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탐식마(貪食魔)
팔락팔락. 서류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방안은 조용했다. 서해란은 침 삼키는 것도 자제하고 서류를 넘기고 있는 손을 주시했다. 이윽고 서류를 넘기는 손이 멈췄을 때, 해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남자는 코끝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물건은 확실하긴 하구나. 제대로 정제한 것도 아닌 데 이정도 라니. 생산 라인 구축하는 데 두 달 정도 잡고, 이 정도면...손익분기점 운운할 것도 아니군.”
“그거 얘기하자고 여기 온 거 아니에요. 아빠.”
해란은 부루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남자, 서대진은 조금씩 희끗희끗한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한 앞머리를 살짝 넘기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는 딸을 가진 아버지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럼 회장실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집에서 말을 했어야지 해란아.”
“집에서는 일 얘기하기 싫다면서 또 얼렁뚱땅 넘어가실 거잖아요. 제가 계속 속을 줄 아세요?”
“그거야 네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으니까 더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그랬던 거지.”
“제가 무슨 어린애에요? 생각도 안하고 그런 얘기를 하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서대진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해란은 결국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에게 자식이 영원히 어린애인 것처럼, 자식에게도 부모는 영원히 이기기 힘든 어른이니까.
“어쨌든, 오늘은 그런 식으로 못 넘어가드려요. 더 손 놓고 있다가는 엉뚱한 녀석들이 완전히 채갈 거라구요.”
“플레이어와 관련된 일인데 협회가 영 엉뚱한 녀석들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거 같은데. 그 친구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끼어드는 게 엉뚱한 녀석들이 괜히 흙탕물 일으키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니?”
“아빠!”
해란이 빽 소리치자 대진은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가 껄껄 웃어젖혔다. 그는 속으로 비서들을 모두 물려놓은 자신의 혜안을 칭찬하고는 말했다.
“그 친구 밀당 기술이 어지간히 좋은가 보구나. 우리 공주님이 못 가져서 안 달하는 걸 보면. 그 주희인가 하는 친구도 한 달 안 걸렸던 거 같은데. 아니냐?”
“계속 장난치실 거면 저 갈 거에요?”
“알았다, 알았어.”
속마음 같아서는 좀 더 장난을 걸고 싶었지만, 해란이 잘 토라지지 않는 대신 한 번 토라지면 굉장히 오래가는 타입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대진은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탁자에 놓아둔 서류를 집어 팔락거리면서 말했다.
“확실히 이런 상품을 덜컥 내놓을 정도라면 이 친구가 가진 정보력만으로도 스폰 해 주기에는 충분하지.”
그 서류에는 그림자 두꺼비의 독으로 만든 마나 포션 시제품의 효력이나 정제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들이 적혀있었다. 열 장이 넘는 서류들의 내용을 한 줄 요약하면 이거였다. 매우 장래성이 밝고 많이 남으므로 적극적인 투자를 할 필요가 있음.
“조사해 봤을 때 딱히 다른 줄도 없는 것 같았고 말이지.”
“그렇죠.”
‘터주’의 팀장과 하나 연관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그건 그룹의 총수 입장에서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줄이었다. 특히 ‘터주’는 정재계의 암묵적인 합의로 창설된 조직이니까. 대진의 위치라면 팀장 정도 하나 파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네.”
“이 아버지는 그 부분이 불안하구나.”
“네?”
“이 친구에게 이어진 다른 줄은 분명히 없다고 봐야겠지. 이 정도로 열심히 털었는데 아무것도 안 걸릴 정도라면 혹여 있었더라도 지금은 줄이 끊어지거나, 끊어진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연계가 약화 되어있을 테지.”
“...그래서요?”
“그런데도 이 류 현이라는 친구는 계속해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구나. 자신의 둘러싼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냥 바보의 무모함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절묘하게 외줄을 타고 있지. 등을 떠미는 배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거기다가 자기가 돌봐야 하는 가족도 있지 않느냐. 그 가족에 대해서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하지만 그도...”
“그래, 위로 가는 게 목표라고 하였다고 했지.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니?”
해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진은 팔짱을 끼고 몸을 소파에 파묻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목적이 확실한 이는 믿을 수 있다. 믿지 못하더라도 서로 협업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친구가 말하는 목표는 너무 모호하구나. 모호한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친구가 움직이는 모습은 그 모호한 목표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
“그럼 밀어줄 수 없으시다는 거에요?”
“거래관계나 스폰 정도는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가능하지. 이 친구가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손 털기가 어려울 테니 다시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미 가치가 충분한 물건을 받기도 했고. 우리 이름 정도 팔아서 그 친구를 비호해주는 것 쯤이야 거스름돈 청산 하는 걸로 생각 할 수도 있다.”
대진의 대꾸에 해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치는 말들은 뭣하러 한 거란 말인가?
서대진은 소파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켜 해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해란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했다가 대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진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해란아, 내가 걱정하는 건 너란다.”
“.....”
“이 친구의 능력에 대해서는 나는 뭐라고 할 의향이 없다. 플레이어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내가 검성이나 협회에서 관심을 보이는 이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헛소리 밖에 안 되겠지. 하지만 말이다. 해란아, 이 아버지가 플레이어에 대한 지식은 얕아도 위험한 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단다.”
“그는...”
“그래, 지금까지 태도로 볼 때 그 친구가 갑자기 피에 미친 살인마가 돼서 스폰서의 딸을 죽이려고 들 가능성은 없겠지.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친구가 너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려고 드는 상황이 아니란다.”
“그런 친구들이 있지. 앞서 달리면서 이상할 정도로 뒤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들이. 보는 걸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 친구를 따라서 달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낭떠러지로 달려가게 되기도 한단다. 나는 다른 것 보다 그리 될까 걱정이구나.”
대진은 그게 할 말의 전부인지 해란을 바라볼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해란은 조금 고심한 후에 대답했다.
“명심해 둘게요. 걱정 마세요, 아빠 딸도 이제 작긴 해도 조직의 장이니까요. 그 정도 앞가림은 할 수 있어요.”
대진은 만족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해란의 손을 놓아주었다. 해란은 뭔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다가 회장실 전화기가 울리자 작별을 고하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회사 건물을 나서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착신자 이름에는 류 현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져있었다.
하지만 해란은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기본 착신음이 계속해서 울리더니 자동응답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뉴욕이면 지금은 낮 일 텐데?”
그녀의 의문에 대답은 없었다.
같은 시각 류 현은,
“어, 내가 잘 못 이해한 거 같은 데 어디가 다르다는 거야? 플레이어들도 괴수 때려잡으면 강해지는 건 맞잖아? 티는 잘 안나지만.”
“그러니까, 전 그냥 때려잡고 마는 게 아니라...”
“아니라?”
“먹어서 흡수 할 수 있습니다.”
해란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하던 비밀을 시원스레 까발리는 중이었다. 웨인이 어렵사리 수배하는 데 성공한 블루 던전을 바로 코앞에 두고 말이다.
나승하는 고개를 갸웃한 상태로 잠깐 멈춰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뭘 쥐고 뜯어먹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먹는다고?”
“예.”
“어, 그럼 강해진다고?”
“정확합니다.”
류 현의 대답에 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금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속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검성을 바라봤다.
‘그녀들한테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건 아니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팀원들의 얼굴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팀원들보다 검성에게 먼저 말하게 되었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류 현의 마음속은 꽤나 편안한 상황이었다.
‘그래, 이번 일주일만 지나고 나면 이야기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승하가 협조적으로 나와 줘야만 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 숙인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고 몸을 숙였다. 그 때, 나승하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나도 그것들 먹으면 그렇게 되려나?”
“예?”
돌아온 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
빛 무리를 해치고 들어가자 건조하고 찬바람이 그를 반겼다. 류 현은 빛무리에서 벗어나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사방이 하얀색뿐이었다.
‘설원이라 오랜만이네.’
류 현은 발을 한 번 비비적거려보았다. 뽀드득 거리며 눈이 뭉개졌다. 그러고 있는 동안 승하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주변을 휘둘러보더니 대번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에이, 하필이면 설원 필드네.”
“눈 싫어하시는 가 봅니다.”
“...눈이랑 관련돼서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
말하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류 현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재차 확인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정말로 드실 겁니까?”
“응? 어, 몇 번 먹어보긴 했는데 그 때는 대충 배에 뭐 들어있다는 감각만 유지할 정도로 먹고 만 거라서. 혹시 모르잖아?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먹을 만 한 건 못 되는데...후회하셔도 전 모릅니다.”
“응, 응. 내가 먹겠다고 한 건데 뭐. 못 먹겠다 싶으면 관두면 되지.”
“그리고 전 독 있고 없고 가리고 먹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거 못 가려드립니다.”
“응? 독도 소화시켜? 와. 혹시, 괴수 잡을 때 뜯어먹으면서 잡아?”
“그럴 리가요.”
눈을 반짝이면서 바짝 다가서는 그녀를 보며 류 현은 다시금 검성 정신 이상설을 밀고 싶어졌다.
‘어떻게 된 인간이면, 괴수 뜯어먹는 거에 놀라는 것보다 자기가 먹어볼 생각을 할 수 있지?’
플레이어들은 레드, 오렌지 이하만 전전하는 하수가 아니라면 한 번 정도는 괴수 고기를 먹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미개척 던전에 들어갔다가 예상보다 클리어에 오래 걸려서 먹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참 플레이어들이 상황을 만들어서 먹이는 경우가 더 많다. 보급품의 중요성과 수색기간 조절의 중요성을 인지시키기 위한 고약한 신고식의 일종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 기억을 던전에 관련된 것 중에서 가장 고약한 기억으로 꼽는 게 대부분이다. 제대로 된 도축이 안 되었을 뿐더러, 조리조차 환경문제 때문에 제대로 못한 고기가 맛있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니까. 애초에 신입을 엿 먹이는 게 목적인 전통이기도 하고.
땅돼지처럼 미식재료로 팔리는 경우가 특이 케이스인 것이다. 보통 괴수 사체를 던전 밖으로 내가도 그걸 실험재료로 제공하지 먹어볼 생각은 거의 안하니까. 저급 던전에서 등장하는 괴수들이 우연찮게 맛이 알려져서 식용으로 쓰이는 경우를 제외하면, 플레이어들은 괴수 고기를 먹는 경험은 한 번 이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류 현의 능력에 대한 검성의 반응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다. 담담하게 그런가 보다 하는 걸로 모자라서 ‘그럼 나도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나?’라고 생각은 보통 안하니까.
‘그래, 질색하고 경계 받는 것보다는 낫지. 몇 번 먹이면 제 풀에 포기할 테니까.’
류 현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였다. 나승하는 류 현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거.”
[크왕!]
그와 동시에 그녀의 지적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아무 것도 없던 설원에서 뭔가가 튀어 올랐다. 류 현에 뒤돌아봤을 때 그가 볼 수 있는 건 쩍 벌어진 속이 검은 입이었다.
‘화이트 팽?’
화이트 팽. 설원 필드의 단골손님이자, 설원 필드에서 플레이어 사망률을 올리는 데 일등 공신 중 하나다. 지구상 가장 큰 늑대라는 다이어 울프의 1.5배 되는 덩치에 이름처럼 하얀 털이 온몸을 덮고 있다. 그 외의 특징은 말도 안 되는 은신 능력과 치악력.
보통은 화이트 팽이 눈밭에 있으면 직접 만져보지 않는 이상 코앞까지 가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모르고 다가가면 쇠도 끊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치악력으로 콱.
류 현이 다음 생각을 하기도 전에 화이트 팽이 그의 왼팔을 콱 하고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게 화이트 팽에게 있어서 최악의 수였다. 화이트 팽은 물어뜯은 그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혈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쇠도 끊어버리는 물어뜯기에도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고마워, 알아서 찾아와줘서.”
류 현은 자신의 왼팔을 물고 늘어진 늑대를 보고 픽 웃으며 오른 팔을 휘둘렀다. 화이트 팽의 머리를 향해서.
뻐억!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류 현은 그대로 축 늘어진 화이트 팽의 턱을 벌리고는 왼팔을 끄집어내었다. 입고 있던 옷이 뚫리고, 살갗이 살짝 까졌지만 피가 나오진 않았다.
그가 화이트 팽의 시체를 내려 보며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자, 나승하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거 먹을 수 있을까?”
류 현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