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탐식마(貪食魔)
몇 년 만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 본 밤하늘은 한없이 우중충 했다. 구름 때문인지, 환경오염 때문인지, 아니면 가로등 때문인지 별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고, 유일한 위안거리인 달빛조차 흐릿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던 류 현은 흐릿한 달빛에 한숨을 내쉬었다. 흐릿한 빛이 마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달에서 눈을 돌린 류 현은 아파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색이 바래서 회색빛으로 보이는 아파트가 바로 그의 집이었다. 정부에서 지원계층에게 싼 가격에 전세를 내주는 전세 아파트.
예정대로라면 이미 이사를 했어야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세아는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그가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걸 못마땅해 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류 현이 벌어온 돈을 거부하고 있었다. 전적으로 그의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작부터 틀어지는 바람에 어디서 손을 댈지가 난감한 상황인데, 류 현은 나름 바쁘기까지 했었다. 그 덕에 꼬이고 꼬인 오해가 시간의 손을 타고 더 꼬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세아가 류 현을 대놓고 없는 취급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동생을 대했고, 곤란한 주제 -플레이어 일- 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류 현이 자신이 번 돈으로 이사를 제의했을 때도, 류 현이 내민 통장에 찍힌 금액은 보지도 않았다. 그저 첫 월급이나 다름없는 돈이니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타이르듯이 거절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류 현은 더 속이 쓰렸지만.
차라리 세아가 화를 내는 쪽이 류 현에게는 편할 거 같았다.
‘개소리지. 나도 같이 화낼 게 뻔한데.’
그는 자신의 자기 위주 사고방식에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도 잘 안 날거야. 오늘 해야 해.’
오늘 그린 던전을 사냥했다. 던전을 사냥하고 나선 검성을 만나고, 검성이 부른 백혜라를 만났다. 그 뒤에는 팀원들과 서해란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팀을 창설한 포부도 밝혔다.
육체적 피로감은 별 거 아니었지만 심력소모가 너무 심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루 동안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본 적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로 미루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자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세아는 태도를 바꾸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팀원들에게도 내일 모레 보자고 하였으니 내일 하루는 남는다.
하지만,
‘누나다. 누나라고, 류 현. 뭘 빼고 지랄이야. 제일 먼저 설명했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래서는 안 된다.
류 현은 무거운 발걸음을 떼서 단박에 성큼성큼 아파트로 들어섰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상반되게 축 쳐진 어깨는 별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늦은 밤에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는 없었기에 목격자는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싣고 5층을 누르자마자 류 현은 거울에 딱 달라붙어서 자신도 못 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렸다. 류 현의 소망과 달리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그를 5층에 데려다 놓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가는 것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곧장 모퉁이를 내달리듯이 돌았다. 이번에는 습격 같은 건 없었다.
습격 없이 무사히 집 문 앞에 도달한 류 현은 뚫어져라 손잡이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해서 손잡이가 녹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물론 그는 그런 바보는 아니었다. 류 현은 잠금장치에 손가락 지문을 찍고 손잡이를 비틀었다. 경첩이 조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집안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언제나 그를 반겨주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나?”
조심스럽게 세아를 불러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분명히 집안에 있는데. 왜 대답을 안 해? 부엌 쪽인가?’
화련을 쫓아다니면서 한 달. 화련과 희란을 훈련시킨 이주 동안 류 현도 놀고 있진 않았고, 폭발적인 성장 덕택에 집안의 인기척 정도는 감지할 정도로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감각은 세아가 부엌에 있다고 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엌에 도달했을 때 류 현은 잠시간 자신이 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엎어져 있는 큰 냄비와 물바다가 되어있는 바닥. 아침에는 못 봤던 붕대로 둘둘 감긴 오른손. 그 움직이기 힘들어 보이는 오른손으로 얼음 봉투를 갖다 대고 있는 상처투성이 왼손. 그리고 어딜 보고 있는지 초점이 애매한, 반쯤 감긴 채 그렁그렁한 눈.
그것이 자신의 누나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류 현은 달려들 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세만으로도 세아가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혀, 현아? 현이니?”
세아가 자신의 양손을 붙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에게 물었지만, 류 현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류 현의 기세에 눌려서 손을 빼지도 다시 묻지도 못하고 있자 그가 불쑥 물었다.
“...이거 어쩌다 이랬어?”
“어? 그, 그냥 좀 데였어. 요리 하다보면 이 정도는 별거 아냐.”
“오른손은?”
“공장에서 조, 조금 멍 때리다가...별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병원에서도..”
“누나 지금 눈 거의 안보이지?”
세아가 순간 숨을 멈췄다. 다른 말을 들어 볼 필요도 없이 정곡이었다. 세아의 눈에 의구심이 어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류 현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류 현은 초점이 자꾸 엇나가는 세아와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다가 곧 포기했다. 어쩌지도 못하고, 눈만 굴리고 있는 세아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이 눈물이 가득했다.
류 현은 이렇게 놀라고 혼란스러워 하는 세아를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증상의 앞뒤가 바뀐 것 같았지만 그는 이 증상의 말로를 직접 봤었다.
이전 생에서 처음에는 세아도, 류 현도 단순 감기라고 생각했었다. 세아는 감기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며 감기약을 일주일 넘게 챙겨 먹었다. 효과는 당연히 없었다. 그 뒤에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져서 집안일을 하면서 자주 실수했다. 류 현은 집에서는 좀 쉬라며 그녀에게서 집안일을 뺏어갔다.
며칠이 더 지났다. 세아는 잠깐만 눈을 돌려도 깜빡 잠들었고, 이유도 없이 눈에 띄게 쇠약해져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류 현이 반강제로 입원을 시켰지만 어떤 의사도, 약도 쇠약해져 가는 그녀를 회복시키진 못했다.
점점 깨어있는 시간 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끝에는 시력을 잃었다. 그 뒤는 알지 못한다. 얼마 안가서 세아는 아지다하카에게 죽었으니까.
순서가 바뀐 듯 했지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으리라. 류 현은 이를 악물었다.
‘멍청한 새끼..병신새끼..’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했다. 엇나갈 거라는 가정 하에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진 않았다.
오늘 블랙 던전을 보았고, 미래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미래가 알고 있던 것과 아주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잘 말하고 천천히 그만두게 한 다음에 요양시키면 될 거라고? 대체 니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미래를 장담했지?’
류 현이라는 존재가 예정보다 5년 빠른 각성을 해서 검성 이라는 거목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바로 곁에 있었던 이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류 현은 불안에 떨고 있는 그의 누나를 끌어안았다. 세아의 작은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떨리기 시작하고 억눌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류 현은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
“그렇게 상태 안 좋으시면 오늘 말고 내일 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팀장님. 원래 약속 일자도 내일이었다면 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미 연락해서 약속까지 잡았어.”
“그럼 핸들에서 이마부터 떼시던가요. 이마 벌겋게 돼서 찾아가면 참 좋아하겠네요.”
핀잔 아닌 핀잔에 서해란은 자동차 핸들에 대고 있던 이마를 떼었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는 조수석에 앉은 이를 노려보았다.
“넌 다 좋은데 꼭 초치듯이 말하는 경향이 있어.”
“그 부분을 높게 사셔서 저 열심히 데리고 다니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면 저도 집에 가고 싶은데.”
“..말을 말자.”
해란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화장을 고치려고 자세를 잡자, 여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와, 팀장님 지금 화장 고치시는 거? 거래하러가는 게 아니라 연애하러 가시는 거에요?”
“무슨 연애야. 그만큼 중요한 자리라는 거지.”
“하지만 팀장님은 우리 길드 마스터 만날 때도 머리 대충 말려서 나가잖아요.”
“시끄러. 너 거기 가서 그런 소리 하기만 해. 감봉이야.”
“엑, 거기서 더 깎으면 뭐 먹고 살라고요?”
“길드 식당 밥 괜찮게 나오니까. 거기서 먹으면 되겠네. 아니면 그 이상한 드레스를 포기하던가.”
“그걸 포기 할 바에야 굶고 말지. 그리고 길드 식당 밥이 괜찮다고요?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팀장님은 부잣집 딸이랑 안 어울리는 거 같아요.”
“그래. 유감이야. 네가 들어왔어야 하는 자리를 내가 차지해서.”
“...팀장님 지금 발언 엄청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시끄럽고, 내가 오늘 네 역할이 뭐라고 했지?”
“예쁜 병풍이요.”
“예쁜은 빼도 되는 데. 주희야, 어쨌든 오늘 좀 잘 하자 응?”
“저야 그냥 서있기만 하면 되는데 잘 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요.”
“또, 또.”
“네,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회백색 사층 건물이 정면에 서있었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해란은 별 거 없는 건물에 압도되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원래라면 해란이 용잡이 팀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건 내일이다.
어제 류 현은 용잡이 팀의 창설 목적과 검성의 의뢰에 대해서 밝혔다. 그리고는 그녀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틀 동안 생각을 쉬시면서 생각을 정리한 뒤에 대답을 주십시오. 시간이 더 필요하시다면 문자만 주시면 됩니다.”
내뱉는 말과 달리 그의 태도가 칼 같았기에 누구도 반론을 내뱉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해봤지만 해란은 쉽사리 결론 낼 수 없는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그녀는 대신 그와의 거래 내용에 대해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허락을 얻어내었다. 그 뒤로 밤새도록 로열티 부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한 끝에, 뜨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해란은 결심을 굳혔다. 그와 더 이야기 해보기로.
마나 포션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그녀의 요청을 류 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하룻밤 만에 같은 건물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묘한 경험에 감회에 빠져 있는 해란을, 그녀의 팀원인 박주희의 목소리가 두들겨 깨웠다.
“건물은 생각보다 별 거 없네요. 건물 전체도 아니고 한 층만 계약하다니. 팀장님이 용케 이런 데 계약하셨네요.”
“내가 뭐.”
“팀장님 주특기가 그거잖아요. 평소에는 부잣집 아가씨인 줄도 모르게 행동하다가 잡고 싶은 사람 있으면 돈으로 후려쳐서 얼 빼놓은 다음에 꼬시는 거.”
“너 말에 가시가 있다?”
“직접 당해본 피해자의 담담한 경험담인 거죠. 가시가 있다고 생각 하시는 건 팀장님의 가슴 속에 양심이 남아있다는 증거구요.”
“...쉰 소리 그만 하고 얼른 가자.”
건물이 그리 높은 편도 아니었고, 용잡이 팀 사무실도 2층에 있었기에 그녀들은 금방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란은 마른 침을 몇 번 삼킨 후에 문을 두드렸다.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해란은 문을 열어준 이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사무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적거렸다.
“오셨습니까.”
류 현은 어제 그 상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오른 편에는 어제와는 딴 판으로 화련이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해란이 놀란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완전 딴사람 같은데요.”
해란을 대신해서 박주희가 귓속말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해왔고, 해란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앉아있었지만, 은연중에 풍기는 분위기가 차원이 달랐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칼? 그래, 칼이네.’
칼날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는 남자, 류 현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