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탐식마(貪食魔)
던전은 상위 던전으로 올라 갈수록 내부 환경이 다양해지고, 그 다양성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공략 준비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거기에 블루 이상의 던전의 경우에는 많아 봤자 두 번 클리어하면 던전이 소멸되어버리니, 강제로 미개척 던전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히 아무런 정보도 없는 던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블루 이상의 던전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에게 ‘가방’ 아티펙트가 필수품이 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류 현이 블루 던전을 요구했을 때 웨인이 대답은 던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방’ 아티펙트를 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류 현은 사양하지 않았다. 이름처럼 단순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이 아티펙트는 사용 방법도 매우 간단하다.
중심이 되는 보석에 피를 떨어뜨리고, 사용자의 마력을 각인시키면 보안과 기동이 동시에 끝난다. 한 번 각인이 끝나면 사용자가 사망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은 열 수 없고, 사망 시에도 안에 있는 내용물은 무사히 꺼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냥 재각인 절차를 거쳐서 자신이 새로 쓸 수 있을 뿐.
하지만 편리한 물건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고, ‘가방’의 경우에는 사용하는 공간과 들어있는 물건의 무게에 비례해서 마력이 실시간으로 소모되었다. 플레이어들이 던전 입장 직후 보급품을 땅에 묻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가방’안에 넣어두면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서 뭘 해보기도 전에 탈진해버리니까.
물론 류 현과는 별 인연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웨인이 ‘가방’을 공수해왔을 때 공돈 벌었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가방’은 협회가 특정 수준 이상의 플레이어들에게만 공급하기에 시세가 없지만, 실제로 암시장에서는 최소 십 억 단위에서 거래되곤 하니까.
그래서 그가 괴수 사체를 대부분 먹어치우고 앞발이나 머리 부분을 토막 쳐서 ‘가방’에 집어넣었을 때 승하는 의문을 느꼈다. 그가 말하기로는 괴수 고기에 포만감을 느껴서 못 먹는 상황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데, 괜히 힘 빠지게 왜 챙겨 넣는단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은 류 현이 말했다.
“팀원들한테도 보여주려고 말입니다.”
“아. 혹시 나한테 제일 먼저 알린 거야?”
“예, 협조를 받아야 하는 데 능력을 숨길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설원을 눈밭을 폴짝폴짝 뛰어갔다. 몇 걸음 앞으로 나선 그녀는 몸을 빙글 돌려 류 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빨리 보스 정리하고 나가자.”
“예, 그러죠.”
***
차디찬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어놓으며 스쳐지나갔다. 두 사람은 머리칼을 대충 뒤로 넘겨버린 후에 정면에 있는 문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려오는 것 같은 투명한 얼음으로 짜인 문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100프로네.’
류 현은 자신의 추측이 확신이 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나승하를 돌아보자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보스룸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응? 뭐 문제라기보다도 좀 그래서.”
“뭐가 말입니까?”
“저 안에 있는 거 아마 눈보숭이 일 걸.”
“그 환수 타입 말입니까?”
“응. 오늘이 첫 블루 던전 이라면서? 시작부터 완전 환수타입이라니 뽑기 운이 별로네.”
혀를 차는 승하를 보며 류 현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설원 필드같이 환경적으로 특이한 던전에서 나오는 보스몹의 가짓수는 한정되어있다. 거기에 보스몹이 환수타입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다면 이야기는 끝난 것과 다름없다. 문의 투명도를 볼 때 안에 있는 것은 확실히 환수타입일 것이다.
그리고 블루 던전의 설원 필드에서 나올 수 있는 환수 타입은 두 가지 밖에 없다. 문 크기로 볼 때 나올 만한 건 딱 하나 뿐이고. 숙련된 플레이어 두 명이 보스몹의 정체를 확신했으니, 보스룸에서 다른 것이 튀어나올 확률은 적다.
‘운이 없기는 눈보숭이면 날로 먹기지.’
그리고 류 현은 그 해괴한 이름을 가진 보스몹을 아이스크림 퍼먹듯이 먹어치운 전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그 때처럼 거의 산채로 뜯어먹을 정도로 보스몹과 격차가 나진 않겠지만.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눈보숭이면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본 적 있습니다. 확실히 제가 상대하기는 좀 껄끄럽긴 하겠네요. 백업 잘 부탁드립니다.”
“응, 알았어. 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몸 빼. 경험도 안 다쳐야 빨리 쌓을 거 아냐?”
“예, 그렇죠.”
류 현은 대꾸하며 목에 걸어둔 ‘가방’에서 검은 긴 원통을 하나 꺼내놓았다. 그리곤 바닥의 돌을 집어 문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다음 순간 휙 하고 돌이 허공을 가르며 문으로 날아들었다. 류 현은 옆에 두었던 원통을 집어 들고 열 걸음 이상 거리를 벌렸다. 승하는 그보다 멀리 거리를 벌리고 섰다.
두 사람이 거리를 벌리는 동안 돌이 문에 닿았다. 돌이 문을 때리자 굳건하던 얼음문은 갑자기 흐물텅 녹아내리더니,
푸화학! 문 안쪽에서부터 폭발했다. 거리를 벌리고 섰던 두 사람에게 얼음 조각이 튈 정도로 강렬한 폭발이었다. 류 현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문 안쪽에서 뭔가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사방으로 뻗친 갈기는 얼음보다는 불꽃처럼 보였다. 금이 가거나 요철 없이 매끈한 동체는 금속을 연상시켰고, 초점 없는 얼음으로 된 두 눈에 담긴 적의는 그 무엇보다 뜨거웠다. 수사자의 모습을 한 얼음으로 된 괴수는 정확하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괴수의 살의에 솜털이 서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류 현은 씨익 미소 지었다. 예상이 맞아들어 간 것도 좋았지만, 이럴 때마다 그는 자신과 괴수와의 관계를 재확인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과 괴수와의 관계가 마음에 들었다.
먹느냐, 먹히느냐. 복잡한 생각이 끼어들 필요 없는 단순한 관계. 요 며칠 간 인간관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그에게는 단비 같은 존재였다.
‘오랜만이다, 아이스크림아.’
드물게 맛있는 괴수에 대한 반가움도 없진 않았다.
“눈보숭이 맞네. 쯧, 하필이면 첫 경험에 왜 저런 게 나오고 난리야. 숨 딸린다 싶으면 바로 빼?”
류 현과 달리 그녀는 예상이 맞은 것이 불쾌한지 혀를 차며 다시금 그에게 충고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예, 저도 오늘 부상 입으면 곤란하니까. 최대한 사릴 겁니다.”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은 정 반대였지만.
‘사리긴 개뿔. 그냥 퍼먹기만 하면 되는데.’
류 현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괴수를 마주 보며 원통을 비틀었다. 원통 안에는 검은 막대기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언뜻 보면 촉이 안 달린 화살 같기도 했다. 그 중 하나를 집어든 류 현은 원통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의 행동에 승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뭐라고 참견하진 않았다. 손 놓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녀 또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끼어들어야 하는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한 방에 잡는 건 좀 아니고 좀 투닥거려야겠지.’
류 현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크왕!] 흉성이 터져 나오며 사자모습의 괴수가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괴수는 두 앞발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앞발 안에 숨겨져 있던 발톱이 확 튀어 나오며 허공을 찢었다. 허공이 찢어지며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너 뭐하냐?”
사자 괴수가 찢은 건 허공 뿐 이었다. 류 현은 그 곳에서 반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괴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류 현은 낄낄거리면서 왼다리를 휘둘렀다.
“누가 완전 환수형 아니랄까봐. 진짜 잘 속네.”
뻐억! 괴수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류 현의 로우킥이 괴수의 오른 앞다리를 부숴놓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옆으로 쭉 밀려난 괴수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괴수의 발 주변으로 냉기가 모이더니 부서진 발이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괴수는 그대로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류 현의 키의 3배가량 뛰어오른 괴수는 있는 힘껏, 슈앙! 오른 앞발을 휘둘렀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칼날이 류 현을 덮쳐갔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 남짓한 다음 순간. 퍼엉! 쌓여있던 눈이 폭발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바닥에 내려앉은 괴수는 으르렁거리며 침입자가 서있던 자리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쐐애액! 눈가루를 뚫고 황금빛 섬광이 내달렸다. 섬광은 사자형태의 괴수를 스쳐지나가, 한참 뒤쪽의 바닥을 헤집었다. 그러자, 침입자가 쪽으로 움직이려던 괴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괴수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자신이 쏘아 보낸 일격이 또다시 침입자를 스치지도 못하고 대지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는 사실과, 뭔가 집어던진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침입자의 모습이었다. 사자형태의 괴수의 몸이 깨져나갔다.
그 모습에 어지럽게 눈가루가 휘날리는 난리통 속에서 류 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눈보숭이에 브류나크. 상상만 해봤었는데, 해보니까. 아주 날로 먹기네.’
***
“어떻게 한 거야?”
류 현은 사자괴수였던 얼음조각을 모으던 걸 멈추고 위를 슬쩍 올려다봤다. 나승하는 허리를 굽히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재차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보신대로 운 좋게 잡은 겁니다.”
“운?”
“예, 운이죠.”
류 현의 담담한 대답에 승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운이라고? 그녀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눈보숭이는 블루 던전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완전 환수형 괴수다. 본체는 성인남자의 손바닥 보다 작은, 한줌이 될까 말까한 크기의 새하얀 구체이고, 마력으로 의체를 만들어서 싸운다. 이름처럼 얼음으로 된 의체를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체가 공격당하지 않으면 눈보숭이는 끊임없이 의체를 복구한다. 상처를 누적시키는 돌려 깎기를 기본전법으로 익혀온 플레이어에게는 골치 아픈 상대다. 거기다가 본체가 의체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의체를 조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숨어있는다.
범위는 개체마다 다르지만 조종 범위는 15미터에서 20미터 가량. 설원 필드에서만 등장하는 괴수라는 사실과 결합해보면 본체를 눈으로 발견해서 타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눈보숭이와의 싸움은 지구전이다. 천천히 괴수의 주변을 초토화시켜서 활동범위를 줄여야 하니까.
그렇다고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눈보숭이 같은 완전 환수형. 그러니까 감각기관 이랄 게 없는 무생물 같아 보이는 괴수는 마력의 흐름으로 상대를 파악하기에, 일반 괴수들이 속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속임수에 속기도 한다. 일순간 마력을 내뿜으면 그걸 침입자의 몸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알아도 그런 식으로 눈보숭이를 속이는 건 처음 봤어.’
류 현이 부린 마술이 그런 것이었다. 마력을 마구잡이로 내뿜어서 눈보숭이가 자신의 몸집을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의 공격을 눈보숭이 스스로 빗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는 있다. 그녀도 아는 사실이니까.
‘어떻게 본체만 쏙 타격한 거지?’
뭔지는 몰라도 소모성 장비로 눈보숭이를 일격에 죽였다. 일격에 방어막을 뚫은 그 장비의 성능도 놀랍지만, 손바닥 보다 작은 표적을 찾아내서 한 방에 맞춰버린 건 놀라운 걸 넘어서 이상할 지경이다. 그는 운으로 치부했지만.
‘절대 운이 아냐.’
나승하는 확신했다. 그건 운이 아니라 확신에 찬 사냥꾼의 회심의 일격이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의구심을 다시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운으로 밀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는 순순히 입을 열 생각도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다른 걸 얻었으니까. 그녀는 당장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라고 했었지?’
그녀가 그의 등을 바라보며 히죽 미소 짓고 있는 동안, 그는 작업을 대충 끝내었다.
류 현은 손바닥에 모아놓은 부서진 눈보숭이 본체를 그녀에게 쓱 내밀며 말했다.
“이것도 시식해 보셔야죠.”
“응? 이것도 먹어?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땅돼지 이빨에 대보니까. 색은 안 변하던데요.”
땅돼지 이빨은 던전 내에서 예전 은수저가 했던 역할 대용으로 쓰이곤 한다. 독성이 있거나, 강한 산성이거나 강한 염기성을 띄거나 해도 색이 변한다. 그렇다고 그게 먹어도 된다는 증거는 아니었지만, 류 현은 이미 눈보숭이 사체가 식용으로 팔리는 미래를 본 이다. 굳이 권해서 먹일 필요야 없지만,
‘쩔도 받아놓고 그냥 그걸로 입 닦기도 좀 뭐하지.’
승하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것을 바라보다가 가장 작은 조각을 집어 들고는, 눈을 딱 감고 삼켰다.
“아?”
곧바로 그녀의 눈이 뜨이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류 현은 미소 지었다. 그도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어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 이건 시작이 슈팅스타네.’
눈보숭이. 그의 전생에서는 한 번에 열 가지 이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불티나게 팔린 부자들의 아이스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