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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탐식마(貪食魔) (31/429)



〈 31화 〉탐식마(貪食魔)

“안녕하세요. 백혜라 라고 합니다. 언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류 현입니다. 많이 들으셨다니  긴장되는데요.”


반쯤은 진심인 대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류 현의 앞에 앉으며 화사하게 미소 짓는 소녀는 도착하자마자, 검성을 끌고나가서 한바탕 대거리를 하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소녀의 옆자리에 앉은 검성은 잔뜩 부은 얼굴로 툴툴 거리고 있었다.

“기업체 놈들이랑 거래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만 맞으면 동료 하는 거고, 분배는 필요한 만큼 알아서 가져가면 되는 거지. 왜 그렇게 까탈 부리는 거야. 네 소원대로 예거즈..”
“그만. 언니는 좀 가만히 있어요. 설마 그것도 말한 건 아니죠?”


중간에 말이 막힌 게 분한 지 검성은 고개를 획 돌린 채로 대꾸했다.

“..내가 바보라도 그렇게 까진 안 해.”

역할이 뒤바뀐 듯 한 모습이었지만, 류 현은 어색함을 느끼기 보다는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이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어쩐 일로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하셨네요. 아니었으면 언니 내버리고 해외로 튈까 고민했을 텐데.”
“너 오늘따라 좀 심하게 틱틱 거린다?”
“언니가 착각하는 거겠죠. 아니면 찔릴만한 짓을 해서  발 저리는 건가?”


순식간에 검성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혜라는  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은 은은한 빛을 품고 있는 회색 눈을 마주보고는 움찔했다.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언니랑 어디까지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보다시피 언니 상태가 저래서요.”

혜라의 손끝에는 끊임없이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는 검성이 있었다. 대놓고 지목받았음에도 검성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류 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 계속 상위 던전이라고 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X던전이라고 지칭하도록 하죠. X던전 원정에 참가해 달라고 요청 받았습니다.”

검성의 ‘요청’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는지 혜라는 검성 쪽으로 눈을 한 번 흘겼다.

“네, 그래서요?”
“처음에는 그냥 거절했습니다만. 조금 더 생각해  후에 조건부 협조하기로 결정했죠.”
“잠깐만요. 생각을 바꾸시는 과정에서 언니가 분배율이나 성공보수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었나요?”
“아뇨.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저 던전에 들어갈지 말지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죠.”


류 현의 답변에 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가 싶더니, 다시 검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돌린 채 애꿎은 당근 쥬스만 휘적거렸다.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혜라는 잠시간 골몰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유를 들을  있을까요? 제가 듣기로는 각성한  아직 반년도 안 되셨고, 성장도 굉장히 빠르신 편인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없으신 거 같아서요. 언니는 별로 광고하고 다닐 생각도 없어서 명성을 만드는 데도 별 도움도 안될텐데..”

예상하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류 현은 미간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연기까지 곁들인 후에 대답했다.


“던전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제가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 번은 거쳐야  통과점이니까요. 능력 있는 조력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조금 무리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표요? 혹시..”
“그건 이 자리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같군요.”


말을 잘라 먹혔지만 혜라는 불편한 기색보다는 놀란 듯 했다. 검성과 가까운 만큼 성향도 비슷한 그녀는 류 현의 발언이 뭘 뜻하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돈도, 명성도 개의치 않고 던전 솔로 플레이를 하면서, 위험이 도사리는 미지의 영역에도 발을 들이는 플레이어. 그녀는 그런 플레이어를 한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말이다.

혜라가 옆을 돌아보자 그녀의 예상대로 검성이 류 현을 향해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미 속으로 다 결정해놓고 부를  또 뭐람.’

따끔하게 뭐라고 한마디 해줘야 할 시점이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네...’

덮어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맥이 풀려버리고 만다.


“그렇겠죠. 초대면인데 제가 실례했습니다. 보통은 그런 소리를 들을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렇게 신경 쓰실 건 아니고요. 아직 팀원들과 이야기가  된 상태라서 이 이상 진행시키기 좀 그래서 말입니다. 무작정 따라오기만  거라서 팀원들에게 해명도 해야 하고요.”
“아, 그랬었죠. 죄송합니다. 저희 언니가 좀 무대포 기질이 강해서...”
“괜찮습니다. 귀한 정보도 들었고요. 덕분에 저도 계획을 확실하게 수정할 수 있을거 같군요.”


류 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라도 곧바로 따라 일어섰고, 검성은 앉은 채로 실실 웃다가 혜라에게 귀가 잡혀서 일어났다.


“팀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에 조만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이런 식으로  개시를 하게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류 현은 품에서 명함을 찾아 혜라에게 건네었다. 검성의 연락처를 알고 있긴 했지만 교섭상대로는 그녀가 훨씬 편할 것이다. 계산을 할 줄 아는 상대는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행동을 계산할 수도 있으니까.


검성의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행동력은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검성의 옆에  년째 붙어 다니는 인간이 보통일 리가 없지.’


속내와는 정 반대로 평소에는 박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힘껏 짓는 류 현이었다.

***

검성 일행과 헤어진 후에, 집으로 향하던  현이 용잡이 팀의 사무실에 들른  그냥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 딱히  일도 없음에도 그냥 들렀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것이다.


그리고 류 현은 지금 자신이 텔레파시 능력을 개화한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무실에는 그의 팀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가 부탁한 와이번 사체 보관 때문에 이 시간까지 있을 리는 없었다. 류 현은 카페에서 한 시간 이상 걸어서 사무실에 막 도착한 참이었으니까.

거기에 당연히 집으로 간 줄 알았던 서해란까지 자리해 있는  확인한  현은 의문어린 시선을 화련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새, 화련과 희란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화련은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스터가 그렇게 납치됐는데 그냥 집에 가서 발 뻗고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납치라니...동행 요청입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상한 분위기 풍기면서 다짜고짜 어디 가자고 하면 그게 납치지 뭐가 납치에요?”
“제가 동의하는 거 보셨잖습니까. 강제로 끌려간 거 아닙니다. 무력행사 하지도 않았고요.”
“상대가 검성이면 무력행사  것도 없이, 이름값으로 충분히 강제성이 있을 거 같은데요.”

화련의 대답에  현은 혼자서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서해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류 현은 혀를 찼다.

“서해란 씨 탓할 거 없어요. 우리가 억지로 캐물어서 들은 거니까.”

화련의 말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 희란이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정 궁금하셨으면 내일 저한테 연락하셨어도 됐을 텐데요.”
“지금 당장 마스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데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또 친구라고 얼버무렸을 거면서.”

 현은 팔짱을 끼고 숙고에 들어갔다. 화련과 희란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눈을 감고 있는 이에게서 감정 변화를 읽어내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이윽고, 류 현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짧은 이야기는 아니니. 모두 식사 전이십니까? 마침 저녁때고, 이야기 하다 보면 끼니 때 지날거 같은데. 뭐라도 좀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불안한 표정으로 상황을 관망만 하던 희란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메뉴 선정은 만장일치로 중국집에 배달을 시켰다. 배달원이 사무실 안의 인원을 보고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중국음식들이 탁자위에 놓여졌다. 류 현은 그중에서 자장면  그릇을 집어 들고 포장을 뜯으며 말했다.


“일단, 오늘 산 입구에서 만난  사람은 검성 나승하가 맞습니다.”

화련과 희란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이미 들었던 사실이지만 류 현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무게감이 달랐다. 두 사람의 시선에 그의 입으로 모였지만 류 현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고 해란을 쳐다보았다. 해란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말했다.

“자리..비켜드릴까요?”


남아서 뭐라도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녀도 자리 구분정도는 할 줄 아는 성인이었다. 류 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하면 말씀드릴 테니 일단 계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길어도 되니까. 처음부터 말해주셔도 되요. 너도 그렇지? 희란아.”

언제 다 비비기까지 했는지 열심히 자장면을 흡입하던 희란은 시선을 받자, 나쁜 일을 하다가 걸린 이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곤 눈망울이 그렁그렁 해지기 시작했다. 류 현은 픽 웃고는 말했다.

“드시면서 들으셔도 됩니다. 저도  먹고 이야기 해야겠네요.”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후루룩 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대충 급한 허기를 채울 정도로 먹고 난 후, 류 현은 슬며시 운을 띄웠다.

“검성과는 한 달 전쯤에 처음 만났습니다. 이젠 두 달이 다 되어가는군요. 그 당시 저는 적당한 던전을 탐색 중이었고, 그러다가 검성과 마주쳤습니다. 그녀도 혼자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사소한 오해가 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같이 던전을 들어가게 됐죠.”

사소하다고 할 때, 자신이 말하고도 웃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류 현은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했다. 어쩌겠는가, 유능한 동업자를 얻기 위해서는 감수하는 수밖에.

“던전을 나오고 나서 오해는 풀렸고, 그녀가 사과하는 의미에서 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서해란이 눈에 띄게 동요했지만 류 현은 못 본채 해주었다. 손을 털 생각이었다면 그녀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애초에  현에게 ‘검성 살해 모의 모임’의 존재를 알려주지도 않았을 테고.

 현이 서해란을 주시하고 있자, 아무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화련이 손을 번쩍 들더니 끼어들어왔다.

“오늘은 그럼 마스터가 그 부탁을 써서 부른 건가요?”
“아닙니다. 오늘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용잡이 팀 시험무대였고. 그녀는 자발적으로 온 겁니다.”
“왜요?”
“예정보다 훨씬 빨리 밝히게 돼서, 좀 뜬금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류 현은 턱을 긁적거리며 의도적으로 지체했다. 화련이 조바심에 재차 물으려던 순간 그가 선수를 치듯이 말했다.

“전 단순히 수익을 내기 위해서 용잡이 팀을 만든 게 아닙니다. 던전을 돌고, 괴수 사체를 팔고, 아티펙트를 찾아내서 팔거나 해서 이윤을 내는 것. 이게 용잡이 팀을 창설한 근본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거죠.”

해란과 희란이 합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플레이어 팀이나 길드에 그것 말고 다른 목적이 있단 말인가? 초기에야 답이 안 나오는 플레이어 생존율 때문에 살기 위해서 뭉쳤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초기 때 이야기다.

던전에 대한 정보가 쌓이고, 플레이어들의 평균 기량이 올라오면서 팀이나 길드의 목적은 보다 효율적인 이윤 추구가 되었다.

팀보다  길드의 경우에는 재계나 정계와 연합해서 권력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에는 그 또한 이익을 보기 위한 행동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니라니? 해란과 희란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화련만이 담담한 표정으로 류 현을 똑바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그런 그의 목적에 수혜를 입은 이였으니까. 그녀 또한 돈을 버는 것 이외의 목적으로 이 팀에 들어왔으니까. 류 현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제가 용잡이 팀을 창설한 이유는 보다 위로 가기 위해섭니다. 그린, 블루를 넘어서 퍼플블루. 그리고 퍼플까지. 존재한다면 그 이상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 가기 위해서,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팀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돈도  겁니다. 맨몸으로 던전에 갈 수도, 강해질 수도 없으니까요. 사냥 자체가 안 남는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두 분이 적정한 보수를 받을  있도록 노력 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주가 되진 않을 겁니다.  분께 아티펙트에 대한 우선권을 드린 것도 그런 의도를 반영한 거고요. 그러기 싫으시다면...다시 계약을 조율해야겠죠.”


그의 말이 대충 끝난 듯하자, 말없이 류 현의 말에 놀라기만 하던 희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 지금 이 얘기를 하시는 이유가 뭐죠?”
“원래는 시간을 들여서 두 분을 설득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희란과 화련이 합을 맞춰 고개를 갸웃했다. 외형은 극과 극을 달리면서 묘하게 자매 같은  사람의 모습에 류 현은 잠깐 실소했다.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자는 검성. 오늘 찾아온 건 그걸 저에게 알려주기 위해였고요.”

그의 말을 듣고  여자가 동시에 입을 반쯤 벌리고 말을 토하려는 순간, 류 현은 손을 내저어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검성에게 협력을 요청 받았습니다. 그녀가 제시한 유예 기한은 일 년.”

이어지는 그의 말에 세 여자는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현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전 수락했고, 우리 용잡이 팀은 일  안에 가칭 X던전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야 합니다.”
“일 년을 기다린 검성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마지막 말은 거의 농담조였지만 그게 농담이라고 생각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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