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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탐식마(貪食魔) (40/429)



〈 40화 〉탐식마(貪食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같은 조용한 사무실.  남녀는 서로를 빤히 바라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여자 쪽이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고 남자를 집요하게 노려보고, 남자는 시선을 이리저리 회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해 남자의 맞은 편에 같이 앉아있던 다른 여자가 남자를 노려보던 여자를 바로 앉혔다.


 현을 노려보는 걸 제지당한 화련은 바닥을 꽤 오랫동안 노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마스터.”
“예.”
“마스터 사실 미래에서 온 사람이죠?”
“...예?”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찔끔해서 되물었다. 방금 전에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그는 신중을 기해서가 아니라 그냥 말문이 막혀, 화련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류 현의 긴장을 비웃듯이 화련의 표정이 갑자기 무너졌다.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앉아있던 희란의 어깨에 뺨을 묻으면서 웅얼거렸다. 그것도 무슨 기술이 있는 것인지 화련의 말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요. 그럼 마스터가 뭔가 확신이 있어서 이 일 저 일 벌이고 다니는 게 될 테니까. 어떻게 발 담근 곳 마다 그렇게 뭐가 뻥뻥 터져요? 그치 희란아? 무슨 지뢰 찾기 하는 것도 아니고.”


희란은 어색하게 웃을 뿐 별 다른 말이 없었다. 화련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어깨에 뺨을 몇   비비적거리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류 현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화련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어제 마스터가 검성 그 여자 뒤를 봐주는 수상한 아저씨들이랑 연락했다는 거죠?”
“수상한  빼셔도 되는데...예, 그렇습니다.”
“왜요?”
“무슨 말씀이신지...”
“제 말은 왜 굳이 조용히 있는 그 수상한 아저씨들을 찔렀나, 이거에요. 그 아저씨들 우리가 검성이랑 파티를 하든, 뭘 하든 여태껏 아무 반응도 없었잖아요? 아, 따지는 건 아니니까 오해마세요. 그냥 호기심 차원에서 물어보는 거니까요.”
“맞아요. 마, 마스터답지 않아요. 평소 같으면 먼저 물어보셨을 텐데...”


드물게 희란이 끼어들어 말을 보태었다. 류 현이 조금 놀란 눈으로 화련을 돌아보자 그녀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사전에 입을 맞춰놓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부추김도 없는데 희란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류 현은 좀 더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다.

“여러분과 상의하기 전에 먼저 접촉부터 하고 본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아서요. 아니, 정확히는 제 상황이라고 해야겠군요.”
“상황이 녹록치가 않다니 무슨 소리에요? 마스터 진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당장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많이 뜬금없지만...검성을 노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잠시간 정적이 사무실에 내리 깔렸다.  현은 조심스럽게 청중의 반응을 살폈고, 어리둥절함과 경악을 볼 수 있었다. 사태파악이 안  희란이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화련을 옷깃을 슬며시 당겼지만 화련은 대꾸가 없었다.


희란이 조바심을 느끼고 뭐라고 하려는 그 때 석상처럼 굳어있던 화련이 말했다.


“마스터, 지금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예, 아닙니다.”
“세상에...그럼 그 여자가 ‘예거즈’를 나온 게...?”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세상에...미친...세상에...”

화련은 그 뒤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다가 가까스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물었다. 화련의 태도가 워낙 진중했기에 대화에 끼기는커녕 이해조차 못하고 있는 희란도 물을 엄두를 못낼 정도였다.


“그럼 마스터는 알고서 검성을 만나신 거에요?”
“아닙니다, 그 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죠. 애초에 그냥 지나가던 길에 마주 친 거라서 알았더라도  의미는 없었겠지만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읊어대었지만 별로 찔리진 않았다. 검성과 만나던 그 시점에서는 그런 해괴한 모임이 벌써 만들어져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화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걸 보며 조금 미안함 마음은 들었지만.

“그럼 마스터는 대체 어떻게 하실...”
“화련 씨, 잠깐만요. 처음부터 천천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희란 씨가 자꾸 소외되는 것도  그렇고, 다 설명 드리려고 자리를 만든 거니까요.”

대화에 끼지도, 그렇다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던 희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모습에 화련이 아차하고는 희란과 똑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렇게 된 겁니다.”

말을 마친 류 현은 밀려드는 탈력감에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평소의 그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질문할 질문자들이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뭐라고 타박할 이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지난  시간여 동안 쏟아낸 이야기는 그녀들이 숙고에 잠길 만 한 이야기들이었다.

각성 직후 서해란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터주’의 팀장 중 하나인 문민호와 만난 일, 던전 솔로 플레이를 반복하던 와중에 검성과 만난 일, 서해란의 경고와 영입제의, X던전을 검성이 보여준 날에 나눴던 대화까지.

물론 어제 검성과 나누었던 대화와 검성의 뒤를 봐주고 있는 조직과의 전화통화 내용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그는 플레이어가 되고나서 겪은  대부분을 토해내어야 했다. 지금 엮인 상황이 그 이야기들을 생략하고서는 그녀들을 이해시키기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서 그녀들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을 보게 된 것이다.

좀 더 높은 단계의 던전에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류 현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인간에게, 같은 사람에게 노려질 수 있다는 거니까. 그것도 자청해서 발을 담근 것이 아니라 어쩌다 생긴 인연 때문에, 그것도 그 인연을 맺고 있는 게 그들의 팀장이기 때문에 생긴 리스크다.

본의 아니게 난제를 던져준 셈이 된 류 현은 느긋하게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녀들이 따지고 들어도 돌려줄 반론이 없기도 했고, 자신에게도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희란이 입을 뗀 건,  현이 앉은 채로 졸기 시작한지 삼십 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희란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귀신같이 알고 류 현은 눈을 떴다.


“저, 전 괜찮다고 생각해요.”
“괜찮으시다고요?”
“네에, 그게...저, 다른 곳에 간다는 생각은 해 본적도 없고...마스터도 대책을 생각해 두셨으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잖아요? 그럼 괜찮다고 생각해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류 현은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희란이 어느 새 화련을 따라서 자신을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고, 그녀가 선택지를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맹목적인 믿음도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직까지 그녀의 이상한 고집이  현과 대치되는 방향으로 발휘되지 않아서 망정이지.

‘어째 뒤로 갈수록 화련 보다는 이쪽이 더 본격적으로 골 때릴 거 같은데. 반대의견 내기 시작하면...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반대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없는 지금 당장은 그 맹목성에 감사하는 수밖에 없지만.

“알겠습니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이야기도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보시길. 그럼...”

류 현이 화련 쪽을 힐끗 쳐다보자 착 가라앉은 표정의 그녀가 그를 마주보았다. 화련 아까 당황하던 모습이 무색하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마스터가 생각하시기에 검성은 마스터와 같은 부류인가요?”


이런 상황에서 보통이라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에 화를 냈겠지만, 과연 화련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발담은 위험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 보다, 옆에 서있는 이가 자신의 동지인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녀의 질문은 그가 듣기에는, 만일 동지라면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 그렇게 말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은 좀 질릴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대답했다.


“예. 각성한 지 반 년차도 안 된 루키가 이런 소리 하는 건 우습겠지만 저도, 그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적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류 현은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화련은 그의 답을 몇 번 곱씹는 듯하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알겠어요. 검성 건은 더 이상 따지고  필요가 없는  같네요. 애초에 세 달도   관계를 지금 와서 엎어봐야 검성을 죽이겠다고 설치는 인간들이 봐줄 것 같지도 않고요.”

반쯤 맹목성에 결정을 내맡긴 희란과 달리 화련은 검성을 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짐작했다. 이성적 판단이고 뭐고 포기한 작자들이다. 권력에, 이문에 미쳐서 사람의 길을 이탈하려고 하는 미치광이들. 이미 발을 빼기에는 늦었다. 이제 와서 발을 뺄 생각도 없었지만.


“검성을 돕고 있는 그 조직은요?”


 현은 화련의 물음에 안도했다. 발을 빼기에 멀리 왔다고 해서 그녀가 꼭 따라오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도 상대 조직의 성향에 대해서 묻는 건 마음은 이미 이쪽으로 기울었다는 소리다. 그 조직과 같이 가는  별개의 이야기고, 그녀가 반대를 할  있겠지만 그녀를 잃는 것 보다는 낫다.


“확언  수 는 없습니다만...”
“다만?”
“조건도 없이 검성을 보호해 주겠다고 나서는 걸로 봐서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검성을 보호해 주겠다고 나설 수도 있고, 검성이 수락할 정도로 큰 단체인데. 아무런 소속도 없는 플레이어 하나 어떻게 못할까요?”
“그런 생각이 있다면 ‘예거즈’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은 게  이상하죠. 아무런 보증도 없이 일단 밑지고 시작하는 장사니까요. 그리고 제가 할 말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일이 끝난 후에 무슨 요구를 받든 간에, ‘예거즈’의 폭거를 아무런 방비 없이 맞이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예거즈’라는 말에 화련이 움찔했다. 그녀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름이 직접 거론되자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친 작자들.’

“그리고 이미지와 위치 때문이라도 그들은 그러지 못할 겁니다.”
“네?”


 현은 목을 한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쌍의 눈동자가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만날지 말지에 대해서 확실한  없어서 검성에게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검성의 뒤를 봐주고 있는  플레이어 협회일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거의 확신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의향을 확인하고 바로 검성에게 확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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