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탐식마(貪食魔)
“그런데 말입니다.”
보랏빛 눈이 자신을 향한 것을 확인한 류 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훈련 어떻게 시키실 생각이십니까?”
“난 또 뭐라고. 괜히 진지하게 물어보니까. 엄청 중요한 일인 줄 알았잖아.”
“...저한테는 중요합니다만.”
승하는 베란다 창에 기댄 채로 한껏 기지개를 켰다. 흉부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동작에 류 현은 시선을 돌리고 머쓱하니 헛기침을 했다. 목이나 어깨를 한 번씩 풀고 난 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라고 해서 별 건 없어. 초기에 시키는 훈련은 다 똑같아. 그냥 어떤 능력인지 몇 번 맞아보고 설득하는 식이지. 이렇게 안 하면 잘 안 믿더라고.”
“...맞아보고요?”
“사실 반쯤 기죽이기 목적이지. 최대 출력으로 때려보라고 하고 스치지도 못하게 피하거나, 정면에서 부숴버리거든. 마법사애들이 특히 그런 게 심하잖아? 이상한 자부심부리는 거.”
“그런 편이긴 하죠.”
류 현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이전 생의 짐꾼 시절부터 지금까지 만나온 마법사들은 플레이어의 기준에서도 정상보다 비정상이 훨씬 많았다. 그것도 이상한 자기애나 자부심에 심취한 자들의 비율이 다른 계열의 플레이어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각성과 동시에 물리학을 씹어 먹는, 전혀 다른 체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마법사측의 변명도 있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변명에 불과했다. 그런 면에서는 염동능력계열이나 감지계열도 별 다를 건 없는데, 유독 마법사들만 그런 자들이 많으니까.
“화련 씨는 굳이 그런 짓 안 해도 잘 따라갈 겁니다.”
“오, 그래도 팀원이라고 감싸는 거야? 아직 삐져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주먹구구식으로 시킨 훈련도 잘 따라와줬구요.”
“그을쎄, 내가 보기에는 그거 내숭 같은데. 활동한지 2년 됐다면서? 년차 쌓였고, 하급 던전이긴 해도 경험도 제법 되고, 거기다가 마법사. 내가 보기에는 백 프로 뻐팅겨.”
류 현은 뚱한 표정으로 승하를 바라봤다. 할 말은 많았지만, 여기서 더 뭐라고 했다간 팔불출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별 볼일 없는 말재주로 실실 웃고 있는 그녀를 설득할 자신도 별로 없었다.
류 현은 자신이 씹던 고기 덩어리에 다시 관심을 주기로 했다. 몇 입 씹어 삼킨 후에 그는 말했다.
“직접 가르쳐 보시면 아시게 되겠죠. 그래서 직접 맞아보고 뭘 가르치실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방어 훈련이지.”
류 현은 반사적으로 승하를 돌아보았다.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로.
“응? 왜 그래? 혹시 다른 훈련시키던 중이었어? 중간에 다른 거시키면 안 돼?”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시키던 훈련이라 서요.”
“그래? 그럼 좀 기대 해봐도 되려나. 마법사들은 어찌된 게 하나 같이 허약해서, 몇 대 치면 뻗어버리더라고. 아니, 마력도 쓰게 해줬는데 뭐가 그리 힘들다는 건지.”
승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불평하듯이 흘리는 말을 들은 류 현은 그녀들에게 명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그럼 삼 개월 동안 내내 방어 훈련만?”
“그건 기본 훈련이고, 처음 한 달 정도 체력훈련이랑 그것만 하다가 다른 훈련도 해봐야지. 그 뒷부분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니까 장담은 못하겠지만, 아마 혜라가 봐 줄 수 있을 거야.”
“예?”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승하는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깜빡했다. 너 아직 혜라 일 모르지.”
“......?”
“혜라 걔, 얼마 전에 블루퍼플 뚫었어.”
“...진짭니까?”
되물으면서도 류 현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열일곱 살짜리 고딩이 반년도 안 되서 블루 솔플에서 블루퍼플 던전을 뚫었다고? 상황이 달라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는 혹시 눈앞의 검성보다 백혜라가 더 괴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완전 솔플은 아니고. 웨펀 마스터가 보내준 두 명 끼고 갔다 왔어. 아마 네가 그 시험인지 뭔지 받으러 들어가기 전에 퍼플도 들어갈 걸? 퍼플은 던전 찾기가 힘들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부상은 없으신가 보네요. 다행입니다.”
“애초에 수준이 딸려서가 아니라 ‘예거즈’에 있을 때는 던전 구하는 것도 큰일이라서 블루 이상을 못 간 거니까. 기회가 왔으니 잽싸게 붙잡은 거지.”
‘진짜 괴물이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한가롭게 대꾸하는 승하를 보며 류 현은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이런 젊은 괴물을 사장시킨 이전 생의 ‘예거즈’와 검성 살해에 가담한 단체들의 행동력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대체 얼마나 인재를 잡아 족친거야?’
승하는 다시 기지개를 켜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류 현은 의문어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그냥 그럴거다~ 밖에 안 되지 않겠어? 훈련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가서 하자고. 당장 내일 또 블루 던전 들어야가 하는 사람이 팀원 훈련 걱정하는 것도 웃긴 일이고. 안에 있는 괴수 싹 다 잡아달라고 하면 잡아줄 거긴 하지만 그럴 건 아니잖아?”
그리 말하곤 승하는 류 현을 향해서 오른 손을 내뻗었다. 류 현은 그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제 앞가림부터 해야죠.”
***
미국에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 후 육 일간, 류 현은 별 무리 없이 웨인이 필사적으로 수배한 여섯 개의 블루 던전을 모두 털어먹을 수 있었다.
웨인은 일곱 개의 블루 던전이 하나같이 첫 클리어와 함께 소멸되어버린 걸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클리어 된 블루 던전은 큰 자산이지만, 행정서류 상으로 존재하지 않던 블루 던전이 개척까지 한 번 된 채로 있는 건 그에게도 곤란한 일이었으니까. 블루 던전을 안정적으로 클리어 할 수 있는 원정대를 추가로 수배하는 건 아무리 그라도 벅찬 일이었다.
눈보숭이는 첫날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승하는 괴수 고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괴수들은 죄다 류 현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승하는 괴수에 대한 지분보다는, 어떻게 류 현의 배가 터지지 않고 그 많은 고기들을 처리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류 현이 괴수 고기를 씹고 있으면 그의 배 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던전을 털어먹고 나와서는 술로 입가심을 하고, 숙취 없이 말끔한 기분으로 던전으로 출근하는 일상 아닌 일상이 계속 되었다. 류 현은 여섯 번째 블루 던전을 클리어 할 때만 해도,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불안할 지경이었다. 행운과 거리가 멀었던 전생에 비해서 이번은 너무 잘 풀리고 있으니까.
그런 그의 불안은 곧 해소 되었다. 여섯 번째 던전을 클리어하고 그는 협회장을 만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마지막 던전을 돌 준비와 귀국 준비를 해야만 했다.
리비아의 사하라 사막 내에서 퍼플 던전이 터져서 아프리카가 지옥이 되었다는 소식에, 그도 협회장이 약속을 펑크 낸 것을 따져 물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 외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날 이후 화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주 얼굴을 못 본 건 아니었지만, 3초 이상 눈을 맞추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식사시간은 류 현과 승하가 던전 출입을 계속하고 있기에 맞추기가 더 어려웠다.
그걸 제하고도 의도적으로 화련이 그를 피하고 있는 게 확실했고, 그래서 그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찔리는 일도 없지 않아 있기에, 그는 가끔 숙소 내에서 마주치는 희란에게 건너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희란은 화련이 그 날 이후로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명상에 빠지곤 하며, 그 때마다 방안의 물건이 다 떠다닌다고 했다. 류 현은 그 말을 듣고 화련에 대한 우려를 접어두기로 했다. 그녀가 단순히 토라지거나 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으니까.
곧 귀국 일자가 다가왔고, 용잡이 팀은 첫 해외 출장을 클리어 던전 0개라는 기록과 함께 마무리했다.
***
류 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야에는 몸을 가누지 못해서 축 쳐진 야자수 잎 사이로 태양빛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 위에서 빛을 내리쬐고 있는 천체는 태양이 아니고, 저 나뭇잎도 야자수가 아니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저 위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태양이 아니고, 저 나무가 야자수가 아니더라도 그의 짜증은 가시지 않을 테니까.
“후우우.”
열기가 조금 가시는 듯하자 류 현은 한 숨과 함께 거대한 육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걸터앉아 있던 것은, 라가 챔피언이라고 불리던 괴수의 사체였다. 근육질의 괴수는 바닥에 볼썽사납게 고개를 쳐 박고 고꾸라진 모습이었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높이가 류 현의 선 키만 했다. 류 현은 그 거대한 사체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엎어져 있는 또 다른 왜소한 덩치의 시체를 발로 툭 찼다.
“블루 급에서 라가 챔피언이랑 라가 주술사가 같이 더블 보스로 나오면 뭐 어쩌라는 거야? 그냥 블루 원정대였으면 다 뒈졌겠구만. 결정체 계측도 순 사기라니까 사기. 블루퍼플 급에서도 잘 안 나오는 조합이구만.”
후우우, 류 현은 다시금 숨을 몰아쉬며 폐부에 남은 열기를 몰아내었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건 태양빛의 열기가 아니라 라가 주술사의 저주로 인한 열기였다. 보통 플레이어 같으면 당장 타죽는다고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저주였지만, 무식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마력량 때문에 구축된 그의 항마력을 뚫고 나서는, 땡볕에서 구보하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류 현은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턱을 천천히 풀었다. 난이도 이상의 괴수들을 만나서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고, 눈앞에 사체들을 빨리 처리하고 나가봐야 한다. 오늘은 귀국 하고나서 거의 한 달 만에 팀원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니까. 정확히는 그녀들이 훈련하고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거지만.
약속 시간까지 아직 꽤 남았겠지만, 몸에 밴 괴수 피 냄새를 빼고 하려면 빠듯한 정도가 아니라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