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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화 〉탐식마(貪食魔) (51/429)



〈 51화 〉탐식마(貪食魔)

“끄윽...콜록.”
“신경을 아주   팔아먹었네. 아직   남았거든?  하면 올 때까지 계속 이러고 있겠네. 땀 냄새 풀풀 풍기면서 만나게? 전략 바꿨어?”


화련은 속눈썹에 맺혀서 자꾸 눈으로 들어오고 있는 땀을 닦아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벽이 있었다. 여자로서, 플레이어로서도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벽이.

나승하의 보랏빛 눈과 시선이 마주친 화련은 저도 모르게 찔끔하며 시선을 돌렸다. 동성임에도 보고 있으면 괜히 가슴이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눈이다. 저 눈을 똑바로 보고 할 말하는 류 현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인간 그 쪽 방면으로 진짜 문제 있나?’


자신에게도 별로 유쾌하지 못한 상상이었기에 화련은 금세 그 생각을 떨쳐내었다. 그녀는 호흡을 간신히 가누고는 말했다.


“정신이 딴 데 팔린 건 그쪽도 별 다를 건 없는 거 같은데요. 전 아무 말도 안했거든요?”
“그래? 그럼 그런가 보지 뭐.”


화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승하를 바라보았지만, 승하는 그게  어쨌냐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럼 좋은 거 아냐? 딴 생각하는 나한테 한  먹일 기회잖아?”

천연덕스러운 승하의 태도에 화련은 속으로 이를 갈아붙였다. 자신을 타이르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래, 저런 인간인거 첫 날에 알았잖아.’

‘내가 진짜 저 얼굴에 멍 자국 하나 내준다.’


하지만 앙심을 포기하진 않았다.

화련이 후들거리는 팔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자, 승하는 땅을 짚고 있던 죽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자세를 고치고 섰다. 승하는 고개를 까딱여 화련에게 말했다. ‘와.’


화련은 곧바로 응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감과 동시에 그녀의 오른쪽 눈 동공에 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쿠웅! 무형의 압력이 나승하의 주변을 짓눌렀다. 하나의 압력이 아닌 수많은 작은 압력들이 이중 삼중을 넘어서  십 번 중첩되었다. 화련의 한방주의를 지적했던 류 현이 봤다면 박수를 쳤을 성취였지만, 그걸 받아내고 있는 승하의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는 동안 승하와 화련 간의 거리는 좁아질 때로 좁아져서 팔을 뻗치면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 순간,

후웅! 심드렁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화련을 바라보던 승하의 오른손이, 쥐여져있던 죽도가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파캉! 승하를 짓누르던 무형의 수많은 압력들이 와해되었다. 반동으로 화련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지만 그녀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경이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승하가 휘두르고 있는 죽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우웅! 이번에는 화련의 왼쪽 눈동자에 하얀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 달리, 공격을 위한 능력사용이 아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 주변에 방어를 위한 압력을 생성했다. 그러는 동안 승하가 내휘두른 죽도가 무심하게 그녀를 덮쳐들었다.

뻐억! 죽도가 아니라 야구 배트로 샌드백을 후려친 듯한 소리였다. 승하를 덮쳐 찍어 누를 기세였던 화련은 거짓말처럼 멈춘 상태였다. 그녀의 복부를 죽도가 사정없이 누르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보려던 화련은 결국 무너졌다.

“콜록! 콜록! 끄으윽...”


승하는 내휘둘렀던 죽도를 거두고 자신의 발 앞에 웅크린 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얼굴 노리느라 가드도 제대로 못 올려서 그냥 얻어맞고, 앓아누웠다고 하면 참 좋아할 거야 그치?”
“콜록! 내가 진짜..꼭...콜록!”

화련의 표현을 빌어 훈련을 빙자한 구타가 시작된 지 한 달.   전의 장담과는 달리 승하와 화련은 친해지기는커녕 괴상한 존대와 반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거기에 약간의 앙심까지.

주로 승하가 자처한 것들이었지만, 승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류 현에게 부탁받은 건 화련의 훈련이었지, 놀아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부탁한 당사자인 류 현이 보면 기겁할 만한 훈련방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결과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이런 경우라면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건 화련이 류 현에게 고자질 하는 것뿐인데, 독기가 오를 때로 올라있는 화련의 표정을 보면 그런 불상사도 없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뒤로 아예 연락 안하고 지내나?’


승하는 화련에게 류 현과 연락하고 지내냐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어느새 화련이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방 꼭 먹여줄 테니 어서 시작하자고.

승하는 미소 지었다. 요즘 들어서 웃을 일이 부쩍 늘어난 그녀였다.

***


퍼억! 류 현은 멍하니 허공을 날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는 순간 저게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쿠당탕!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상식에 따라 여자는 금세 추락했다. 여자의 자그마한 몸은 그러고도 멈추지 못하고   바퀴를 더 구른 후에 멈출 수 있었다. 여자는 잠깐 동안 미동도 없이 옆으로 누워 있다가  미친 듯이 기침해대기 시작했다.


류 현은 여자의 기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화련 씨! 괜찮습니까?”

자신이 내뱉고도 과연 대답을 들을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류 현은 작은 몸을 끌어안아 일으키면서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화련...”
“귀 아파요...마스터...콜록!”


화련은 몇   콜록거린 다음에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충격이 남아있는지 심하게 휘청거리다가 결국 류 현의 부축을 받고 서게 되었다. 화련은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네요. 마스터...콜록.”
“예에, 던전 나오자마자 준비해서 나온 건데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더군요. 빨리  김에 두 분 훈련하는 모습이나 보려고 했는데, 빨리 오길 잘 한 것 같군요.”

류 현은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던 승하에게 눈을 흘겼다. 명백히 탓하는 눈빛이었기에 그녀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뿐이었지만. 그녀는   없었다는 듯이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예정보다 빨리 왔네? 오늘도 블루 던전 간다고 안 그랬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말입니다.”
“그래? 와 거기서 더 빨라지기도 쉽지 않을 텐데. 퍼플 아래로 도는 속도는 내가 못 당하겠는 걸?”

띄워주는 말에도  현의 굳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좀 거칠게 훈련시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쥐어 패면서 가르칠 줄이야.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냉각되었다. 체육관 반대편에서 손을 맞잡고 훈련 중이던 혜라와 희란이 놀라서 다가올 정도로.


류 현이 복잡한 머릿속에서 쓸 만한 말을 건져내서 내뱉으려는 그 때였다.  현의 시선이 승하에게 고정되고 나서부터, 시선을 피하다가 그를 빤히 바라보던 화련이 그의 말을 가로막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예?”
“저, 괜찮다고요. 마스터. 아직 견딜 만하고, 저 쪽도 나한테 억하심정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훈련이 좀 힘들 수도 있죠.  그래요?”


 현이 심혈을 기울여서 골랐던 말들이 그녀의 말에 단박에 헝클어져버렸다. 그는 화련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승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의 일부만 볼 수 있게 된 류 현은 다시 말을 고르다가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화련은 열기마저 느껴지는 눈으로 승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직 한 방 못 먹여서 마스터가 말려도 계속 할 거에요.”

화련의 말에 승하가 배를 잡고 웃어젖혔다.  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승하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웃음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들었어? 진짜 가르칠 맛 난다니까?”

화련은 승하를 노려봤고, 승하는 그런 화련을 보며 배를 잡고 웃어대었다. 뒤늦게 도착한 희란과 혜라가 두 사람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번갈아보았다.


류 현은 진지하게 그녀들을 검성에게 맡긴 것이 자신이 회귀 후  가장 큰 실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느꼈다.


***


불판의 고기를 별 의미 없이 뒤적거리던 류 현은 기어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뱉었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혜라의 만류에 소주나 맥주 대신 콜라를 병째로 마시고 있던 승하가 그를 돌아봤다. 체육관에서 나온 이후로 말이 없는 화련과 희란,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혜라 또한 그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본인이 아무리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고기만 먹고 있는 화련의 조막만한 얼굴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반창고와 손목의 붕대를 보고나자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을 지닌 플레이어가 대상이라고는 하나, 굴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 훈련으로 취급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저 상처투성이의 모습은, 그 플레이어의 회복력이 다 못 따라올 정도로 혹사 시키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마스터.”
“괜찮다고 하셔도. 전 뭐라고 해야겠습니다. 훈련이라면 받는 사람이  이상 없이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화련이 류 현을 말리려고 들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의 가라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승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화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창고 떼 봐.”
“예?”
“반창고 떼보면 알 걸.”


류 현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승하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다른 말이 없었다. 그가 화련을 돌아보자 화련은 한숨을 푹 쉬더니, 자기 손으로 볼에 붙은 반창고를 두 어 개 쫙 하고 떼어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상처 없이 말끔한 볼이 자리하고 있었다.

류 현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화련을 보았지만 화련은 시선을 피했다. 그가 두 번째로 찾은 건  승하였다. 그녀는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좀 까져도 반나절  돼서 다 나으면서, 별로 크지도 않은 상처 가리겠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그 팔목 멍든 것도  빠졌지? 아주 화장을 하고 나오지. 팔불출 마스터 걱정 시킨 거 어떻게 갚을래?”
“...닥쳐요.”


화련이 고개를 떨군 채로 짓씹듯이 내뱉자, 승하는 더 크게 깔깔거렸다. 류 현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앞을 가렸다. 그의 눈앞에는 그저 어둠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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