팀을 넘어서서 트렌드 메이커가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국가차원의 감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만, 감시가 무서워 할 이라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감시가 꼭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니까. 국가 차원에서 감시에 들어간다는 건, 누구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가령, 국내 최고의 길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때까지만. 그 때까지만 웃는 낯을 연기하면 된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도 그들은, 아시아에 등장한 아지다하카 같은 네임드 몹을 잡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건너 불구경 할 수 있는 미국이 오히려 그를 지원했었다. 거기다가 이번 생에는 같은 노선을 밟게 될 검성의 문제도 있다.


같이 갈 수 있느냐 없느냐 문제를 떠나서 그는 그들과 같이 가는 미래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 굳이 나서서 쳐내겠다고 난리치진 않겠지만.

‘앞만 보고 달리기도 바쁜데 뒤통수까지 걱정하고 싶진 않아.’


화련은 류 현의 말에 동의하는지 작게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그런 인간들이랑 손잡는  싫지만, 뭘 주겠다는 데 거절할 필요는 없죠.”


희란은 이해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맹목적으로 동의해왔다. 류 현은 맹렬하게 끄덕거리고 있는 그녀의 목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우리의 요구사항에 대해서 대부분 수용했다더군요. 던전 관련 기록들은 시험 이후 다시 고려해보겠다고 하고, 요구 사항이외에도 주겠다는 혜택이 하나 있습니다. ‘터주’에서 정식으로 우리 팀에 대한 라이센스를 정부에 요청해서 승인을 받았고, 지금 절차를 밝고 있는 중이라더군요. 지금까지도 블루 던전을 들락거리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상은 시험 후에 논의하자고 하더군요.”
“마스터 혼자 말이죠.”


화련이 옆에서  찌르듯이 치고 들어오자, 류 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혼자서 아무런 상의 없이 미국에서 블루 던전을 들어간 일에 대해서 희란과 화련은 지금까지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없었던 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찌르고 들어오면 대꾸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일 중 하나였다. 류 현은 그 때 자신의 능력도 같이 알릴 생각이었다. 승하에게는 미리 말을 해서 입단속을 시켜두었다.

화련이 더 뭐라 할 기색이 없자, 류 현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태양그룹에서...”
“아, 그건  들을래요.”
“예?”

화련의 거절에 류 현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희란을 돌아보았다. 희란도 화련과 뜻이 그다지 않은지 멀뚱멀뚱 그를 마주볼 뿐이었다. 화련은 방금 전까지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던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게, 좀 그렇잖아요.”
“뭐가 말입니까.”
“말이 우리 팀 스폰서지 희란이나 전 한 것도 없고, 마스터 혼자서 따온 거나 다름없잖아요. 우리가 따온 것도 아닌데 괜히 내용 들었다가 이상한 바람 들 것 같아서.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지내도 되요. 돈 쓸 일도 딱히 없고, 던전 갈 일도 없고.”

희란은 화련이 말하는 동안 말없이 주억거리며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 여자들은 또 왜 이상한 고집이 발동해서 이러는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것도 이상한 소리였다.

그녀들은 분명히 서해란의 주관 하에 테스트를 받았고, 통과했었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 그의 후광이 없잖아 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들의 잠재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녀들이 앞으로 해줄 역할에 비하면 이런 비율문제는 신경 쓸거리도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그녀들이 이렇게 나오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 탈출 할 때까지는 그런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드려도 안 들으실 작정이시군요.”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여, 열심히  게요.”

류 현은 소리 없이  숨을 내뱉었다. 이전 생에서도 곧 죽을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해서, 별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그래, 하나라도 더 쳐 먹겠다고 지랄하다가  케미 작살나는 것 보단 낫지. 그것 때문에 의욕부진 상태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태양그룹에서 부탁한 일이 있는데 해보시겠습니까?”
“뭔데요?”


해란과 함께 찾아왔던 영업부 부장이라는 작자의 부탁 아닌 부탁을 떠올린 류 현은 한  피식 웃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쌍의 눈동자가 옆으로 살짝 기울여졌다.

“태양그룹 대표 플레이어로 광고 모델...”
“싫어요.”

단칼이었다. 화련이 이렇게 반응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류 현은 짓굳은 장난을 치는 기분으로 맞은편의 희란을 돌아보았다.

“희란 씨는요?”
“그, 그게요...”


희란은 우물쭈물하며 화련과  현을 계속 번갈아가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좀처럼 대답을 내놓지 못하다가 고개를 떨구고 거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해요. 광고 모델 같은 건...”
“괜찮습니다. 무조건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탁이었으니까요. 서해란 씨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  해도 된다더군요.”

 현의 말에도 희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그의 얼굴과 바닥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에 류 현은 수습차원에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는 품에서 지갑을 찾아, 그 안에 있는 카드 하나를 꺼내들었다. 앞면에 새까만, 누가봐도 보통 같아 보이진 않는 카드였다.


“그런데 아쉽네요. 태양 그룹에서 해주기로 한 지원이 당장 필요 없으시다니. 그럼 태양 그룹 쪽에서 준 카드도...”


다음 순간 류 현은 카드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그것이 화련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화련을 바라봤다. 화련은 손에 쥔 카드를 살피는 데 바빴다.

“아니, 지원도, 돈도 쓸  딱히 없다고 안하셨습니까? 그리고 제가  경비 카드는 쓰지도 않으시는 분이.”
“마스터가 준 카드랑 이거랑 같아요? 와, 블랙카드. 말로만 들어보고 처음 보네. 이거 길드 마스터 급도 잘 안 준다던데.”

화련이 호들갑을 떨자, 까만 카드를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희란도 화련에게 다가가서 같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류 현은 화련의 말을 한 번 곱씹었다가 다시금 물었다.

“제가 드린 거랑 그거랑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한도도 모르시면서.”
“마스터 행색을 봐요.”
“제 차림새가 뭐가 어때서요.”


류 현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되물었다. 회색 후드티에 편한 청바지 차림의 그는 또래 남자 대학생으로 보일지언정, 잘 나가는 플레이어, 그것도 팀을 꾸린 플레이어로는 보이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소탈했고, 나쁘게 말하면 버는 것에 비해서 너무 궁상맞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메이커가 아니라 시장에서 대충 골라잡은 물건이라는 비화는 그 말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화련은 류 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늉을 한 번 하고는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는 불평을 내뱉듯이 말했다.

“자기돈 자기한테 안 쓰는 사람의 돈을 무슨 낯으로 내가 펑펑 써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쓸 돈은 따로 떼어놓고, 이건  경비로 떼어놓은 건데.”
“아아, 됐어요. 불평하고 싶으시면 자신한테 월 200이상 부은 후에 불평할 것. 그 전에는 민원 접수 안 해드릴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말문이 억지로 틀어 막힌 류 현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화련을 바라봤지만, 화련은 자신의 말을 지킬 요량인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둘을 조용히 바라보던 승하가 킥킥거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아주 마누라를 하지.”
“아, 진짜! 저 여자가, 아까 하던 거 여기서마저 해요?”


화련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서 이를 북북 갈아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당장이라도 불꽃이 튀며 하얀 빛이 어릴 것 같은 기세였다. 승하는 화련이 이를 갈든 씹어 먹든 개의치 않고 깔깔거렸다.


희란과 혜라가 각자 화련과 승하를 진정시키고 나섰다. 류 현은 그 광경을 보며 다시 한 번  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아직 오늘 모임의 목적을 다 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들이 진정되고 나서,  현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했다.


“흠흠, 오늘 모인  협상결과나 저 카드를 전해드리기 위해서기도 합니다만, 진짜 목적은 여러분의 이후 일정을 듣고, 조율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아마 중간에 무슨 사고가 있지 않은 이상   후에 예정대로 블루퍼플 던전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들어가게 된다면 짧게는 이틀, 길면 이주 이상도 연락이 끊어지겠지요. 아마 던전 진입 이전 일주일 전부터 연락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오늘 이후 대강의 일정에 대해서 미리 들어두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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