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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 〉탐식마(貪食魔) (34/429)



〈 34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화련의 곧은 눈을 직시하다가 식어버린 커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그라도 그런 눈을 마주 보면서 거짓말을 늘어놓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제가 바르게 이해했는지 모르겠군요. 화련 씨가 보시기에는 제 목표가 누군가의 지령 같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제 뒤에서 저를 조종하는 모종의 배후가 있다?”
“조종 당한다기 보다도 어느 정도 유도 당하고 있는 거 같다는 거죠. 혼자라고 하기에는 마스터는 너무 앞서가고 있으니까요. 수혜자 입장이면서 이런 소리 하면 웃기다는 건 알고 있지만...마스터가 목표 얘기를 하셨을  제일 먼저 그 점이 떠올랐어요. 혹시 마스터가 이렇게 앞서 나갈 수 있는 건, 이렇게 앞서나가면서도 급한 건 누군가의 요청이나 유도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흐음...”


‘하긴 이쯤 돼서 의심 안 하면 그게 바보지.’

오희란이나 서해란이면 몰라도, 그는 이미 화련에게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많이 보여 왔다. 아니, 의심받을 일만 해왔다. 첫 만남부터 범죄냄새가 솔솔 나는 방식으로 시작했고, 그 이후에 한 달은 구치소에 안 들어간 게 이상할 정도로 범죄행위  자체였다. 아마 구치소에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다면 뒷조사한 것도 들통 나서, 정말로 감옥에 갔을 수도 있었겠지.

상대가 백화련이라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이 아니었다면 이미 사달이 났을 것이다. 그 뒤에도 화련은 충분히 의심을 제기할  있는 상황에서 입을 다물었다.

 현이 벽에 막혀있던 자신에게 길을 열어줬다는 이유만으로. 은인이니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달한 듯 했지만.


류 현은 턱을 매만지며 자신이 벌인 일들을 곱씹고 있자, 화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식으로 파고들고 싶진 않았어요. 그야 마스터는 은인이고...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여태껏 변변한 설명도 없이 두 분을 끌고 다닌 것도 사실이죠.”
“죄송해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고개를 숙이는 화련을 바라보면서  현은 가슴이 조금 뜨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도 거짓말하는데 재미가 붙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다니요. 당연한 겁니다. 한 번쯤은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만들 생각도 안하고 계속 외면해 온 제 탓이죠.”

반쯤은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 내뱉은 위로였다. 류 현은 입술에 슬쩍 침을 바르고 말했다.

“저번에 제가 이 눈에 대해서 말씀 드렸던  기억하십니까.”
“아..네. 기억해요. 그걸로 그림자 두꺼비랑  능력을 아셨다고..”
“예. 그랬었죠. 그런데 사실 이 눈은 말입니다.”

‘그래, 그래도 전생 얘기 하는 것 보다는 중2병 같아 보이는 게 낫지.’

류 현은 자신의 왼쪽 눈 밑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속내와는 달리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일회용입니다. 그 한 번 뿐인 이미 능력은 사용했고, 지금 남아있는 단편적인 정보를 보는 능력은 남은 찌꺼기 같은 거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알기로도 저처럼 능력을 한 번 사용하고 힘이 다해버리는 경우는 듣지 못했거든요. 실제로 있다고 한들 별 의미는 없겠군요.   쓰고 나니, 능력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해도 믿어줄리도 없으니 말입니다.”


화련은 아리송한 얼굴로 류 현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류 현이 거짓말에 별 재능이 없다고는 해도, 해온 세월이 있으니 그녀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류 현은 이불이라도 뻥뻥 걷어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왼쪽 눈은 원래 미래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화련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구겨졌다. 류 현은 뜨끔 하는 걸 넘어서서 회의감마저 느끼고 있었지만, 내뱉은 말을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가  건 던전의, 아니 정확히는 던전에 대적한 인류의 말로였습니다. 대적이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괴물을 봤습니다. 그 괴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저도 그냥 환각을 본 거라고 믿었습니다만. 그 뒤에 던전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이 눈으로 얻고 나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더군요. 굳이 그 광경을 대비한다기보다도 어차피 만들었어야 할 팀을 만드는 김에 조금 더 신경을 썼습니다. 저도 죽을 때까지 솔플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 광경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준비는 해둔 셈이라고 생각하고 반쯤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검성이 제게 X던전을 보여줬죠.”


말을 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과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류 현은 애써 무시했다. 이미 벌려놓은 거짓말을 중간에 그만두는 건, 거짓말을 들킨 것만큼이나 좋지 않다. 그것도 같은 거짓말로 팀원을 설득했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걸 보고 나니 그냥  놓고 있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솔직히 이제 각성한지 두  좀 넘은 뉴비가 책임감을 논하는 건 웃긴 일이겠지만, 그걸 본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있을 수가 없더군요. 앉아서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고요.”
“이게 저의 이유입니다.”

류 현이 조심스럽게 화련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등에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게 내가 지어낼 수 있는 최선이다.’


정말로 뒷배가 있다는 컨셉의 거짓말도 생각해 보았다. 아마 한 달 버티면 오래 버티는 편일 것이다.

거짓말을 아주 못하진 않지만 잘하는 편도 아닌  현이 그런 거짓말을 감당하려면 성장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리는 상황이 되 버리는 것이다. 유지 할 수도 없고 차후에 돌아올 해악이 더 커 보이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사실을 털어놓는 건 선택지에 넣지도 않았다. 세아에게 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다. 세아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문제 때문에 털어놓지 않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을 예정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들통 났을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증명하는 건 둘째 치고, 털어놓을 때 입을 조금만  못 털었다간 미래가 더 엉킬 수도 있어.’


그의 입장에서는 이미 미래는 꼬이는 중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다른 변수를 넣고 싶지 않은 게 당연지사.

대답을 회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냥 미봉책에 불과하다. 솔직히 그 미봉책과 자신이  거짓말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 지, 화련은 고개를 숙인 채로 꽤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현이 식어버린 자신의 커피를 다 마시고, 별 의미 없이 찻잔을 주무르고 있자 화련의 고개가 들렸다.

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좀 결리는지 그녀는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류 현은 재빨리 화련의 표정에서 그녀의 심중을 읽어내고자 했지만, 화련은 드물게도 일절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마스터의 뜻은  알겠어요. 오늘 나오길 잘  것 같네요.”
“...믿어 주시는 겁니까?”


류 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화련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짐을 챙겨들었다. 그녀가 그대로 나가버릴 기세였기에 류 현이 붙잡는 말을 하려던  때였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선 채로 그녀가 말했다.

“믿어요. 하지만 그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스터의 절절함을 믿는 거에요. 마스터가 그런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절박하다는  알았으니까요. 정말 그럴싸한 거짓말이었으면 좀 화났을 거 같은데. 이건 화난다기 보다도..그래요, 측은하네요. 전 일단 그래요.”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마세요. 저야 마스터한테 꽤 큰 걸 받았고, 목표도 마음에 들어서 그러려니 하지만, 희란이는 아마 거짓말인  알아도 맞장구 쳐주려고 노력할 걸요. 그 착한 애를 그런 식으로 괴롭히는 건 좀 아니잖아요? 솔직히 걔는 그냥 가자고 하면 따라올 애인데. 그런 식으로 애 진심을 농락하는 건 아무리 절박해도 아니죠.”

 현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화련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왠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 무슨 표정이 떠올라있는지 보이는  같았다.


“해란 씨는...모르겠네요. 제가 신경 써줄 깜냥도 아닌 거 같고. 솔직히 우리 지원해 준 대가만 받으면 되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 해줬는지도 잘 모르겠구요.”

그 말을 끝으로 할 말을  끝마쳤는지 화련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몸을 빙글 돌려 종종 걸음으로 류 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앉아있었기에 류 현은 작은 그녀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는 화련이 이상할 정도로 커보인다고 생각했다.


화련은 상체를 숙이더니 류 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제법 귀여웠어요. 마스터.”


화련은 날 듯이 달음질 쳐서 문을 열고 나갔다. 사무실에 혼자 남겨진  현은  발 늦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니까...추가 조건 없이 그냥 계약을 유지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네에...혹시 안 되...나요?”


류 현은 어제도 그렇고, 요즘 들어 머리를 감싸 안고 싶어지는 일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표정관리에 힘쓰며 류 현은 재차 물었다.


“정말로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제가 제시할 추가 조건도  들어보셨잖습니까.”
“그, 그렇지만 전 이대로도 괜찮은 걸요.”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올  같았기에 그는 입가를 매만지는 시늉을 했다.

‘아니, 대체 왜 이런 쪽으로만 자기주장이 강한 거야?’

챙겨주겠다고 해도 이대로가 좋다고 고집을 부려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눈앞의 고집불통 아가씨, 오희란은 시일 돼서 자신의 면담차례가 왔음에도 사정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냥 계약을 유지할 거라고 말할 뿐.  현이 제의하는 추가 조건에는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예전 용잡이 팀은 다 미친놈들이긴 했지만 이렇게 다루기 힘들진 않았는데.’


새삼 전생의 용잡이 팀 동료들이 그리워지는 류 현이었다.

결국 그는 백기를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건 자신이고, 희란은 지금 조건을 더 붙이자고 하는 게 아니라 혜택을 주겠다는 걸 거부하고 있을 뿐이니까.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계약 내용은 유지한 채로. 그거면 되겠습니까?”
“네!”

‘관리하기  때리기는 이번 용잡이 팀이 더 심할 거 같군.’

자신이 정한 최소한의 스쿼드가 갖춰졌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화련의 미소띤 얼굴이 떠오른 순간 류 현은 집에 가는 길에 샌드백을 하나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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