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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화 〉탐식마(貪食魔) (43/429)



〈 43화 〉탐식마(貪食魔)

“우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치태에 저도 모르게 감탄한 화련은 옆자리를 향해서 손을 뻗어 잡힌 옷깃을 잡아당겼다.

“마스터  여자, 아니 검성이...”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화련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류 현이 퍼스트 클래스의 안락함에 흠뻑 취한 채 잠들어 있었다. 의자를 뒤로 눕히지도 않고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화련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쩐지 자꾸 멍 때리더라니. 대체 일주일 동안  하고 다닌 거야?’


엊그제, 닷새 만에 만난 류 현은 어딘가 피곤해 보였고, 그 때문에 멍해보였다.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멍 때려서 말을 걸면 화들짝 놀라고, 커피물을 컵에 넘치도록 붓는 등 어딘가  빠져 보이는 행동을 연발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본인은 빙긋 웃고 말 뿐이고, 어제 희란을 따라서 세아를 만나봤을 때 그녀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걸 보고 잠깐 피곤해 하는 것이겠거니 했더니, 웨펀 마스터를 만나러 가는 당일까지 이런 상태다.


‘보나마나 공방 건 말고도 이거저거 하고 다녔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린 던전을 혼자 씹어 먹고, 그녀들이 소파에 뻗어있는 동안 멀쩡하게 혼자 남아서 던전 사냥 신고서나 세금계산 서류 정리까지 하던 그가 이렇게 중요한 날에 이렇게 뻗어버릴 리가 없었다. 화련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찌푸린 미간을 검지로 쓱쓱 밀어 펴며 생각했다.


‘보스가 뻗어 버릴  같아서 일 나눠달라고 하게 되는 날이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그가 깰까 싶어 조용히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튜어디스에게서 보드카 한 병을 받아내서 선 자리에서 해치워버리고는, 다시 한  더 요구하고 있는 검성을 뜯어말리기 위해서였다.

‘전속 공방이고 뭐고 우리 팀은 보모역할만 따로 해줄 인간이 하나 필요해. 그것도 엄청 센 인간으로.’

진심이 반 정도는 섞인 푸념이었다.


***
어찌나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지 남자의 어금니 주변에는 힘줄이 약간 불거져 나와 있었다. 남자를 높은 자리로 이끌어  자제력 덕택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모든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속으로 열 까지 헤아린 후 최대한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내가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고 보십니까. ‘예거즈’ 마스터.”


남자, 노태웅은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애꾸눈의 여자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바라보면 그녀가 질색하는 안대를 아주 대놓고 노려봤다. 이 방에 자리한 그 누구도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그만은 그럴  있었다. 그는 ‘산군’의 2대 길드 마스터였으니까.

여자 또한 노태웅에게는 별 호의는 없었기에 마주 노려보는 것으로 응했다. 그녀는 노태웅이 질색하는 신체적 약점을 알지 못했기에, 그녀는 아주 대놓고 적의를 내뿜었다. 그녀의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길드 대표들이 기침을 해댈 정도로 아주 노골적으로.

“글쎄요, 제가 ‘산군’소속 길드원의 처분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의향도 없습니다. 하지만 노태웅 씨의 행동은 방관이나 다름없다는 건 분명히 말할 수 있겠군요.”


자신이 마스터라는 호칭을 써줬음에도 이름으로 부르는 상대의 태도에 그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분은 그의 역린이었으니까.


“방관? 내가 방관했다? ‘예거즈’에서는 당일 소식을 알려도 방관이라고 하나 봅니다?”
“실제로 알리기만 하셨을 뿐, 서해란에 대한 아무런 제재도 없지 않았습니까? 이 모음에 참석까지 한 인물이, 반대 의사까지 대놓고 표했는데. 아무런 제약도 없이 평소처럼 행동하게 내버려   방치지, 뭐가 방치죠?”
“아니, 서해란이 그냥 일반 길드원입니까? 그녀가 오너가의 일원인  뻔히 아시는 분이 대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제가 길드 차원에서 그녀를 제재라도 했어야 했단 말입니까?”

노태웅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보통 길드원이 아니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그게 몇 달전, 서해란을 이 모임에 참석시켰던 이유이기도 했다. 대그룹의 오너가의 지지를 받아내려고 자리에 참석시키는 걸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 판국이었으니까.


서해란은 모임 참석 이후  말없이 두세 달 정도 침묵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산군’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맡겠다고 나섰던 류 현의 감시보고는 당연히 내팽개친지 오래였다. 굳이 ‘산군’의 길드마스터 입을 통해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더 건드리기 힘들었다. 아직 그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건드리기에는 그녀의 배경이 너무 거대했다. 혹은 이미 그런 행동을 했더라도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들의 행동을 좋지 않게 보기만 하는 방관자를 적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애꾸눈 여자 또한 동의하는지 더 파고들진 않았다. 그렇다고 추궁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는 건 더 말이 안 되지요. 말씀하신 대로 그녀는 보통 길드원이 아니니까요. 그녀가 가족들에게 이상한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고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아니, 그럼 날 더러  어떡하라는 거요. 가족들에게 좋게 이야기하라고 협박이라도 할까? 태양그룹 회장의 딸을?”
“그렇다는 게 아니라...”

늙은 남자와 애꾸눈 여자의 실랑이는 계속 되었다. 방안에 자리하고 있는 노태웅과 비슷한 연배의 남녀들은 둘의 대화에 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눈알만 데룩데룩 굴려가며 둘의 대화를 쫓을 뿐이었다.


답이 없는 실랑이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기에, 결국 둘은 결론 아닌 결론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 된 실랑이에 늙은 남자는 얼굴을 붉힐 정도로 자제심을 잃고 있어서, 결론을 통보하는  애꾸눈 여자의 몫이었다.


애꾸눈 여자는 자신이 앉아있는 테이블의 반대편 끝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를 향해서 말했다.

“해서, 그  현이란 친구를 한 번 봐야겠습니다. 무슨 마법을 부려서 그녀를 꼬여냈는지 몰라도 던전 안에서는 쉽게 수작질 부리진 못하겠죠. 귀하의 눈에  정도의 인재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경우, 그 자리에서 영입 테스트로 변경  수도 있겠죠. 안 그렇습니까? 문민호 씨.”
“...글쎄요, 어떨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류 현과 만날 때와는 달리 까만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는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웃음의 뒷면에 숨겨진 생각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영입 테스트가 아니라, 당신네들 길드 기량 시험무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

***


화련은 테이블에 뺨을 댄 채로 다시 주변을 살폈다. 조그마한 그녀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모습은 꽤나 정신없이 보였지만 누구도 타박하진 않았다. 별로 살펴볼 만한 것도 없었기에 그녀는 금세 눈을 감고  번째 반복하는 푸념을 내뱉었다.


“이게 뭐야...”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앉아있던 류 현은 한 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화련은 그 시선을 확인하자마자 귀를 틀어막고 질색했다.

“아, 마스터 하지 마요. 우리 뉴요커 기분 내려고  거 아니라는  하지 마요.”
“알면서 대체 왜 그러십니까.”


‘공항에서는 잘만 챙겨주시던 분이.’  현은 뒷말을 삼켰다. 잠의 세계를 헤매느라 짐도 제대로 못 찾고 어버버 거린 일을 자기 입으로 언급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련이 그 일로 놀리거나 불평하지 않는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죠. 이게 뭐야 대체.”


화련은 그 작은 몸집을 최대한 양옆으로 내뻗으며 방안을 가리켰다.

회색벽지와 커다란 냉장고, 에어컨, 커피포트, 토스터기, 휴대폰 충전기 외에도 잡다한 가재도구가 비치되어 있는 방은 정말 끔찍하리만큼 넓었다.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음에도  찬의 응접실이 생각날 정도로 사람냄새라고는 요만큼도 나지 않았다.


이미 지겹도록 둘러본 방이었지만  현은 화련이 바라는 것 같았기에 대충 둘러보는 척을 했다. 그리고 둘러보기 전에도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우리 놀러온 거 아닙니다.”
“아, 진짜. 누가 그렇데요? 누가 봐도 이거 벽 허물고 리모델링하다가 만 거잖아요!”


류 현이 보기에도 그랬다. 네 사람이 앉거나 누워있는 방은 너무 넓었다. 집 한 채를 통째로 뜯어고치다가 말았다고 하는 게 그럴싸하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그가 보기에도 대기실이나 응접실로 쓰기에는  꽝이었다. 하지만 류 현이 내뱉은 말은  반대였다.


“좁은 것 보다는 낫지요.”
“...말을 말죠. 말을 말아. 희-란아.”


류 현에 대답에 질려버린 것인지 화련은 몸을 일으켜서 흐느적거리며 뒤 편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네 개의 침대에는 희란과 검성이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행 내내 술을 마셔대던 검성은 자고 있었고, 희란은 조용히 책을 읽는 중이었다. 화련은 그런 희란의 등에 매달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때였다.

똑똑, 하는 소리에  현이 대꾸를 하자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검은 정장차림의 훤칠한 금발 미남이 서있었다. 그 남자는 방안을 한 번 슥 돌아보고는 빙긋 미소 짓더니,   쪽으로 곧장 걸어 들어왔다. 화련이 남자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입을 뻐끔거렸지만 남자의 발걸음이 더 빨랐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춰선 남자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사인은 몇 장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현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재빨리 대꾸했다.

“글쎄요, 그건 이야기를 해봐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류 현의 대꾸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리 내어 웃고는 오른손을 쓱 내밀었다.


“웨인 크로이츠입니다.  현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각성 한지 아직 반년도  된 루키한테 그러시면 다른 사람들이 웃습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웨펀 마스터.”

 현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악수했다.

‘이번 생은 죽은 유명 인사들은 다 만나볼 거 같네.’

조금 실례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미소 짓는 얼굴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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