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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탐식마(貪食魔) (45/429)



〈 45화 〉탐식마(貪食魔)

“또 웃기지도 않는 짓 하고 있네.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나한테 그렇게 맞냐고 확인질 할 때는 언제고. 그냥 확 돌아가 버릴까 보다.”

대화에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하품만 쩍쩍 해대던 검성이 불쑥 끼어들어왔지만 화내는 이는 누구 하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얼굴이었고, 검성의 분노를 사고 싶어 하는 이는 없으니까.

 상황에서 웨인은 딱히 할 말이 없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추는  현에게 돌아왔다. ‘괴수 쳐 먹기도 바쁜데  놀릴 일은 더럽게 많군.’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웨펀 마스터께서는...”
“부디 웨인이라고 불러주시길.”

단순한 권유를 넘어선 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웨인의 말에 류 현은 잠깐 어리둥절해 했지만, 요구대로 하기로 했다.

“웨인 씨께서는 제 목적을 듣고 어쩌실 요량이신지요. 그리고 순서가 바뀐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 만족할  있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겠지요. 순서가 바뀐 거냐고 하신 건...예, 맞습니다. 이미 검성님을 통해서 류 현님의 의도를 대충 예상하고 이렇게 초청한 것이지요. 실례된다는  알지만, 본인의 입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무슨 말을 먼저 들어놓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그렇게 기대 받을만한 인간은 못됩니다.”

류 현은 의도적으로 말을 끊고 웨인의 표정을 살폈다. 웨인은 최대한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류 현은 그 뒤에 있는 조바심을 읽을 수 있었다.

“저는  높은 곳으로 가길 원합니다. 현재는 퍼플, 협회에서 내놓은 가설대로 퍼플보다 더 높은 수준의 던전이 있다면 그곳이 제 목표점이 되겠지요. 좀  단순하게 말하자면 강해질 수 있다면 던전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리고 협회의 목적이 말씀하신대로 라면.”


류 현은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웨인 또한 그를 따라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은 요즘 들어 자신이 너무 헤플 정도로  웃고 다니는  같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으며 웨인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이대로  년 구르면 안면근육이 이렇게 굳어버릴 지도 모르겠군.’

“오늘 이 만남은 제 인생일대의 행운으로 기억될 것 같군요.”

웨인 크로이츠는 내밀어진 그의 오른 손을 단단히 마주 쥐며 대답했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


이마를 스치는 밤바람이 서늘하니 기분이 좋았다. 류 현은 바람에 몸을 내맡기듯 난간에 걸치고 있는 몸을 좀 더 뒤로 젖혔다. 몸이 반쯤 난간 밖으로 넘어간 상태라, 조금만 더 몸을 기울이면 그대로 베란다 밖으로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우려의 목소리 같은 건 없었다. 그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2층 난간에서 떨어진다고 한 들 멍자국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질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와인 셀러에서 잡히는 대로 와인  병과 잡다한 술들을 들고 나온 검성이  채로 나발을 불고 있었다. 검성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류 현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들고 있던 다른 병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됐습니다. 어차피 그거 마시고 취하지도 않으면서 들고 나오기는 왜 그렇게 많이 들고 나왔습니까?”
“응? 맛있잖아.”
“맛을 알고 그렇게 마시는 겁니까?”
“맛도 없으면 왜 마시겠어?”

술마다 마시는 방법이 있다고 강론할 정도로 관련 지식이나 애착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현은 따지는 걸 그만뒀다. 그는 한동안 서늘한 바람을 즐기다가, 검성이  병째 병을 따기 시작했을 때 불쑥 물었다.

“오늘 X 던전에 대해서 말하실  알았습니다.”
“응?”
“X 던전 말입니다.”

검성은 갑작스러운 류 현의 말에 잠시 이해를 못했는지 고개를 기울인 채로 잠깐 굳어져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 그거? 그걸 왜 오늘 말해? 혹시 말하고 싶었어?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제가 그걸  말하겠습니까. 발견하신 것도 검성...”
“승하.”
“예?”
“내 이름 알고 있잖아? 내 입으로 말하긴 좀 쪽팔리지만  뉴스 꽤 제법 타는 편으로 아는 데.”
“예, 뭐 그렇죠...”
“웨펀 마스터도 이름으로 불러주는 데 나만 검성, 검성 거리는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한 건지 전혀 이해가  갔지만 류 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검성을 이름으로 부른다고 그의 통장잔고가 깎이는 것도 아니고, 마력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과거의 기억 때문에, 상대를 이름으로 편하게 부를 수 없었고, 이름을 부른 상대를 죽여야 했던 상황 때문에 붙은 버릇에 불과했다.

“그건 승하 씨가 발견한 거잖습니까. 제가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만한  아니죠.”
“그래? 난 알려준 시점에서 어떻게 하든,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파는 것만 아니면?”

듣는 이가 상쾌함을 느낄 만큼 시원하게 단언하는 그녀의 태도에  현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런 말 듣고 나서 제가 어디 대형 길드에 X던전 위치를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그것만 해도 큰돈이 되는데요.”
“응? 지금까지 안 그랬잖아? 이렇게 묻는 거 보면 그럴 생각도 없고.”
“그거야 그렇지만 말입니다...”
‘어떻게   이 여자랑 말하고 있으면 자꾸 말려 들어가네.’

류 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검성, 나승하를 바라봤다. 편한 박스티와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그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현이 느끼는 건 아름다움 보다는 불가해함 이었지만.

“X 던전, 관심 없어지신 겁니까?”
“그럴 리가. 들어가 보고 싶지.   있으면 내가 최초이면 좋고. 그런데 곤란하잖아?”
“...누가 말입니까?”
“네 팀원들. 아직 그린 던전까지 밖에 경험 없지 않아? 뭐 나도 아직 준비가  되기도 했지만, 나만 준비 됐다고 가자고 우길 수도 없고. 나만 무리해서 될 일이면 모르겠는데 또 그것도 아니고.”


검성의 대답에 류 현은 움찔하며 창문 안쪽의 방안을 쳐다보았다. 그런다고 방안에 들어가서 곤히 자고 있을 그녀들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그녀들이 자고 있을 방 쪽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나승하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으래? 동료끼리 당연한 거 아냐?”


와인병을 입에 물고 있어서 발음이 새었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류 현은 음료수 병을 빨고 있는 아이 같은 그 모습이 피식 웃었다. 그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맛있게 마시는 걸 보니까 저도 당기네요. 하나 주시죠.”
“응, 응. 자, 여기.”


검성이  뒤에 두고 있던 보드카를 잽싸게 내밀었다. 당연히 술잔 같은 건 있지도 않았기에 그도  채로 나발을 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몇 모금을 목으로 넘긴 뒤에 물었다.


“내일 웨펀 마스터를 만나서 던전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던전? 그린?”
“아뇨, 그린은 한국에서도 실컷 들어갈 수 있으니 블루 이상 급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그게 좋긴 하겠네. 쟤들이랑 같이 들어가게?”

승하가 고개를 뒤로 까딱이면서 창문 안쪽을 가리켰다.  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들은 준비가 더 필요했다.


“아뇨. 두고 들어갈 겁니다. 적당히 핑계거리 만들어서 뉴요커 기분이라도 내게 관광이라도 시켜야겠죠.”
“이럼 나중에 경험 부족으로 곤란해지는 거 아냐?”

높은 등급이 될수록 던전 내에 등장하는 괴수들은 지구의 동물과 궤를 달리 하기 시작한다. 그린은 그 한계점이고 블루부터는 환수(幻獸) 타입에 한발 걸친 괴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투력이 확 차이 나는 건 아니지만, 등장하는 괴수들이 그래봐야 보통 동물의 강화판이었던 이전 던전과 동일시했다가는 큰 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림자 두꺼비 같은 예외도 있지만, 블루급을 도는 베테랑도 잘 모를 정도로 희귀한 괴수를 상대로 전법 연습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 환수 타입 중에서 약한 편인 그림자 두꺼비조차 응달을 헤엄치고 다니는 해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판이다. 거기에 위로 갈수록 생물로서의 특징도 희미해져서 머리가 날아가도 핵이 무사하면 재생하는 경우부터, 핵은 손가락 한마디 보다 작은데 다 큰 갑옷 멧돼지가 새끼처럼 보일 정도로 커다란 환영을 만들고 그 환영이 물리력까지 가진 황당한 경우까지.


이런 상황이니, 한 번이라도 환수 타입을 제대로 상대해 본 자와 해보지 않은 자의 차이는 천지 차이  것이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생각에는 그녀들이 환수 타입을 저보다 더 잘 잡을 거 같습니다.”
“응? 어째서?”
“저랑은 재능이 다르거든요.”

화련과 희란이 들었다면 누구 놀리냐고 거품 물고 따졌을 말이었지만 승하는 고개만 갸웃하고 말 뿐이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다.

‘둘 다,  죽어가는 몸으로 아지다하카를 땅에 내릴 정도였으니까.’

이제는 그 외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현은 화련과 희란의 재능이 어느정도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이미 한 번 봤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들의 한계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그래서 그는 환수 타입에 대한 적응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좀 더 다듬은 뒤에 자신이 서포트 해주는 방식으로 몇 번만 경험시켜주면 그녀들은 금방 따라붙을 것이다.


‘화련이 환수타입한테 상성도 좋으니까.’


그런 그의 생각을  리 없는 검성은 그런가 보다 하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처음 봤을 때, 그 때 빚진 걸로 해두겠다고 하셨던 거 지금 쓰겠습니다.”
“헤?”
“일주일 동안 같이 던전  갑시다.”


이걸 위해서  현은 굳이 꼭 볼 필요 없는 협회장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웨인이 요청한  일주일 이라는 시간이었고, 류 현은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협회장을 만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다는 명목이라면, 그녀들은 불편한 웨인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보다는 관광객 기분을 내는 쪽을 택할 테니까.

사실 웨인이 그건 곤란하다고 대답했다면 이곳에 머물만한 다른 핑계거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희란과 화련, 그녀들을 밖으로 내보낼 핑계는 더 찾기 곤란했을 것이고. 지금은 그녀들을 블루 던전에 데리고 들어가기는 곤란했다.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버릴 수도 없었다. 그는 늦어도 내일 모레,  날부터 최대한 블루 던전을 먹어치울 생각이었다. 검성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아무리 그라고는 해도 빡빡하게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들 몰래 던전행을 하기 위해서는 빠른 클리어가 생명이니까.


검성은 그런 류 현의 생각은 전혀 모르고 날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두 손을 붙잡고 무척 기뻐했다.


“응, 응. 가줄게. 가줄게. 이번 걸로 더 빚 달아놔도 된다고?”


정상적인 성인 남성이라면 간이라도 빼주고 싶어질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였지만, 류 현에게는 던전에 대한 무한한 광기의 편린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는 어색하게 마주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사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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