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탐식마(貪食魔)
‘..괜히 오늘 왔어. 그냥 예정대로 올 걸.’
그것이 자리에 앉으면서 류 현과 그의 팀원들의 안색을 살핀 서해란의 결론이었다. 플레이어 팀 사무실이 너무 풀어진 분위기인 것도 안 좋다고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이건 아니었다. 용잡이 팀의 팀원들은 그들의 팀장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짓눌리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집 문제?’
해란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 한 그를 바라보며 유추해보았다. 류 현은 딱히 화난 것 같은 제스처를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가까이 다가가자 더욱 또렷해진 칼날 같은 기세에 가슴이 답답해 질 지경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녀의 옆에 자리한 박주희는 연신 손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뭘 물어보는 건 글렀네. 화낼지도. 그냥 거래 얘기만하고 가야겠다.’
좋은 핑계거리가 없어지는 셈이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그를 떠보려고 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일 테니까. 해란이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말을 고르려던 때였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류 현이 입을 떼었다.
그를 제외한 사무실 안의 모든 이의 시선이 류 현의 입술에 모였다.
“제가 어제 내일 모레까지 시간을 드리겠다고 했었습니다만. 너무 길다고 생각하셨던 건지, 세 분 다 그 이후에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내달라고 말이죠.”
오늘 사무실에 모여 있는 것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해란은 맞은편의 두 여자와 차례대로 시선을 맞춰보았다. ‘당신네 팀장 오늘 왜 저래요?’ 화련과 희란은 모르겠다는 대답마저 거부하고 시선을 피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반응에 해란이 의아해 하고 있자 류 현의 다음 말이 떨어졌다.
“연락을 받은 직후에는 단순히 제가 의도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까, 좀 이상하더군요.”
류 현은 말을 끊고 좌중을 한 번 슥 돌아보았다. 한 명씩 시선을 맞춰가면서. 그가 내뿜고 있던 기세는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진 채 였고, 가뜩이나 찔리는 게 있었던 그들 중 누구도 그와 2초 이상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는 하나같이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좌중에게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전화 통화나 문자로 재차 확인하면 될 걸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고, 전 지금 여러분의 반응을 보고 확신을 얻었습니다. 세 분 다 저를 떠보고 싶어서 자리를 요청하셨군요.”
류 현은 짧게 한 숨을 몰아쉬었다.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그 뿐이었기에 모두가 그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고, 모두가 한 숨 소리에 움찔했다. 류 현은 선고를 내리듯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그 말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류 현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는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덧붙였다.
“제가 여러분께 시간을 드린 건 제 의도를 생각해서 제 기분을 맞춰주기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어제 했던 말 중에서 본심과 다르게 에둘러서 한 말도 없고요. 전 목숨을 같이 할 동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저를 떠보려고 시도하는 걸 알고 나니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군요.”
류 현에게 모였던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는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이쯤에서 달래줘도 되겠지만 그도 그럴 심적 여유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세아를 돌보다가 왔으니까. 지금 자리를 빨리 파하고 싶을 뿐이었다.
“돌아가서, 제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어떤 게 좋을지 결정 하십시오. 오늘을 기준으로 내일 모레까지 다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이 많으신 거 같으니 그 이상은 시간을 드려도 독이 될 것 같군요. 그 이상 시간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내일 모레까집니다.”
류 현의 말이 끝나자 네 여자는 부리나케 자리에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류 현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해란을 불러 세웠다.
“서해란 씨.”
“네엣?”
저도 모르게 낸 새된 소리에 해란에 입을 급히 틀어막았지만, 그렇다고 나간 소리가 되돌아오진 않았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 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해란에게 류 현이 말했다.
“마나 포션 계약건도 그 때 이야기 했으면 좋겠군요. 어느 쪽을 선택하시던 단순한 스폰서 관계로 남기도 힘들 것 같으니 말입니다. 무턱대고 계약을 체결했다가는 서로 나중에 얼굴 붉힐 일이 생길 수 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내일 모레 뵙겠습니다.”
이 자리를 위해서 밤새도록 준비한 자료를 한 아름 안고서 해란은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여자는 양치기 개에게 몰리는 양떼처럼 순식간에 문 밖으로 몰려나갔다. 혼자 남게 된 류 현은 소파에 몸을 내맡기며 고개를 젖혔다.
오 분여 정도 미동도 없이 축 쳐져있던 그는 오른손만 움직여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시체모드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움직이게 된 건 십 분여 정도가 흐른 뒤였다. 똑똑하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다가오는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지만 류 현은 그 자세 그대로 내방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있었다. 이윽고 내방자가 목소리를 내자 그는 고개만 들어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
“많이 피곤하신 거 같은데 저 내일 다시 올까요? 마스터.”
“아닙니다. 아쉬운 건 제 쪽인데 그럴 수야 없죠. 좀 긴장이 풀려서 그렇습니다.”
문을 열고 온 이는 백화련 이었다. 화련은 축 쳐져있는 그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류 현의 뒤쪽에 있는 찬장으로 향하며 물었다.
“커피, 드려요?”
“...설탕 많이 부탁드립니다.”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류 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생각의 끊을 놓아버리자 사방에서 오만가지 생각들이 덤벼들어 그를 괴롭혔다.
벌써부터 시력이 심하게 떨어진 세아를 안전하게 돌 볼 방법이 필요하다. 검성과 협업을 밝히기 이전에 용잡이 팀을 화려한 데뷔를 시킬 것인가. 서해란이 검성과의 관계를 의식해서 계약이고 뭐고 파투낸다면? 만약 오희란이 용잡이 팀을 따라가는 걸 거부할 경우 적어도 눈에 보이는 곳에 묶어 두어야한다.
이걸 해야, 아니 저것부터 해야. 해야 한다, 해야 한다, 뭐든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테니까. 류 현은 자신의 눈꺼풀 위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분명히 어둠 뿐 인데도 망연하게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던 세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그 표정이 싫었다. 미치도록 싫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던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을까? 자신이 거의 독식하다시피 한 네임드 괴수나, 밥 먹듯이 부딪힌 3차 대소환 이후 세계의 축을 이룬 군벌이나 길드들에 대해서는 자신할 만하다. 실제로 겪은 일이니까.
하지만 세아의 일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그 누구도 세아의 병세를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세아와 비슷한 일을 한 이들이 쓰러져나가자, 괴수사체 공정과정에서 새어나온 마나가 몸에 축적되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예측정도가 전부였다.
세아는 같은 병세를 앓고 있는 환자 중에서 최장기간 생존해 있었지만, 그 병치레 기간이 무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뿐. 그녀가 병세 속에서 계속 살 수 있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는 세아의 병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절망적일 정도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봤던 엘릭서에는 전생에서도 닿지 못했었다.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을 복용해서 살아난 부자와 만나봤을 뿐 실물은 보지조차 못했다.
그런데도 안심하고 있었다. 아직 기간이 남았다고, 이번에는 엘릭서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희망에 잠겨서.
‘병신새끼..’
하지만 그는 자기혐오에 자신을 매몰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세아의 병세에 답이 될지 아닐지 모를 엘릭서의 행방을, 제조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황금손’과 전략적 제휴든 뭐든 해야만 한다. 그 남자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용잡이 팀이 필요하다. 혼자서도 충분히 그 수준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걸 위해서는 일단 용잡이 팀의 구성을 확정 시켜놓아야 한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자 복잡한 머릿속이 그래도 좀 정리 되는 듯 했다.
‘그래, 지금 제일 집중해야하는 건 용잡이 팀이야. 전제 조건이 갖춰져야 ‘황금손’을 족쳐서 엘릭서를 뜯어내든 말든 할 거 아냐.’
류 현은 자신에게 악담을 몇 마디 퍼부어준 다음 눈꺼풀에서 손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커피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고, 고개를 좀 더 들자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 화련이 보였다. 류 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커피잔에 손을 뻗었다. 커피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멍하니 커피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류 현이 물었다.
“...제가 얼마나 멍 때리고 있었습니까?”
“제가 시간을 본 다음부터 삼 십분 쯤 그러고 있었어요.”
“......”
겨우 정리한 자기혐오의 감정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느낌에 류 현은 다시 손바닥으로 눈꺼풀을 문질렀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이의 행동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다. 보다 못한 화련이 입을 열었다.
“마스터.”
“...괜찮습니다.”
“보고 있는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팀 스쿼드 확정되기도 전에 마스터가 쓰러지겠어요.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류 현은 멀거니 화련을 바라보았다. 한 달간 그녀를 쫓아다닐 때 그녀의 이모 또한 세아와 비슷한 증세로 입원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손 쓸 도리도 없이 가족이 천천히 메말라가면서 사람이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걸 지켜보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공감해 주지 않을까?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류 현은 떼었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화련이 의아해했지만 류 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화련 씨가 신경 쓰실 만 한 일은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예, 좀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어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잖습니까.”
“그럼 오늘 말고...”
“화련 씨와의 이야기를 끝내고나서 아무 일도 안하고 쉬겠습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후우, 알겠어요.”
화련은 말을 고르는 것인지 조금 지체한 후 말했다.
“마스터. 우리 팀을 만든 목적이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하셨죠? 지금은..그 뭐더라, X던전이 목표고요.”
“정확히는 그 X던전이 최상위 던전이니 그렇게 잡고 있습니다. 더 상위 던전이 있다면 그게 목표가 되겠죠.”
“이제 확실하게 이해했어요. 솔직히 전 어제 그 말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사람 잘 못 보진 않았구나, 하고요.”
그녀가 물어주길 바라는 것 같았기에 류 현은 물었다.
“다행이라고요?”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전 괴수가 밉거나, 돈이 필요해서 던전에 가는 게 아니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 원래 의대생이었거든요.”
알고 있었다. 이번 생에 따로 조사할 필요도 없이, 전생의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은 얘기였다. 그녀는 아지다하카를 만나기 전에는 괴수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돈이 필요해서 플레이어로 활동한 건 더더욱 아니라고. 그리 말했었다.
류 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의 눈치를 보던 화련은 말을 이었다.
“전 제가 가진 이 힘을. 그러니까 이 마법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알고 싶어요. 끝은 있는지, 누군가가 만들어서 내 머릿속에 집어넣은 거라면 목적이 뭔지.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러시군요.”
애써 무표정을 연기했지만 류 현은 다시금 화련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화련은 그가 알았던 화련보다 6살은 더 젊다. 그렇다는 건 화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길만 추구해왔다는 말이 된다.
던전에 파묻혀서 사는 플레이어는 많았지만 명확한 목표를 가진 이는 드물다. 유혈 속에서 삶이 고꾸라지는 게 일상인 던전을 들락거리면서 목표를 끝까지 바라보는 건, 그 아수라장 속에서 계속 살아남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눈앞의 여자는 그것을 계속해서 관철해왔다. 이번 생에서도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테지.
화련은 언제나 자신의 목표를 향했던 곧은 눈으로 류 현을 바라보았다. 류 현이 오랜만에 전우의 향수에 빠지려고 하는 그 때 화련은 자신의 의지만큼이나 곧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알고 싶어요. 마스터. 마스터가 추구하는 목표는 정말 마스터의 의지로 추구하게 된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