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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탐식마(貪食魔) (35/429)



〈 35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눈을 덮고 있는 손을 치우고 앞에 펼쳐진 광경을 다시 살폈다.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류 현은 다시 눈을 비비적거리는 대신 일을 벌인 주모자에게 묻기로 했다.

“이거 대체 뭡니까?”
“보시면 알잖아요? 여기, 용.잡.이.팀.결.성.축.하.파.티.”

화련이 사무실 벽에 붙어있는 플래카드를 또박또박 읽어주자  현은 그만 이마를 부여잡았다. 없던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아니..이게 무슨...”
“파티비용이라면 걱정 안하셔도 되요. 저랑 서해란 씨가 같이 냈거든요. 사실 서해란 씨가 거의 다하고 전 저 케이크만 산거지만.”

훈련 중 궁금한  생겼다며, 병문안 후에 집으로 돌아가려던 류 현을 사무실로 불러낸 화련은 못된 장난을 성공시킨 악동처럼 히죽 웃었다. 하얀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아가씨에게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화련이 그러고 있으니 제법 그림이 되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신 겁니까?”
“음, 마스터한테 답변 듣고, 해란 씨랑 동맹관계 맺고 나서 계획 짠 거니까, 한 이틀 됐나?”
“검성은 어떻게 부르신 겁니까.”


류 현은 눈짓으로 지금은 사무실 귀퉁이로 밀려난 소파에 혼자 앉아서 와인을 병 채로 들이켜고 있는 검성을 가리켰다. 화련도 와인을 병 채로 들이키는 모습에는 질렸는지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대답했다.


“제가 연락한 게 아니라 연락이 왔어요. 마스터가 잠깐 자리 비웠을 때 사무실로요. 저 분 말고 백혜라 라는 분이던데. 잠깐만, 고딩 이던데 분이라고 해도 되나? 맞다, 나 쟤한테 모르고 술 줬는데!”
“전 그런 얘기 들은 기억이 없는 거 같은데요.”
“말하면 깜짝 파티가 아니죠.”
“...말을 말죠.”

 말을 했다간 정말로 없던 두통이 생겨날 것 같았기에, 류 현은 사무실 안을 채우고 있는 인파를 둘러보았다.

검성, 파도잡이, 링커, 백혜라, 애기살 팀. 준비해서 떠나면 당장 퍼플 던전을 씹어 먹을 수 있는 괴물과 괴물이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모르고 서로 조용조용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진짜 많이 바뀌긴 바뀌었군.’

이전 생에서는 이들은 서로 한 자리에 모이기는커녕 서로 얼굴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모여 있다. 류 현은 자신이 아는 것과 미래가 다를 것이라는 느낌을 다시금 받았다.

류 현이 기묘한 감회에 젖어있자 화련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돌아보자 화련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한마디 하셔야죠?”
“...아니,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다짜고짜 이게 뭡니까.”
“마스터는 말을 지어낼 시간이 있으면 그 때처럼 이상하게 말할 게 뻔하니까.  나름대로 배려한 거라고요?”


전과가 있기에 할 말이 없어진 류 현은 잠자코 마이크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류 현이 마이크를 받아들자 화련이 손나팔을 만든 뒤에 소리쳤다.

“자자, 팀장님이 한 말씀하시겠데요!”

순식간에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현은 화련을 한 번 쏘아봤다. 자신에게 향한 시선들을 한  슥 둘러본 후, 류 현은 입을 떼었다.


‘대단한 행사도 아닌데 대충 하고 끝내자.’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용잡이 팀이  위해서 만들어 졌는지,  할지 알고 계시니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디데이인 일  후, 그 때도 이렇게 모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때까지 열심히 살아남읍시다. 제가 할 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내뱉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별로였지만 류 현은 이정도면 양반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와, 즉석에서 지어내도 별로네요.”

화련의 악평이었다.


***

[뀌익!]


결국 갑옷 멧돼지가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내달렸다. 정글형 던전이 아니라 유적형 던전에, 대로변이었기에 사방이 거칠 것 없는 개활지였고, 그 덕에 갑옷 멧돼지는 순식간에 낼 수 있는 최고속도에 도달했다.


두두두!


바닥에 깔린 블록들이 갑옷 멧돼지의 무게에 벌떡벌떡 일어났다. 앞에 있는 것은 뭐든지 부숴버릴 것 같은 돌격. 살아 움직이는 전차라고 할 만 했다.

 앞에 노출되어 있는 남자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 모습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관찰을 마친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삼 천? 아니 한 사천쯤 써야하나?”


[끼이윅!]


남자가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갑옷 멧돼지는 멈추지 않았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남자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모든 걸 뒤엎어버릴 것 같은 갑옷 멧돼지의 돌격에 맞선 남자의 대응 수단은,

[뻐어억!]

느릿하기 그지없는 레프트 훅이었다. 그러나 터져 나온 충격은 겉보기와는 전혀 달랐다.


흙먼지와 블록 파편이  튀어 오르며 남자와 갑옷 멧돼지의 모습을 가렸다. 하지만 직후에 터져 나온 아릿한 피 냄새는 가리지 못했다. 충돌 직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간에 피를 보고 처참한 꼴이 된 게 분명했다.

[꺼르륵..끄리릭...]


그리고 흙먼지가 가라앉고 모습이 드러났을 때, 처참한 꼴로 바닥에 누워있는  위풍당당하게 던전을 내달리던 갑옷 멧돼지였다.

갑옷 멧돼지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래턱은 이미 떨어져 나가서 피 웅덩이에 잠겨 있고, 오른쪽 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으며, 왼쪽 눈은 턱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가장 단단한 머리는 반쯤 터져서 분홍빛 뇌가 쏟아져 나온 모습은 괴기스러운 걸 넘어서서 영화의  장면 같아보였다.


당장 영화에 출현시켜도 될 만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던 괴수를 처참한 꼴로 만들어 놓은 남자, 류 현은 갑옷 멧돼지 쪽은 보지도 않고  손목을 주물럭거리는 중이었다.

“쯧, 힘 조절이 너무 과했나.”


 현이 그렇게 손목을 주물럭거리고 있자, 그의 뒤편 유적 기둥에서 인영이 하나 걸어 나왔다. 아니, 둘 이었다. 한 사람은 자신보다 머리가 두 개 정도 커 보이는 이를 뒤에서 미느라 모습이 거의 가려진 채였다.


한 차례 더 희란을 힘껏 밀어붙인 후, 화련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던전 사냥을 끝마친 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녀들은 몸에 차고 있는 장검이나 버클러는 사용하지도 않았다. 쓴 장비는 단검 몇 개와 아라미드 소재의 와이어 몇 가닥 뿐.

그린 던전 전문팀의 베테랑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면 던전에 들어갔다  게 아니라, 어디 코스프레 행사장에서 왔냐고 물을 것이다. 그린 던전을 클리어 하고 왔으며, 그들이 팀을 결성한지 세  차 새내기들이라고 이야기 하면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할지도 모른다.

용잡이 팀은 결성한지 세달 차에 그린 던전을 가지고  수 있을 수준이 되었다. 정확히는  현이 방금 갑옷 멧돼지를 때려잡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마력 지원조차 하지 않아도 화련과 희란이 자력으로 클리어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옐로우 던전 이상에서는 전력 외라고 판정받은 레드, 오렌지 전문 헬퍼와 각성한지 이제 세 달차인 초짜가 말이다.


경이로운 걸 넘어서서 이상함을 느낄만한 성장속도였다. 어제 오늘 막 각성한 초짜도 믿지 않을 정도의 성장속도. 용잡이 팀의 팀원들이 팀 결성 이후, 협회에 프로필 갱신을 하러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협회에 가지 않아도 팔찌를 차고 있는 한 위치추적은 당할 수 있지만 협회가 모든 플레이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것도 아니니, 협회에 가서 팔찌에 기록된 정보로 프로필을 갱신하지 않는 이상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용잡이 팀원 중 하나가 갱신을 하면 협회가 뒤집어  것이다. 그린 던전을 가지고  수 있는 수준의 플레이어 숫자는 제법 있지만, 그 이하 수준에서 놀던 이들이 두 달 만에 이렇게 성장하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니까.

“설마 그거 하고 손목 나갔어요?  일이 다 있네. 마스터 오늘 어디 아파요?”

그런 괴물 같은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  인중 한 명인, 화련이 다가와서 류 현의 손목부근을 살폈다.


그는 보스몹인 갑옷 멧돼지를 일격에 때려잡은  ‘고작 그거’라고 폄하한 것에 불평을 표하진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볼 뿐. 어느 새 희란도 다가와서 끼었다.

“괜찮으니까, 할 일들 하십쇼.”


두 여자에게 손목을 관찰당하고 있는 게 유쾌하진 않았던 류 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화련은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걱정해줘도 뭐래. 마스터 혹시 친구들한테서 배가 불렀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요?”
“확인 해볼 길이 없어서 유감이군요.  친구 없습니다.”
“...잘 났어, 정말.”
“공방에 공급할 거니까 힘줄만 잘 추려내시면 됩니다. 별로 탐 내실만 한 부위는 없겠지만 힘줄 제외하면 다른 부분은 알아서 챙기셔도 되고요.”

류 현은 그리 말하곤 턱짓으로 갑옷 멧돼지의 사체를 가리켰다. 화련은 무어라 몇 마디 더 중얼거린 후에 희란에게서 도축용 칼을 받아서 사체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세 달차지만 희란은 아직 지금같이 훼손된 사체에는 가까이 가는 것도 힘들어했다. 보는 것도 힘들어서 토해버리던 몇 달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는 하나, 아직 도축은 무리였다. 자연히 도축은 류 현과 그만 시킬 수 없다고 그에게서 배운 화련의 몫이 되었다.

희란은 혼자 도축작업을 시작하는 화련을 힐끔 본 후, 류 현에게 물었다. 손목이  풀렸는지 류 현도 화련이 작업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주는 이걸로 끝인가요?”
“예, 뭐. 갑자기 공방 측에서 발주 요청을 안 하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제가 커버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거고요. 그런데 왜...”

희란은 팀의 일정에 대해서 묻는 법이 거의 없었다. 아니, 질문 자체를 잘 하지 않았다. 류 현이 짜놓은 계획대로 군말 없이 던전 사냥에 나섰고, 훈련도 그가 짜준 계획표대로 성실하게 이행했다. 처음에는 성실함이  지나쳐서 류 현이 자제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먼저 이번  일정을 물어오다니 별 일도 다 있구나 하며  현은 생각했다.


“그, 그게 언니랑 어디에 좀..”
“화련 씨랑요?”
“네에, 안 될까요..?”


희란의 되물음에 류 현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런 질문이 나오게 만들 정도로 악덕 팀장이었던가?


소속이 있는 플레이어들은 훈련이나 일정에 대해서는 제약을 꽤 심하게 받는다. 계약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 외에는? 자유다.


길드에서는 던전 밖에서, 훈련시간이 아닐 때는 플레이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유부녀를 건드려서 사고를 치든, 술이 취해서 대로에 벌거벗은 채로 발견 되든, 던전에서 몰래 들여온 환각을 일으키는 식물을 태우든 간에 훈련 시간과 정해진 사냥 일정만 맞출 수 있으면 그냥 오케이다. 형사입건 되는 경우에도 어지간하면 손을 써서 빼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이미지가 중시하는 대형 길드의 경우에는 제재를 하겠지만.

이런 일과 이후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사건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실질적으로 플레이어들을 컨트롤 하는 길드에서  더 플레이어들을 잘 조여 놔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플레이어 업계 관계자들에게는 그야 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다.


유혈이 난무하는 곳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대부분 박탈당하며 던전 안에서 버틴 이들을 던전 밖에서도 억누른다? 그거야 말로 사고 쳐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니면 미치라고 기도하는 것이거나. 길드나 팀에서도 그걸 아니까, 그냥 제멋대로 하게 두는 것이다. 누군들 강력한 권력으로 쥐고 흔들고 싶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플레이어들에게는 던전 밖의 자유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희란이 눈치까지 봐가며 재차 확인을 하려드니 류 현은 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달 동안 던전 원정 일정이 좀 빡빡한 편이긴 했어도 자유시간은 보장 했던 것 같은데.

그는 복잡한 속내를 숨긴 채 애써 미소 지었다.

“물론 됩니다. 훈련 시간도 이미 채우셨고, 원정 횟수도 채우지 않았습니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저랑 연락만 되게 해두시면 됩니다.”

희란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현은 다시금 회의감을 느꼈다.


‘나 진짜 악덕 팀장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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