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질린 얼굴로 나승하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품 속을 뒤적여서 작은 손칼을 찾아내어 화이트 팽의 목덜미를 후벼 팠다. 그가 뚫은 구멍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류 현은 근처 나무에 화이트 팽의 시체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후,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손을 대충 닦아내었다. 이 정도로 손 시림을 느낄 리가 없는 몸뚱이니 흙보다는 눈이 훨씬 나았다. 그가 피를 대충 닦아내고 나자 승하가 물어왔다.
“왜 저렇게 해놓은 거야?”
“방혈해야지요. 피 안 빼고는 못 먹습니다. 보통은요. 괴수 고기는 안 그래도 냄새가 강해서 피 안 빼면 고기가 아니라 그냥 음식물 쓰레기죠. 피 빼고 나서도 가죽도 벗기고 내장도 덜어내야 합니다만.”
“너도 만날 저렇게 하는 거야? 시간 오래 걸리겠네.”
“저야 그냥 먹지요. 미식하겠다고 먹는 게 아니니까요.”
“흐음...그래? 저거 얼마나 걸려?”
“글쎄요. 저도 제대로 방혈 해보는 건 오랜 만이라. 저 부위만 자르면 되는 게 맞는지도 가물가물해서요.”
사실 방혈도 이전 생에서 대충 배우다 말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둘째 치고, 피 냄새를 어떻게 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솔플 위주의 던전 사냥을 해온 그에게 근처의 괴수들이 몰려드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일이었다. 보스몹을 잡고 나서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냥 방혈만 한다고 고기가 맛있어 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전 생에서 류 현은 도축 동영상을 한 번 보고 난 후 도축에 대해서 깨끗하게 포기했다. 얻을 수 있는 성과에 비해서 과정이 너무 번거로운 것도 있지만, 그가 접할 수 있는 도축지식으로는 써먹을 수 있는 한계선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지식을 뒤적거릴 때쯤에 그는 이미 블루 던전을 혼자서 털어먹을 수준이 되어있었으니까. 환수 타입에 한 발 걸친 괴수들에게 현실의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지식은 쓸모 있는 경우가 더 적었다.
‘차라리 좀 욕보더라도 그냥 먹는 게 낫지.’
한두 번 먹고 말 것도 아니고, 맛있게 먹는다고 마력이 더 쌓이는 것도 아니니 미식욕구쯤은 간단하게 억누를 수 있었다. 경지가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 감각을 둔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지금은 대접해야할 손님이 옆에 있으니 그럴 수가 없지만.
승하는 거꾸로 매달린 화이트 팽의 시체 주변을 빙빙 돌다가 불쑥 말했다.
“고기 한 번 먹는 게 이렇게 번거로울 줄은 몰랐어.”
그녀도 제대로 된 도축을 거쳐서 괴수 고기를 먹은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뭐 저래 보여도 대소환 초기 때부터 활동한 원로급이니까.’
그녀가 괴수 고기를 먹었을 때는 신입 엿 먹이는 전통이 아니라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을 때였을 것이다. 던전에 대한 지식도, 아티펙트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그 때.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인류가 던전에 도전을 계속 하던 시대.
그녀가 삼킨 괴수 고기도, 모르긴 몰라도 류 현이 집어삼켰던 생고기랑 비슷하면 비슷했지 별로 나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고기를 먹어놓고 다시 먹을 생각이 드나.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 감성은 밥 말아먹은 류 현은 경외감 보다는 질색하는 감정이 더 앞섰지만. 류 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승하는 아래에 고인 핏물을 검으로 뒤적거리다가 그에게로 다가섰다.
“왜 그러시는지?”
“저거 피 빼는 데 얼마나 더 걸릴 거 같아?”
“글쎄요. 처음 잡아본 녀석이라. 저 덩치도 그렇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의 뱃속으로 사라진 최소 백단위의 화이트 팽들이 들으면 원한 서린 울음으로 합창을 할 테지만, 소화된 고기들은 울지 못한다. 류 현은 눈알을 굴려 거꾸로 매달아 놓은 화이트 팽의 시체를 바라봤다. 벌써 아래 눈을 녹이고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길어야 앞으로 오 분? 확신은 못하겠네요.”
“오 분? 충분하네.”
그녀는 류 현의 말을 듣고는 거두었던 검을 다시 피 웅덩이에 담갔다. 류 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피 냄새 맡고 근처에 몇 마리 몰려든 거 같아서. 정리하고 올게.”
그리 말하곤 승하는 류 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눈으로 뒤덮인 숲을 향해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지 얼마가지 않아 괴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류 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숲 쪽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살다보니 나도 쩔을 다 받아보네.”
***
주황빛 모닥불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눈이 따가웠다. 류 현은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기대어린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승하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그 위에서 익어가는 고깃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각보다 별로 일겁니다.”
“응, 응. 알아들었어.”
전혀 알아들은 이의 표정이 아니었기에 류 현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동에 코웃음 쳤다.
‘덕분에 꿀 잘 빨고 있으면서 무슨 놈의 한 숨이야.’
류 현은 앉은 자리 뒤편을 돌아봤다. 지금 모닥불 위에서 익어가는 화이트 팽보다 더 큰 화이트 팽 세 마리,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예티 한 마리. 였던 것들이 가죽이 벗겨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설원위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전부 한 칼에 절명했다는 걸 증명하듯이 목과 몸뚱이가 말끔하게 분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웬만한 블루 던전이라면 보스몹을 제외한 괴수 전체의 개체 수였다.
검성이 주변을 잠깐 정리한답시고 나가서 잡아온 것들이었다. 그 잠깐 새에 말 그대로 보이는 대로 도륙을 해버려서, 잡는 시간보다 끌어오는 시간이 몇 배로 걸릴 정도였다.
그 동안 류 현이 한 일이라고는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혼자서 낑낑거리며 괴수를 끌고 오는 그녀를 좀 거들어준 것뿐이었다.
그 뒤에 방혈이나 박피는 직접 하긴 했지만, 그는 블루 던전에 사냥을 온 건지 쩔을 받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던전에 들어온 것 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편했다. 너무 편해서,
‘던전에 들어왔다고 좀이 쑤시다니 확실히 나도 편하게 뒈질 팔자는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정도였다.
자신을 향해서 쓴웃음을 날리던 류 현은 모닥불 위에서 그슬려지고 있던 고기를 살피고는 말했다.
“이제 다 익은 것 같네요. 드셔도 됩니다.”
승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깃덩어리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류 현은 속으로 픽 웃었다.
‘후회할 텐데.’
괴수 중에서 맛이 괜찮은 것도 몇 가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맛이 알려지기 힘들 정도로 별로다. 류 현은 이 분야에 있어서는 독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입 가득 고기를 베어 물었던 그녀는 두세 번 정도 씹더니, 씹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괴수 고기 냄새는 밖에서 먹는 초식동물이나 육식 동물 수준이 아니지. 향신료로 샤워를 시켜도 커버가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 화이트 팽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는 속으로 낄낄거리면서 그녀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멈칫했던 승하는 고기 덩어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안의 것을 삼키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류 현은 진심으로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걸 그냥 먹어?’
그녀가 자신의 허벅다리만한 고기 덩어리를 다 뜯어먹는 걸 류 현은 멍하니 지켜봤다. 보급품이 다 떨어진 상황도 아니고 재미삼아 먹는 상황인데 그걸 다 뜯어먹다니. 류 현은 검성 나승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 지식이 진실과는 많이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짜 이 인간은 괴물이야.’
류 현이 그녀의 괴물스러움에 감탄하고 있자, 나승하가 입을 거푸 문지르더니 한숨을 토하듯이 말했다.
“으하아, 정말 생각보다 별로네. 이걸 어떻게 참고 먹어?”
승하의 말에 류 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그냥 참고 꾸역꾸역 먹은 거란 말인가? 목숨이랑 직결된 것도 아닌데?
“맛없는 데 그냥 다 드신 겁니까? 전 다 드시는 거 보고 의외로 입에 맞으시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먹다 말고 내팽개쳐. 그럼 벌 받아. 그것도 내가 달라고 한 거잖아? 혼자 있을 때는 이렇게 번거로운 짓 안한다면서?”
류 현은 다시금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무대포로 일관해온 인간이 왜 이런 데서는 쓸데없이 배려를 하는 걸까? 느낀 바를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기에 류 현은 최대한 빙 둘러서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 여기 들어와서 그거 말고 한 것도 없잖습니까. 저 습격한 화이트 팽 하나 잡은 건 말고 말입니다.”
“에이, 동료끼리 뭘 그런 걸 따져. 어쩌다 보면 누가 더 많이 잡고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내가 그러는 동안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럼 동료끼리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맛있을 리가 없는 데 꾸역꾸역 다 드시는 거 보고 놀랐잖습니까.”
“아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 음, 그럼 다음 것부터는 한 입 정도만 먹는 걸로?”
“좋을 대로 하십쇼.”
‘그래 봤자 먹을 만 한 건 없겠지만.’
그리고 류 현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 항복. 못 먹겠다. 진짜 못 먹겠어.”
나승하가 자기 팔목만한 뼈를 뒤편으로 휙 던져버렸다. 그의 예상처럼 다른 화이트 팽과 예티 어느 것 하나 꽝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꽝의 기준을 정한 게 괴수 고기를 꾸역꾸역 먹어온 류 현이라는 시점에서 다른 이에게 어떻게 느껴질 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류 현은 이번에는 웃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는 킥킥거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그래서 말했잖습니까. 강해지는 거 아니면 돈 받고도 안 먹을 거라고.”
“그래도 정도가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하나 같이 별로 일 줄은. 마력량도 쥐꼬리만큼도 안는 거 같고.”
승하는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류 현은 몇 번 더 킥킥거린 후에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괴수 주워 먹고 강해지는 능력까지 있으면 저 같이 밑천이 그것뿐인 어떻게 삽니까. 당연한 겁니다.”
“...내가 네 얘기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걔들이 거품 물고 달려들 걸?”
“검성이 저처럼 날로 먹으려고 들었다고 하면 저한테 협조할 겁니다.”
뭐가 그리 웃긴 것인지 승하는 그의 말에 한참 동안 깔깔거렸다. 다 웃고 나자 그녀는 무릎에 얹혀놓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저것들 먹어야 하지? 들고 나갈 수도 없으니까. 그 동안 내가 보스룸까지 정리하고 올까?”
“아뇨, 단순히 먹기만 해서야 그냥 몸만 불릴 뿐이죠. 잔챙이들은 정리 해주셨으니 보스몹은 제가 처리하고 싶습니다만. 안 되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 귀한 대접도 받았으니까. 맛은 별로였지만.”
이번에는 류 현도 그녀와 같이 킥킥거렸다. 류 현은 조용히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모르죠. 보스몹은 이름 값해서 맛있을지.”
예상을 말하는 이 치고는 지나치게 확신에 찬 목소리였지만 승하가 그 이유를 알 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