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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화 〉탐식마(貪食魔) (47/429)



〈 47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질린 얼굴로 나승하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품 속을 뒤적여서 작은 손칼을 찾아내어 화이트 팽의 목덜미를 후벼 팠다. 그가 뚫은 구멍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류 현은 근처 나무에 화이트 팽의 시체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후, 눈으로 피투성이가 된 손을 대충 닦아내었다. 이 정도로 손 시림을 느낄 리가 없는 몸뚱이니 흙보다는 눈이 훨씬 나았다. 그가 피를 대충 닦아내고 나자 승하가 물어왔다.

“왜 저렇게 해놓은 거야?”
“방혈해야지요. 피 안 빼고는 못 먹습니다. 보통은요. 괴수 고기는 안 그래도 냄새가 강해서  안 빼면 고기가 아니라 그냥 음식물 쓰레기죠. 피 빼고 나서도 가죽도 벗기고 내장도 덜어내야 합니다만.”
“너도 만날 저렇게 하는 거야? 시간 오래 걸리겠네.”
“저야 그냥 먹지요. 미식하겠다고 먹는  아니니까요.”
“흐음...그래? 저거 얼마나 걸려?”
“글쎄요. 저도 제대로 방혈 해보는  오랜 만이라.  부위만 자르면 되는 게 맞는지도 가물가물해서요.”


사실 방혈도 이전 생에서 대충 배우다 말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둘째 치고, 피 냄새를 어떻게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솔플 위주의 던전 사냥을 해온 그에게 근처의 괴수들이 몰려드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일이었다. 보스몹을 잡고 나서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냥 방혈만 한다고 고기가 맛있어 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전 생에서 류 현은 도축 동영상을 한 번 보고 난  도축에 대해서 깨끗하게 포기했다. 얻을  있는 성과에 비해서 과정이 너무 번거로운 것도 있지만, 그가 접할  있는 도축지식으로는 써먹을  있는 한계선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지식을 뒤적거릴 때쯤에 그는 이미 블루 던전을 혼자서 털어먹을 수준이 되어있었으니까. 환수 타입에   걸친 괴수들에게 현실의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지식은 쓸모 있는 경우가  적었다.

‘차라리 좀 욕보더라도 그냥 먹는 게 낫지.’


한두  먹고 말 것도 아니고, 맛있게 먹는다고 마력이  쌓이는 것도 아니니 미식욕구쯤은 간단하게 억누를 수 있었다. 경지가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 감각을 둔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지금은 대접해야할 손님이 옆에 있으니 그럴 수가 없지만.


승하는 거꾸로 매달린 화이트 팽의 시체 주변을 빙빙 돌다가 불쑥 말했다.

“고기  번 먹는 게 이렇게 번거로울 줄은 몰랐어.”

그녀도 제대로 된 도축을 거쳐서 괴수 고기를 먹은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뭐 저래 보여도 대소환 초기 때부터 활동한 원로급이니까.’

그녀가 괴수 고기를 먹었을 때는 신입 엿 먹이는 전통이 아니라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을 때였을 것이다. 던전에 대한 지식도, 아티펙트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그 때.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인류가 던전에 도전을 계속 하던 시대.

그녀가 삼킨 괴수 고기도, 모르긴 몰라도  현이 집어삼켰던 생고기랑 비슷하면 비슷했지 별로 나은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고기를 먹어놓고 다시 먹을 생각이 드나.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 감성은 밥 말아먹은 류 현은 경외감 보다는 질색하는 감정이  앞섰지만. 류 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승하는 아래에 고인 핏물을 검으로 뒤적거리다가 그에게로 다가섰다.

“왜 그러시는지?”
“저거  빼는  얼마나  걸릴  같아?”
“글쎄요. 처음 잡아본 녀석이라. 저 덩치도 그렇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의 뱃속으로 사라진 최소 백단위의 화이트 팽들이 들으면 원한 서린 울음으로 합창을 할 테지만, 소화된 고기들은 울지 못한다. 류 현은 눈알을 굴려 거꾸로 매달아 놓은 화이트 팽의 시체를 바라봤다. 벌써 아래 눈을 녹이고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길어야 앞으로  분? 확신은 못하겠네요.”
“오 분? 충분하네.”


그녀는 류 현의 말을 듣고는 거두었던 검을 다시 피 웅덩이에 담갔다.  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피 냄새 맡고 근처에  마리 몰려든  같아서. 정리하고 올게.”

그리 말하곤 승하는 류 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눈으로 뒤덮인 숲을 향해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지 얼마가지 않아 괴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류 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숲 쪽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살다보니 나도 쩔을  받아보네.”
***


주황빛 모닥불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눈이 따가웠다. 류 현은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기대어린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승하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그 위에서 익어가는 고깃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각보다 별로 일겁니다.”
“응, 응. 알아들었어.”


전혀 알아들은 이의 표정이 아니었기에 류 현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동에 코웃음 쳤다.

‘덕분에 꿀 잘 빨고 있으면서 무슨 놈의 한 숨이야.’

 현은 앉은 자리 뒤편을 돌아봤다. 지금 모닥불 위에서 익어가는 화이트 팽보다 더 큰 화이트 팽  마리,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예티 한 마리. 였던 것들이 가죽이 벗겨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설원위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전부 한 칼에 절명했다는 걸 증명하듯이 목과 몸뚱이가 말끔하게 분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웬만한 블루 던전이라면 보스몹을 제외한 괴수 전체의 개체 수였다.

검성이 주변을 잠깐 정리한답시고 나가서 잡아온 것들이었다. 그 잠깐 새에  그대로 보이는 대로 도륙을 해버려서, 잡는 시간보다 끌어오는 시간이  배로 걸릴 정도였다.

그 동안 류 현이 한 일이라고는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혼자서 낑낑거리며 괴수를 끌고 오는 그녀를 좀 거들어준 것뿐이었다.

 뒤에 방혈이나 박피는 직접 하긴 했지만, 그는 블루 던전에 사냥을 온 건지 쩔을 받는 건지 분간이 안  지경이었다. 던전에 들어온 것 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편했다. 너무 편해서,


‘던전에 들어왔다고 좀이 쑤시다니 확실히 나도 편하게 뒈질 팔자는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정도였다.

자신을 향해서 쓴웃음을 날리던 류 현은 모닥불 위에서 그슬려지고 있던 고기를 살피고는 말했다.

“이제  익은  같네요. 드셔도 됩니다.”


승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깃덩어리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류 현은 속으로  웃었다.


‘후회할 텐데.’

괴수 중에서 맛이 괜찮은 것도 몇 가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맛이 알려지기 힘들 정도로 별로다.  현은 이 분야에 있어서는 독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입 가득 고기를 베어 물었던 그녀는 두세 번 정도 씹더니, 씹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괴수 고기 냄새는 밖에서 먹는 초식동물이나 육식 동물 수준이 아니지. 향신료로 샤워를 시켜도 커버가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 화이트 팽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는 속으로 낄낄거리면서 그녀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멈칫했던 승하는 고기 덩어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안의 것을 삼키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류 현은 진심으로 질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걸 그냥 먹어?’

그녀가 자신의 허벅다리만한 고기 덩어리를 다 뜯어먹는 걸 류 현은 멍하니 지켜봤다. 보급품이  떨어진 상황도 아니고 재미삼아 먹는 상황인데 그걸  뜯어먹다니.  현은 검성 나승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 지식이 진실과는 많이 다른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짜  인간은 괴물이야.’


류 현이 그녀의 괴물스러움에 감탄하고 있자, 나승하가 입을 거푸 문지르더니 한숨을 토하듯이 말했다.


“으하아, 정말 생각보다 별로네. 이걸 어떻게 참고 먹어?”

승하의 말에 류 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그냥 참고 꾸역꾸역 먹은 거란 말인가? 목숨이랑 직결된 것도 아닌데?


“맛없는  그냥  드신 겁니까? 전 다 드시는 거 보고 의외로 입에 맞으시는  알았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먹다 말고 내팽개쳐. 그럼 벌 받아. 그것도 내가 달라고  거잖아? 혼자 있을 때는 이렇게 번거로운 짓 안한다면서?”


류 현은 다시금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무대포로 일관해온 인간이 왜 이런 데서는 쓸데없이 배려를 하는 걸까? 느낀 바를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기에 류 현은 최대한 빙 둘러서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 여기 들어와서 그거 말고 한 것도 없잖습니까. 저 습격한 화이트 팽 하나 잡은 건 말고 말입니다.”
“에이, 동료끼리 뭘 그런 걸 따져. 어쩌다 보면 누가 더 많이 잡고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내가 그러는 동안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그럼 동료끼리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맛있을 리가 없는 데 꾸역꾸역 다 드시는 거 보고 놀랐잖습니까.”
“아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 음, 그럼 다음 것부터는  입 정도만 먹는 걸로?”
“좋을 대로 하십쇼.”

‘그래 봤자 먹을 만  건 없겠지만.’


그리고 류 현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아, 항복. 못 먹겠다. 진짜  먹겠어.”

나승하가 자기 팔목만한 뼈를 뒤편으로  던져버렸다. 그의 예상처럼 다른 화이트 팽과 예티 어느 것 하나 꽝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꽝의 기준을 정한 게 괴수 고기를 꾸역꾸역 먹어온 류 현이라는 시점에서 다른 이에게 어떻게 느껴질 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류 현은 이번에는 웃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는 킥킥거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그래서 말했잖습니까. 강해지는 거 아니면  받고도 안 먹을 거라고.”
“그래도 정도가 있을  알았지. 이렇게 하나 같이 별로 일 줄은. 마력량도 쥐꼬리만큼도 안는 거 같고.”


승하는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눈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류 현은  번 더 킥킥거린 후에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괴수 주워 먹고 강해지는 능력까지 있으면 저 같이 밑천이 그것뿐인 어떻게 삽니까. 당연한 겁니다.”
“...내가 네 얘기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걔들이 거품 물고 달려들 걸?”
“검성이 저처럼 날로 먹으려고 들었다고 하면 저한테 협조할 겁니다.”

뭐가 그리 웃긴 것인지 승하는 그의 말에 한참 동안 깔깔거렸다. 다 웃고 나자 그녀는 무릎에 얹혀놓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저것들 먹어야 하지? 들고 나갈 수도 없으니까.  동안 내가 보스룸까지 정리하고 올까?”
“아뇨, 단순히 먹기만 해서야 그냥 몸만 불릴 뿐이죠. 잔챙이들은 정리 해주셨으니 보스몹은 제가 처리하고 싶습니다만. 안 되겠습니까?”
“안 될  없지. 귀한 대접도 받았으니까. 맛은 별로였지만.”

이번에는 류 현도 그녀와 같이 킥킥거렸다. 류 현은 조용히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모르죠. 보스몹은 이름 값해서 맛있을지.”


예상을 말하는 이 치고는 지나치게 확신에 찬 목소리였지만 승하가 그 이유를 알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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