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검성을 상대한 그 모종의 단체 대표자가 웨펀 마스터라는 걸 알았을 때. 일이 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류 현는 웨펀 마스터, 웨인 크로이츠를 알고 있었으니까.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류 현이 두각을 드러냈을 무렵에 3차 ‘대소환’이 발발했고, 그 난리 통 초기에 웨펀 마스터는 죽었으니까.
퍼플 이하의 던전들이 괴수들이 쏟아내는 난리 중에 혼자서 런던 교를 틀어막고 시민들을 대피시킨 그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당시 런던에 자리 잡고 있던 대형 길드들이 런던에 있는 본부를 내버린 것에 비하면 그야 말로 영웅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 때문에 류 현의 뇌리에 웨펀 마스터는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목표를 이야기한 적 없는 조용한 그 남자는,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버릴 수 있는 자였다.
‘협회 전체의 의향이 아니더라도, 웨인 크로이츠를 대표자로 세울 정도면 이문에 미친놈들은 아니야.’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가 원하는 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동료 같은 뒷배가 아니라, 그냥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막아주고 그가 클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는 스폰서였으니까.
지금은 서해란과 그 뒤에 있는 태양그룹이 스폰서도 아니고 동료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그를 도와주곤 있지만, 그런 애매한 위치에서 주는 도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몇 달째 별 말없이 보급품만 제공하고 있는 해란의 침묵이 이를 증명했다.
‘터주’의 문민호도 어찌 보면 이와 비슷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가 제공할 수 있는 편의는 한계가 너무 명백했다. 그가 국가가관에 속해 있기에 줄 수 있는 편의는 류 현에게 있어서 이미 별 의미 없는 수준이 되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류 현은 이제, 그가 커버해 줄 수 있는 그린 던전 보다 상위 던전을 노려야 할 수준에 도달했다.
‘천년만년 와이번이나 갑옷 멧돼지 같은 것만 쳐 먹을 수는 없어. 그것들을 보기만 해도 이젠 토가 쏠린다고.’
더 이상은 그것들을 먹고 싶지 않은 걸 넘어서 먹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류 현은 웨인이 손수 내온 커피를 받아들며 물었다.
“여긴 안전가옥 같은 겁니까?”
그의 물음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웨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방에 대해서 끊임없이 툴툴거리던 화련이었다. ‘마스터도 이 방 맘에 안 들었으면서 그렇게 면박 준거에요?’ 그녀가 눈빛으로 묻자 류 현은 슬그머니 눈을 돌려 무시했다.
웨인은 희란까지 가져다 준 후에 자리에 앉았다. 희란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는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하고는, 류 현의 질문에 대꾸했다.
“아직 딱히 용도를 정해 놓은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내부가 이렇게 휑하지요. 죄송합니다. 이전에 확보해뒀던 장소들에 문제가 생겨서 이런 곳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비, 바람 막아주고 이야기가 새어나갈 우려만 없으면 된 거지요.”
류 현은 마지막 마디를 내뱉으면서 슬쩍 화련에게 눈을 흘겼다.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화련이 찔끔하며 물러앉았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감사하군요.”
후광이 비칠 것 같은 웨인의 미소였지만 여성진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검성은 대놓고 하품까지 할 정도였다. 류 현은 괜스레 자기 얼굴이 벌게 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웨인은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눈치를 가진 이였다.
“비행 때문에 많이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간단하게 하고 끝내도록 하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도 말주변이 그렇게 있는 편이 아니라서 이렇게 핑계거리가 있으니 감사하게 사용할 따름이지요. 류 현님,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 말씀하시죠.”
류 현은 그렇게 말하며 발로 테이블에 엎드려있는 검성의 발을 툭 건드렸다. 검성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자 웨인이 말했다.
“대소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할 말은 무수히 많았지만 류 현은 일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초장부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지간히 몸이 달아있나 보군.’
웨인은 말을 고르는지 조금 지체한 후에 말을 이었다.
“‘대소환’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소환’이 던전의 출현을 통한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를 테면 번역가들이나 통역가들이 실직자가 된 것 말입니까?”
류 현의 농담에 웨인은 씨익 웃었다. 2차 ‘대소환’ 직후,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국가 수뇌부 이외의 일반인들이 던전과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게 된 것과, 언어의 장벽이 사라진 것을 꼽을 것이다. 그 때문에 번역가들과 통역가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래서 ‘대소환’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다름 아닌 번역가, 통역가들 이라는 말은 유명한 농담거리가 되었다.
“예, 그것도 포함해야겠지요. 하지만 전 통역가나 번역가가 아니니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대소환’은 인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개소리!”
우당탕 의자가 바닥에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류 현이 고개를 돌려 바라봤을 때 화련은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웨인에게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그녀의 오른 손을 잡고 당기고 있는 희란의 존재 때문에 당장 그러진 못하고 있었지만.
“화련 씨, 진정하십시오.”
“저런 개소리 듣고 진정하게 생겼어요! 마스터도...”
화를 억누르는 게 힘겨운지 류 현을 돌아보는 화련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살짝 괴여있었다. 그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화련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류 현으로서는 뭐라고 책망하기 힘들었다.
그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대소환’으로 이모를 제외한 가족들을 모두 잃었고, 괴수와 관계되어 남은 이모 또한 투병 중이었으니까. 괴수에 대해서 거의 발작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는 분명 ‘대소환’으로 인한 수 없이 많은 피해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수 없이 많다고 해서 개인의 상처가 없어지거나 무마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이의 면전에 대고 훈련이니 어쩌니 해대는 데 어찌 화를 내지 않을까. 류 현이 어떻게 상황을 무마할까 고민하며 웨인을 돌아보았다. 예상 밖으로 웨인은 표정을 구기지도, 그렇다고 무표정을 가장하지도 않은 채 측은한 눈으로 화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류 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웨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불쾌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유족 분들을 놀리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니 노여움을 푸시길.”
불편한 침묵이 좌중을 짓눌렀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을 내뱉지는 못했다. 내내 하품만 쩍쩍 해대던 검성마저 둘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화련은 허리를 숙인 웨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됐어요.”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면서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류 현에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마스터. 도움은커녕 훼방만 놨네요.”
류 현은 뭐라 말할지 고민하다가 곧 잘하지도 못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저랑 같이 있을 때는 제가 수습하면 되니까요.”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괴상한 위로였지만 화련은 키득거리면서 조용히 웃었다. “뭐에요. 그게. 멋없어.” 그녀는 그대로 희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명백히 대화에 끼지 않겠다는 제스처였다. 그리되자 희란도 대화에 끼기 좀 애매한 위치가 되었다.
몸을 일으키는 웨인을 바라보며 류 현은 어떻게 이 자리를 매끄럽게 파하고 내일 만나자고 할까 고민했지만, 웨인이 내뱉은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제 실언 때문에 지체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드리도록 하죠.”
류 현은 다시금 웨펀 마스터에 대한 평가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민망해서라도 자리를 파하고 다시 약속을 잡을 텐데, 그런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예, 모쪼록.”
“그렇게 생각하면 꽤나 많은 것들이 맞아들어 갑니다. 던전과 연관 없어 보이는 언어장벽의 붕괴나 이상하리만치 예상대로 돌아가는 던전의 단계적인 개방. 플레이어들의 각성 이후 전투능력 습득 속도 등. ‘대소환’은 재앙이지만 우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천천히 강도를 높여왔지요. 개인적으로 던전 출입 시 발생하는 마력손실과 피로도도 그것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동의하는 이론이었지만 류 현은 되물었다. 각성한 지 반년도 안된 루키에게는 그게 어울렸으니까.
“다른 건 둘째 치고 마력 손실이나 피로감은 마이너스 요인 아닙니까?”
“마력 손실이나 피로도가 없었으면 어찌 됐겠습니까. 아마도 플레이어 대다수들이 절제 없이 던전을 들락거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마력 손실이나 피로도가 없더라도 체력과 집중력 손실은 생기죠. 아무리 대단한 사냥꾼이더라도 둘 중하나만 떨어져도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막 돈맛을 보기 시작한 초짜 플레이어들은 아무리 체력이 넘쳐도 던전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던전 출입시 발생하는 피로도와 마력 손실에 짜증을 내곤 한다. 하지만 경지가 정체되지 않고 위로 향하면서 던전 사냥에 익숙해질수록 그런 불만은 사그라지게 된다. 던전 사냥 중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피로도에 대한 생각은 잊게 된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웨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별종이었지. 달리 생각하면 그런 별종들은 오지도 않은 상황을 과도하게 준비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 시기에 여기까지 생각한 인간들이 있었군. 그런데 이 정도 생각했으면 대비도 해놨을 텐데. 이 인간들 대체 왜 안 보였던 거야? 진짜 3차 ‘대소환’ 때 휘말려서 다 죽었나?’
류 현의 고심하는 표정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웨인은 자신 있게 계속했다. 류 현은 이미 이런 말을 늘어놓는 진의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플레이어들의 각성도 좀 이상합니다. 생전 마나라고는 접해 본 적 없는 이들이 한 순간에 마나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몸이 된다? 그걸로 모자라서 평생 전투라고는 영화로만 접해본 일반인들이, 칼로 철을 써는 검술이나 바위를 띄우는 염동력을 쓸 수 있게 된다? 너무 인간 편의에 치우친 상황이죠.”
웨인은 아직도 한참 늘어놓을 예시가 더 있는지 말을 이으려고 했다. 더 들어봐야 결론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기에 류 현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만...그런데 말입니다.”
“예, 말씀하시죠.”
“이 자리에서 ‘대소환’의 진의에 대해서 논하시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요. 말씀하신 바는 대강 이해했습니다. ‘대소환’이 인류를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속하신 조직도 뜻이 비슷하다 이런 것 아닙니까.”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이거 제가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 준비해 온 것 같군요.”
웨인은 다시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얹었다. 그리곤 방금 전까지 미소 짓고 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협회에서는 ‘대소환’이 퍼플 던전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추측의 근거로 쓸 만한 증거도 몇 가지 확보해놓은 상태죠.”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협회 측에서는 이후의 ‘대소환’을 준비할 인재를 모으고 있으며, 최우선 영입 대상에 검성님과 류 현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류 현이 무슨 표정으로 대답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웨인이 재빨리 나머지 말을 마쳤다.
“류 현님. 류 현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계속해서 던전에 들어가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