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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 〉탐식마(貪食魔) (38/429)



〈 38화 〉탐식마(貪食魔)

“다시 봤어. 솔플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여자 달래는 재주도 꽤 괜찮던걸?”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 마시죠. 그리고 또 술입니까?”
“응? 하나 줄까?”

검성이 양손에 쥐고 있던 캔 맥주 하나를 들이밀자  현은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술 때문에 낮에 그 사달이 났었는데 바로 입에 댈 정도로 술을 좋아하진 않았다.


온갖 단어들을 주워 삼키면서 변명을 시도했지만, 결국 화련은 토라진 채로 돌아갔다. 류 현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의 발단을 제공했다는 죄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당장 내일 화련을 얼굴 볼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데 어찌 술을 먹을 생각이 들겠는가.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됐습니다.”
“그럼 말고.”


검성은 미련 없이 내민 손을 되돌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호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그 동작에 류 현은 질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제 그렇게 마시고  마실 생각이 듭니까?”
“응? 숙취도 없는 데 무슨 상관이야. 오늘 아침에 혹시 머리 아팠어?”
“그런 아니지만요. 그래도 말입니다...아니, 말을 맙시다.”

검성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캔에 남은 맥주를 전부 들이켰다. 플레이어의 무시무시한 해독능력과 신진대사 덕택에 숙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눈앞의 여자에게는 그런 건 별 의미가 없어보였지만.


커피 땅콩을 입안에 털어 넣는 검성을 말없이 바라보던 류 현이 입을 열었다.

“뒤를 봐주는 곳에서는 연락 없습니까?”
“응?”
“당신이 무사히 ‘예거즈’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줄 그런 곳 말입니다.”
“아- 용케 알았네?”
“용케는 무슨. X던전 보여주실  저한테 그랬잖습니까. 서해란 씨가 뒤가 구린 곳 소속이니까 조심하라고. 혼자서 그런 걸 알아낼 정도로 그런  관심이 많아보이시진 않던데요.”
“응?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좀 더 섬세한 표현을 쓴 거 같은데.”
“제가 듣기로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뒤가 구린 곳이 어떤 곳인지 아셨으니까 그런 소리 하신  아닙니까.”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친목회?”


검성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이었지만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 모임 말입니다.”
“맞아. 누가 안 알려줬으면 아무 것도 모르고 뒤에서 칼 맞았을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야. ‘예거즈’애들 중에서  만한 애들 추려서 습격했으면  칼 정도는 맞고 시작했겠지. 뭐, 그랬어도 반 정도는 같이 데리고 갈  있겠지만.”


반쯤 농담어조였지만 검성의 말에 류 현은 소름이 돋았다. 이전 생에서 검성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덤벼든 대형 길드들과 ‘터주’의 파견 인원을 절반 넘게 길동무로 만들어버렸었다. 그 일 때문에 한국의 플레이어 질이 한 단계 이상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뭐, 그래봤자.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어쨌든  때 눈치 챈 거란 말이야? 흐음, 탐정의 소질도 보이는데.”
“이상한 농담 마시죠. 그 모임을 알기 이전에 없었더라도, 안 후에는 뒷배 정도는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멍청한 인간이 퍼플 던전을 솔플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합니다.”
“흐음?”
“그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격의 문제니까요. 퍼플 던전 솔플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는 많지만 허락 받은 플레이어는 극소수죠.”


류 현의 팀이 그린 던전 이상의 던전에 도전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린까지야 문민호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서류상에서 지워버리거나 빼돌릴 수 있었지만, 블루 이상부터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협회나 국가에서 파악하지 못한 미등록 던전을 제외한 모든 던전을 출입  때는, 신고서를 제출하게 되어있다. 신고만 하면 그걸로 오케이란 거다.

표면적으로는 블루 던전 이상도 신고제지만, 실질적으로는 협회와 국가로부터 온갖 제한을 받게 된다. 플레이어는 귀중한 인력이니까. 블루 던전에 도전할 만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퍼플 던전의 솔로플레이는?


그건 이미 플레이어 개인의 사냥으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 의미마저 갖는 영역의 일이다. 현재 세간에 알려진 최상위 던전은 퍼플 던전이고, 퍼플 던전을 솔로 클리어 할 수 있다는  개인이 던전 사냥의 트렌드를 끌고 갈  있다는 의미다. 국경을 넘어서 플레이어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있는 트렌드 메이커가 될 수 있다는 것.


국가나 협회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트렌드 메이커가 되겠다고 하는 걸 허투루 넘길 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검성이 퍼플 던전 솔로 클리어라는 영예를 안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예외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제재는커녕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솔로플레이를 준비 할 수 있었으니까.

그 당시 퍼플 던전을 솔로 플레이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존재가 그녀 외에는 없기도 했지만, 협회나 한국 정부나 영웅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수월한 절차 통과는 힘들었을 것이다.


검성은 그런 상황에서 퍼플 던전을 혼자 들어가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성공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대업을 이룩한 이들에게 있어서 행운은 보조 도구에 불과하다. 행운이 더 해졌다고 해서 그녀의 업적을 깎아내릴 생각은 그에겐 없었다.

“그보다 빨리, 혹은 좀 더 실력을 길러서 그보다 늦게 도전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협회와 정부가 거부할 수 없는 시점에 도전의사를 밝혔습니다. 바보의 요행도 이 정도로 잘 들어맞으면 단순한 요행이 아니죠.”
“너무 과대평가한다. 그냥 이 쯤 되면 허락해 주겠지. 하고 순전히 감으로 찔러본 건데.”
“멍청하면 감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죠.”
“이미 결론 내놓은 거 같은 말투네. 좋아, 나한테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알려준, 내 뒤를 봐주는 있는 조직이 있다고 쳐. 그래서?”
“아까 말씀 드렸다 시피,  조직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그 쪽도 우리 관계를 대충 알고 있을 텐데, 그 쪽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정도는 알아야 계획을 짤 테니까요.”
“그 쪽에도 미리 말 안했어. 내가 ‘예거즈’를 나올 거라는  알고 있지만. 혜라랑 너한테도 얘기 안 한걸 걔들한테 얘기할 이유가 없잖아? 우리 관계는...뭐 알고 있을 거 같긴 해.”

어째서 자신이 백혜라와 함께 호명되는지 묻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류 현은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쪽이 훨씬 급했으니까.


“X던전에 대한 건? 알렸습니까?”
“응? 그걸 왜 알려? 네 말대로 걔들은 ‘예거즈’에서  일 없이 나오려고 끌어들인 것뿐이야. 걔들도 다른 소리는 안했었고. 서비스 차원에서 나중에 광고할  다른  보다 먼저 알려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말이 없었다고요? 정말 그것뿐이었습니까? ‘예거즈’ 탈퇴를 돕는  전부라고요?”
“응. 없었어. 나도 처음에는 날 스카웃할 속셈으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그런 생각이 있는 인간들이 연락처만 덜렁 넘기는 방식으로 접촉 하는 것도 이상하고.”


검성의 대꾸에 류 현은 숙고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대가도 없이 그냥 뒤를 봐주기로 했다고? ‘예거즈’랑 척  수도 있는데?’

 있는 대형 길드나 플레이어 단체가 그럴 경우에는 대가를 나중에 뜯어낼 자신이 있어서 라고 해석 할  있겠지만, 상대는 검성이다. 일개 플레이어가 소속 길드를 나왔다고 전 세계 전파를 탈 지경인데 그런 작자를 협박하겠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이전 생에서 검성이 살해당하긴 했지만 그건 터주나 대형 길드들의 힘이 좀 더 강해지고 난 후의 일이다. 거기다, 당사자를 죽여서 입을 틀어막고 변명하는 것과 살아있는 상태에서 협박한 후, 뒤탈이 없게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덤으로 ‘예거즈’와 척을 지게 될 가능성도 낮지 않다. 이 쯤 되면 손익계산을 해볼 생각도 들지 않게 된다. 검성의 성향상, 아주 은혜를 무시하진 않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확정사실이 아니다.

완전히 검성의 생존 여부만 따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보일 수 없는 행보다.

‘...적어도 한국에 기반을 둔 놈들은 아니야.’

“그럼 기자 회견 발표 후에 뒤늦게라도 반응이 왔었을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몰라.”
“?”

류 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검성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부재중 전화가 오늘만 50통이 넘게 찍혀있었다. 대부분 ‘예거즈’, ‘부길마’ 라는 이름으로 걸려온 것들이었고, 그 외에 이름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하나 있었다. 검성은 그 번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들인데, 아직 통화  해봐서 몰라. 계속  받으면 누가 올 거 같긴 한데 그건 좀 귀찮고 그래서 전화로 땡 칠 생각인데, 궁금하면 여기서 할까?”
“진심이십니까? 그 쪽에서 알면 별로 안 좋아 할  같은데요.”
“응? 아, 괜찮아. 괜찮아. 걔네도 우리 관계도 대충 알고 있고. 저번에 찾아왔을 때 나한테 다리 좀 놔달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 때는 내가 쫓아냈지만. 그리고 내가 전화통화 남 보는 데서 좀 했다고 뭐라고 하겠어? 하면 또 어쩔 거야. 지들도 네 뒤캤는데.”

완전히 네 사정 따위 내 알바 아니다 식의 발언이었다. 류 현의 관심사는 말의 앞쪽에 편중되어 있었지만.

“저한테 말입니까?”
“응, 걔네 우리 같은 부류한테 꽤 관심이 많거든. 싹수 있어 보이는 애가 있으면 소개 해달라니 어쩌니. 자기들은 정작 던전도 잘 안가면서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너랑 계속 만나니까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신과 류 현이 같은 부류라고 단언하는 그녀였다. 류 현은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녀와 협업관계를 맺은 건 그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던전에 미친놈들한테 관심이 있고, 자기들한테 도움도 안 되는 검성을 보호하겠다고 ‘예거즈’와 척질 각오도 한다?’

검성은 강력한 패다. 던전과 괴수라는 위협에 맞서서 인류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 당연히 살아만 있다면 인류에게 나쁠 것은 없다. 아니 좋다고 해야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그녀가 보인 행보는 인류에게 있어서 무해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현시점에서 최상위 던전인 퍼플 던전은 지금도 간간히 클리어 소식이 나오고 있고, 인류는 던전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거즈’나 ‘터주’같은 곳이 검성을 잡겠다고 설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퍼플 던전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검성은 오버파워 그 자체였으니까. 닭 잡는 칼만 있으면 되는데 소 잡는 칼을 굳이 집안에 두는 이는 없다. 그 칼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더더욱.

그런 상황에서 검성의 성향을 알면서도 보호해야겠다고 스카웃 조건도 아닌, 무상봉사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인다?


그건 단순한 이익집단의 행동방식이 아니다. 지금 앞에 떨어진 돈주머니가 아니라 더  곳을 바라보는, 대의라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만이 보여  수 있는 행동.


그리고  현이 아는  플레이어와 관계된 집단 중에서 그런 기치를 내거는 척을 한 곳은 있어도 실제로 행동한 곳은 단  곳도 없었다. 인류가 멸종이라는 실질적인 위기 앞에 내몰린 3차 대소환 이후에도.


‘변화 때문에 만들어 진건가? 아니면 3차 대소환 전에 망했었나?’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에 대해서 알아둬야만 한다.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팀원들과 검성 이외의 아군이 생길 거라곤 생각지도 않지만,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집단을 그냥 내버려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적이 되더라도 그건 서로 알고 난 이후의 일이다.


“예, 괜찮으시다면 저도 듣고 싶군요. 가능하면 이야기도 좀 나눠보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왜 안 되겠어. 말하면 오히려 좋아라 할 걸?”

검성은 흔쾌히 끄덕이고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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