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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탐식마(貪食魔) (36/429)



〈 36화 〉탐식마(貪食魔)

“갑옷 멧돼지 힘 줄 두 마리 분. 와이번 심장 세 개. 맞습니까?”
“...예, 맞군요. 확인 했습니다. 시일에 맞추기 어려우셨을 텐데 용케  구하셨군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예, 뭐. 그러니까 이야기 좀  전해주십쇼.”


전혀 아니었다. 류 현이 잡은  마지막 갑옷 멧돼지뿐이었고, 와이번  마리와 갑옷 멧돼지 한 마리는 화련과 희란이 잡은 것들이었다. 하루에  곳씩 들러서 5일이 걸렸다.

 현의 눈앞에 서있는 가면의 남자가 알면 아마 기절할 정도로 놀라겠지만.

그가  사실을 알려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면의 남자를 대리자로 세운 곳은 류 현 못지않게 비밀이 많은 곳이었고, 거기다 불친절하기까지 했다.


서해란의 주선으로 ‘공방’과 거래를  지 2개월차,  현은 눈앞의 대리자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공방’의 주인은 당연히 만나보지도 못했다. 남자가 속한 ‘공방’의 마스터가 누군지 몰랐다면 거래를 트려고 이렇게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금손’, 이번에는 제대로 뽑아먹어 주마.’

그런 류 현의 속내를 알리가 없는 가면의 대리자는 표정 없는 가면을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마스터가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기대하겠습니다.”


가면의 대리자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류 현의 시야 밖으로 사라져갔다. 딱히 덕담을 나눌 관계도 아니었기에 류 현도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는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사냥도, 거래도 빨리 끝났으니 잘 하면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간만에 세아와 같이 점심을 먹을 생각 때문인지,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현이 왔니?”

침대에 앉은 채 자신 쪽으로 정확하게 돌아보는 세아의 모습에 류 현은 순간 표정을 일그러뜨릴  했다. 그의 표정 변화를 세아는 보지 못하겠지만, 그는 보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 할 수가 없었다. 누구도 아닌 자신의 누나가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는  같았기 때문에.

“응, 일이 빨리 끝나서.”

 현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수납장 위에 포장초밥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류 현이 그러고 있자 세아가 손을 뻗어 류 현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코부터 시작한 더듬기는 이마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코로 내려와서 턱까지 내려갔다. 그녀가 얼굴을 다 더듬고 나자 류 현은 양 팔을 쓱 내밀었다. 세아는 곧바로 그의 팔을 잡고 얼굴에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더듬기가 끝나고 나자 세아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잡고 있는 동생의 양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아.”
“...또  소리하려고. 하지 마, 안 들을 거야.”
“누나가 미안해.”
“......”

 현은 튀어나오려는 불평조차 삼킨 채 자신의 누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제 대략적인 형태만 구분 할 수 있는 눈으로 동생의 손을 살피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런 세아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곧 치료제가 개발 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놈이랑 거래루트를 트고 있으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하면 기한 없이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 내팽개쳐진 그녀에게 위안이 될까?


이전 생에서도 겪은 일이지만, 벌써 세 달이  된 일이었지만, 매번 오늘 처음 겪는 것처럼 낯설고 끔찍했다. 더 끔찍한  미래를 알고 있기에, 지금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아의 반응이 이전 생과 비슷하다는 점 또한 그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녀는 실명증상이 나타난 첫 날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변화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큰 병원의 일 인실에 입원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약간의 거부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금세 그만두었다.

 이후, 그녀는  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 적응해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눈이 보일 때처럼 류 현에게 눈을 맞추었고, 발걸음 대중으로 문이나 물건의 위치도 파악했다. 병원에서 권한 심리 상담과 검사결과도 아주 깨끗했다. 의사들이 의아해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본  현은 위안은커녕 조바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버리면 자신도 그것에 익숙해져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엘릭서가 필요해.’


농담처럼 죽은 사람도 살린다던 그 영약이 필요하다. 세아와 비슷한 증세를 앓던 부자도 회복시켰으니, 완치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상태를 호전시켜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럴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누나를, 세아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조만간 ‘황금손’과 만난다. 그럼 최소한의 길은 열려. 조급해 하지 마.’


그렇게 뇌까려보지만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확증 없는 희망만큼이나 덧없고, 고통스러운 건 없다는  그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녀가 보지 못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밥이나 먹자. 누나도 배고프지? 저번에 맛있다던 그 집 초밥이야.”

웃을 일만 만들어주고 싶은 이의 앞이었으니까.


***


[...이에 검성 나승하 씨는 ‘예거즈’의 길드 마스터를 사임함과 동시에 ‘예거즈’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미 길드 내부적으로는 협의가 끝난 상황이며, 승계 작업 또한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머리나 수염에 드문드문 하얀색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그것들의 주인인 남자는 아직 은퇴를 생각하기에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아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  봐도 건강미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다가 자신의 오른쪽을 향해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씀이죠?”
“서로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빙빙 돌려서 말하는 취미는 없네. 검성의 ‘예거즈’탈퇴. 어떻게 생각하나?”

‘산군’길드의 마스터 노태웅의 물음에 서해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 노태웅의 질문은 빙빙 도는 정도가 아니라 배배 꼬인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자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귀신같이 파고들었다.

[향후 활동방향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검성 나승하 씨가 플레이어 활동자체를 그만두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네요.”
“...자네도 농담이 제법 늘었군.”
“농담이 아니라 반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검성의 의욕상실은 꽤 유명한 이야기 아니었던가요?”
“자네가 그리 말하니 그 여자의 ‘예거즈’ 탈퇴가 더 수상쩍게 느껴지는군.”
“검성 살해 모의 모임에 아무 것도 몰랐던 절 보내놓고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검성은 ‘산군’에게 있어서 벽일세. 넘을 수 없다면 무너뜨려야하는 벽. 어찌 보면 폭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녀가 폭주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저한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협조할 수 있는 범위는 그 남자를 감시하는 것 까지니까요.”
“감시가 아니라 아예 키워주기를 하고 있던 거 같던데, 자네...”


해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에 없이 냉담한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 눈빛에 주눅 들어 아무 말도 못했겠지만, 상대는 ‘산군’의 길드마스터였다. 노태웅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인재욕심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자네는 어디까지나 ‘산군’소속 일세. 괜한 욕심 부리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 어찌됐거나 그 남자는 검성과의 접점이 있고, 방금 말했지만 자네는 ‘산군’소속이니까. 이게 뭘 의미하는 지는 자네가 더  알고 있을 터.”


해란은 선 채로 노태웅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잊으신 것 같은데, 제가 ‘산군’소속이라는 명패를 거는 걸로 길드에 대한  의무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길드원이 길드가 마음에  들면 탈퇴하거나 이적하는  흔한 일이죠.”

말을 끝마친 해란은 인사도 없이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떠났다.

곧바로 방안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팀만 완성되면 이딴 길드 내가 더러워서 라도...’

그녀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


류 현은 자신의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있는 초대받지 않는 손님에게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진짜로 축하파티 하자고 온 겁니까?”
“응? 아까도 말했잖아?”
“아니, 축하면 백혜라 씨랑 같이하면 되잖습니까.”
“쫓겨났어.”
“예?”
“내가 쪼오끔 빨리 말해버려서...헤헤.”


류 현은 신발도 안 신기고 그녀를 쫓아낸 백혜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물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확인사살을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그럼 오늘 기자회견은...”
“그게, 자꾸 귀찮게 하잖아. 떠나겠다는 사람 붙잡고 제휴 유지해주세요. 그냥 독립팀으로 해주시면  될까요? 나 왕따 시킬 때는 언제고 나간다니까 자꾸 들러붙어서.”
“끄응.”

 현은 이마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쫓겨난 걸로 그친 건 백혜라에게 일을 수습하느라 다른 여력이 없기 때문이리라. 아니라면 지금쯤 검성은 쥐 잡듯이 혼이 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냥 쫓아내면 어디로 갈지 뻔히 알면서  너무한  아냐?’

용잡이 팀 창설 축하파티 후, 지난  달 동안 검성은 심심하면 사무실이나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길로 다니지 않고 건물 위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엘리베이터나  따위는 이용하지 않는 이동방식 덕에 사달이 터지진 않았지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반가울 리가 없다.


류 현이 연락하면 그녀를 잡으러 오는 백혜라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 오늘도 쫓아내면서 어디 이상한 던전이 아니라 그의 집으로 갈 거라고 예상하고 쫓아낸 것이리라.


‘아니,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그러고 보면 걔도 남 돌보고  나이는 아니긴 하네.’

백혜라의 나이를 떠올리곤 짜증을 가라앉힌  현은 불청객을 다시 찾았다. 어느  다시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불청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남의 집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모습은, 괜찮다고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배웅하던 세아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무사태평함 그 자체였다.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오늘 원래 장보러 가는 날인데 안 가서 먹을 거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사오죠. 술도.”
“어 정말? 그런데 너   안 마시잖아?”
“...오늘은  그런 기분이네요. 안 가실 겁니까?”
“어어, 가. 가! 그럼, 후드티 하나만 빌려 입어도 돼? 저 모자도!”


아무리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라지만 자연스럽게 외간 남자의 옷을 빌려 입겠다는 발상에는 좀 질릴 수밖에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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