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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 〉탐식마(貪食魔) (37/429)



〈 37화 〉탐식마(貪食魔)

“마스터! 마스터! 문 열어요! 마스터 친구 없어서 병원, 집, 사무실 아니면 갈 곳 없어서 여기 있는 거 다 알거든요? 마스터!”

대낮부터 상사(마스터)에 대한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문을 두드리던 화련은 이내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가 끈기가 없는 게 아니라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어, 희란아. 거기도 없어? 위층에는 가봤니? 응, 응. 됐어, 훈련장 가지 말고 곧장 이쪽으로 와.”


검성의 ‘예거즈’탈퇴라는 충격적인 기자회견 이후, 화련은  현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그의 연락은 없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배려하느라 연락하지 않는 건가 했던 그녀는 아침이 되자 의문감이 불안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류 현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용잡이 팀은, 특히 류 현은 검성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는 ‘예거즈’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야 정상이다.  현의 평소 일처리 스타일이라면 미리 알고 있으면 있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팀원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연락은 없고, 이쪽이 연락하려고 들어도 연락이 되질 않는다. 용잡이 팀의 정식 일정이 끝났으니 그도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거나, 던전에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거기다, 투병생활 중인 누나 때문에  현은 하루이상 걸리는 던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화련과 희란이 그를 찾아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무실, 병원, 집 있을만한 곳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아직 집을 뒤져본  아니었지만.

“응, 너무 걱정하지 말고. 블루 던전에 혼자 던져놔도 멀쩡하게 나올 사람인데 별 일 있겠니. 응,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은 화련은 류 현의 집 현관문을 노려봤다. 그런다고 문이 열릴 리는 없었기에 화련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포기하기 전에 화풀이 겸 해서 문고리를 아래위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어, 이거 뭐야? 왜이래?”

화련은 자신이 문을 부순 건가 싶어 급하게 살폈지만 망가진 흔적은 없었다. 문고리 위의 잠금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허무하게 열려버린 문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해 하던 화련의 뇌리에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검성의 ‘예거즈’탈퇴!’

화련은 곧바로 신발을 차 내버리듯 벗어버리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여자의 감이라고 칭하고, 류 현이 과대망상이라고 평한 감에 기댄 행동이었다. 그래서 화련은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를 덮쳐든 술 냄새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화련이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했을 때, 그녀가 느낀 것은 안도감과 분노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기괴한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표출해야하는지 배운 적도 없고, 느껴본 경험도 없었던 화련은 보다 쉬운 쪽부터 표출하기로 했다.


“불이야!”

화련의 외침에 거실탁자에 엎어져 있던 류 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거실바닥에 뒹굴던 술병을 밟고 다시 반쯤 드러눕게 되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류 현은 오른쪽 볼을 거의 재패한 침 자국을 닦을 생각도 않고,   누운 채로 맹렬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화련이 말했다.

“곧 죽을 듯이 마셔도 타 죽기는 싫은가보죠?”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곳에는 화련이 팔짱을  채 평소에는 떨지도 않던 다리까지 떨고 있었다.  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반쯤 드러누워 있을 상황이 아닌  분명했다.


“...화련 씨?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라고 내뱉으려던 류 현은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입을 다물었다. 새벽이 술이 떨어져서 술을 사러 나갔다 오니, 문이  열리지 않자 내려쳐서 억지로 연 기억이 남아있었다.


“문 부순 것도 마스터였나 보네요? 하, 참나.”


화련이 기가 차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고, 류 현은 어깨를 움츠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머리가 잘 돌지 않았지만 여기서 반박 같은 걸 했다간 큰 곤욕을 치를 거라고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류 현이 본능의 충고에 따라서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고 있자, 화련은 잠시간 그의 정수리를 노려보다가 콧김을 훅 내뿜고는 앉을 자리를 살폈다. 몇 마디로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 서서 뭐라고 하기도 곤란했으니까. 그리곤 굳어버렸다.

그녀가 앉을 만한 곳을 살피던 소파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후드티 말고는 전부 홀랑 벗어젖힌 반라의 여자가 소파를 차지한  웅크리고 있었다. 불이야! 소리에 반응하지 않은 것도 놀라왔지만, 화련은 자신이 그 여자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더 없이 놀랐다. 인상적인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 할 필요도 없다. 검성이다.

머릿속에서 여자의 정체가 규명되고 나자 화련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소리쳤다. 그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성량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이건 또 무슨 짓거리야!”

***

“...그렇게  겁니다.”
“......”


사정설명을 빙자한 변명을 끝마친  현은 전에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민하게 화련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류 현이 변명을 덧붙이기 위해서 입을 떼려고 했을 때, 화련은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기자회견 내용을 알고 계셨으면서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거네요? 그것도 사고 친 당사자랑 같이? 단 둘이?”

단 둘이? 부분이 쓸데없이 부각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류 현은 토를 달진 않았다. 둔한 그가 보기에도 화련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 그 자체였다. 아무런 죄도 없는 희란이 옆에서 불안해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말에  열이 받아 가는지 말을 마치자 다시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류 현은 일말을 희망을 품고 자신과 똑같이 꿇어앉아 있는 공범을 돌아봤다. 검성은 예상외로 순순히 꿇어앉았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자고도 잠이 모자라는지, 씨근덕거리고 있는 화련을 앞에 두고도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류 현은 희망 따윈 속임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통감했다.

“진짜 믿을 수가 없네요. 마스터. 마스터 정말 우리 마스터 맞아요? 컨트롤 훈련시키면서 마력 모자라서 죽겠다고 하니까 죽을 정도로 쥐어짜면 마력통 늘어난다고 한 사람 맞냐고요.”

어떻게 봐도 평소의 불만을 토로하는 물음이었지만 류 현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지은 죄가 있는데 어찌 그러겠는가.

 현이 어제 독단에 의한 기자회견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검성과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고, 그 결과 연락이 끊겨서 그녀들이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찾아다니게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취하는 것보다 술을 마셔서  터져 죽는 게 더 빠르다고 말이 나올 정도인 플레이어의 알콜 해독 능력을 생각해보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검성이 사고 쳤다는  인지한 상태에서 그 당사자와 그렇게 마셨다는 건 방관을 넘어서 방만이다. 검성을 끌어들인 건 자신이고, 팀원들은 별 불평 없이 따라주었다.


그리고 그 검성은 어제 대형 사고를 쳤다. 평소의  현 이라면 듣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의 사고를 말이다.

아무리 어제 기분이 별로였다지만, 그래선  됐다. 다 내팽개치고 작정하고 술에 파묻히다 못해 술에 먹혀서는 안 됐다. 그는 용잡이 팀의 수장이었으니까.

 현이 자신의 무책임함을 통감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자, 화련이 투덜거렸다.


“아니 혜라 양도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 갈지 뻔한 여자를 대책 없이 내쫓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여기가 무슨 여관방이야? 아니 애초에 그쪽은 왜 자꾸 성인 남자 집에 찾아오고 그래요?”


혼자서 투덜거리던 화련은 다시 화가 뻗쳤는지 신경질적으로 검성에게 시선을 향했다. 눈가를 비비적거리고 있었던 검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응? 오면 안 돼? 집주인도 괜찮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류 현에게 화살 끝이 돌아왔다. 류 현은 화련의 매서운 시선에 찔끔하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덮어놓고 안 된다고 하기 좀 그렇잖습니까.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내킬 때 마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건 손님이라고 안 하죠. 불청객이지.”

화련은 그리 말하곤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류 현에게 집중했다.  현은 억울함을 느꼈지만 그걸 피력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전처럼 침묵을 지켰다.


“...저기 언니.”
“응? 희란아, 왜?”
“...검성님의 계획을 들어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이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희란의 발언에 한줄기 서광을 본 듯한 착각을 느꼈던 류 현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배반감마저 들었다. 아니 뭘 더 얘기하겠다는 거지? 더 이야기 할 게 있나?

그가 배반감을 느끼거나 말거나, 화련은 희란의 의견에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게 우선이지. 내가 너무 놀라서 판단력이 흐려 졌었나봐.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해요. 마스터?”
“...예에.”
“뭔가 불만이 있으신거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눈만 웃는 화련의 협박 방법에 그는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류 현의 수긍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화련은 검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성은 뭐가 그리 웃긴지 류 현을 보고 실없이 히히 웃고 있었다. 외모보정 덕택에 그림 같은 모습이었지만 화련은 짜증만 느꼈다.


“그래서, 나승하 씨. 대체 뭘 어쩌시려고 기습 기자회견을 하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후 계획은요? 저희정도면 들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응. 얘기해주려고 여기  거인걸.”

검성의 대답에 화련은 다시 류 현에게로 눈을 흘겼다. 류 현은 화련의 시선을 외면하며 검성을 맹렬히 쳐다보았다. ‘당신 어제 그런 소리는 하나도 안했잖아!’ 그의 심정이 어떻든 간에 검성은  할 말만 했다.

“팀을 하나 만들 거야. 혜라랑 나. 일단 확정해 놓은 건 우리 둘. 더 늘릴지는...잘 모르겠어. 아마 안 늘어 날거 같은데. 내 팀에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올 거야?”
“안 들어갑니다. 전 제 팀이 있으니까요.”


검성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류 현은 놀라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검성은 실망한 기색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그렇다는 데. 이런 이상, 확장 계획은 없어. 뭐 사실 이렇게 있어도 ‘예거즈’있을 때랑  차이도 없을 거 같고.”
“그 뒤에는요?”
“X던전을 공략하겠다고 광고할 거야. 음, 용잡이 팀도 공식 명단에 넣는 게 좋겠지?”


검성이 다시금 류 현에게 말끝을 향하자 류 현은 턱을  번 긁적거리다가 대꾸했다.

“광고한 시점에서 이름 숨기긴 그른  같은데요.”
“숨어서 들어갈 수도 있잖아? 던전 입장하는 걸 찍어 보낼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도 민간에는  알릴 거 같은데...네 생각은 어때?”
“알려도 클리어 이후에 알리겠죠. 공략에 참가한 인원들한테 말 좀 맞춰달라고 부탁도 할 거고.”
“그럼 명단에 올려도 문제없네. 그치?”
“문제가 없는  아니겠지만 올리는 쪽이 낫겠죠. 뭘  뜯어내려면 말입니다.”
“좋아, 좋아. 그런 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그렇다는 군요. 화련 씨.”

사전에 입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성과 말을 주고받던 류 현은 화련을 돌아보며 마무리 지었다.


그에 대한 화련의 반응은,

“아주  분이서 죽이 척척 맞으시네요.”

그녀의 외모처럼 토라진 여자아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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