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화 〉탐식마(貪食魔) (30/429)



〈 30화 〉탐식마(貪食魔)

“한계라..솔플 한계는 쥐어짜낸 다고 가정하면 블루퍼플(남색)정도입니다. 멀쩡하게 나오는 건 솔직히 무리고..아마 클리어 후에 요양 좀 해야겠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만화 속이었다면 검성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을 정도로 당연한 물음이었다. 류 현은 머릿속 정리가 끝나자마자 다짜고짜 검성이 했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으니까. 류 현은 태연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  뿐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번 만남을 관계 정립의 기회로 삼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런 던전까지 먼저 공개하셨는데  정보는 숨기고 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관계가 성립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의 자신의 언행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지만 검성의 의구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걸 더 들어두는 게 그녀에게는 급했다.


애초에 그녀는 그렇게 의심을 의심으로 남겨두고 골머리 앓는 타입도 아니었다. 의심 가는 바를 정면으로 뚫어버리는 쪽이었지.


“그래? 난 좋지만. 그런데 벌써 블루퍼플 수준이라고? 와, 혜라 보다 빠르네.”
“퍼플 던전을 솔플 하시는 분이 이 정도로 감탄하셔도..”
“아냐, 아냐. 진짜로 감탄하고 있는 걸. 내가 각성  달 좀 넘겼을 때는 솔플은 커녕 검에 휘둘리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로 혜라를 추월해 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그 혜라 라는 분 실력이 상당한가 봅니다.”
“응? 뭐 그렇지. 예거즈 애들 중에서 블루 솔플 할 수 있는 녀석이...어디보자..다섯 정도 되나? 혜라도 그 안에 끼니까. 걔 또래 중에서는 아마 아예 없을 테고.”
“그 분 나이가..?”
“올해 열일곱이야.”
‘미친, 열일곱 살짜리 고딩이 블루 던전 솔플?’


류 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이가 적다고 나이가 많은 이보다 던전 사냥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젊고 어린 쪽이 배우기도 편하고 현역으로 오래 남는다. 어리다는  플러스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도 적정선이 있는 법이었다.


자기 피가 튀는 건 예사고 동료의 두개골 안도 심심찮게  수 있는 게 던전 사냥이다. 하위 던전에는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아직 말랑말랑한 자아를 가진 미성년자의 자아구현에 도움이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습게도 법적으로는 미성년자라도 플레이어라면 던전에 출입할  있지만, 플레이어 집단에서 미성년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꺼렸다. 해은처럼 빽이 있으면  모를까.


그 모든 걸 뚫고 실력을 증명한 어린 플레이어는 자연히 유명해 질  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블루 던전 솔로플레이가 가능한 플레이어는 정말 드물다. 거기에 미성년자라는 요소가 더해지면 길드에서 작정하고 숨겨도 정보가 조금씩 샐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류 현은 혜라 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이다.


‘설마 검성이 죽을 때 같이 죽은 건가?’

검성의 최측근이라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법도 하다. 검성만 죽여도 뒤처리가 부담될 텐데 거기에 어리고 재능 있는 플레이어 하나도 같이 죽였다고 광고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검성이 데려다 키우는 거라면 꽤 포텐 있다는 건데..’

 현은 기억 한 구석에 혜라 라는 이름을 적어두고, 대화를 되돌렸다.

“과연 예거즈의 인재풀은 대단하네요. 그런데  던전에 들어가실 겁니까?”
“응? 글쎄..? 말은 두 달이라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는 답이 안 나올  같거든. 제대로 몸 움직인 지도 오래 됐고. 음...최소   정도 준비해야하지 않을까? 조력자가 없으면 그것도 힘들 거 같지만.  전에 발각될  같기도 하고. 들키기 전에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데 결과가 너무 뻔 하잖아?”


블랙 던전을 숨겨두고 몰래 사냥하려던 검성의 속내를 듣자,  현은 다시 떨떠름해졌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전생에서 그놈들이 굳이 죽이려고 안 들었어도 던전 사냥 중에 죽었을 수도 있겠군.’


검성의 던전에 대한 집착에 소름 돋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집착하는지 알게 되니 더욱 소름이 돋았다.

‘미쳐서 영웅이 된 건지. 영웅이 돼서 미쳐버린 건지.’

사명감과 재미. 그것이 검성을 움직이는 두 다리였다.

‘던전이랑 부딪히는 게 재미있다니 진짜 이 인간은 진성 또라이야.’


검성의 머릿속에서 던전은 금광이 아니라 미지의 저편으로 건너가는 다리였다. 그러니 퍼플 이상의 던전이 발견 되었는데도 리스크도 가늠 하지 않고, 저렇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퍼플던전 이상의 던전이 없다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가 길을 찾은 느낌일 테니까.


전생에서는 던전이라는 다리를 금광취급하며 수익 올리는 데 열을 올리는 분위기와 예거즈 창립멤버였던 동료들의 죽음, 퍼플 던전 이상의 던전이 없다는 현실의 벽이 그녀에게서 의욕을 앗아갔을 것이다.

그래서 류 현이라는 무소속 솔로 플레이어를 만났을 때 그런 기행을 감행했던 거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 솔로 플레이어가 동류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검성은 자신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그가 던전을 금광으로 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 또한 그녀의 감에 기반한 추측이었지만 검성에게 있어서는 그건 기정사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새로운 상위 던전을 발견하고 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것도  때문이었다. 검성은 ‘동지’가 그 던전을 보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었던 것이다.

그녀의 속내를 대강 짐작하는  현은 맞춰주는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어떻게  게 내가 아는 플레이어 놈들 중에선 정상이 없는 거지? 청뢰 수준의 아티펙트도 없으면서 블랙 던전을 들어가겠다니 진짜 미쳤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말이더라도 말이다.


“일 년.”
“응? 뭐라구?”
“일 년 정도 후면 그 던전에 같이 들어가 드릴  있습니다.”
“어, 진짜?”

검성은 눈에 띄게 놀랐다가 곧바로 화색이 되었다. 보통의 던전이라면 일 년 후를 기약한다는  그냥  들어가겠다는 이야기지만 블랙 이상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블랙과 화이트 던전은 자체적인 시간제한이 없다.

‘네임드 몹이 나타나야 터지지.’

3차 대소환 이후, 류 현이 네임드 몹과의 싸움으로 바쁜 와중에 굳이 블랙과 화이트 던전을 들락거린 이유였다. 그  종류의 던전은 네임드 몹의 등장에 호응해서 괴수를 쏟아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네임드 몹인데,  보다 수준이 낮다고는 해도 다수의 괴수가 나타나면 상대하기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무엇보다 그가 네임드 몹과 싸우는 동안 잔챙이들 때문에 인류가 가진 기반이 초토화 되는 게 아팠다.

현 시점에서 류 현은 이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예, 양쪽 기둥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잖습니까. 시간되면 터지는 던전이 아니라 일정 조건이 성립해야 열리는 쪽 같더군요.”


던전의 양 옆에 존재하는 바위기둥은 장식이 아니다. 그 기둥들에는 던전이 괴수를 쏟아낼 때 까지 남은 시간이나, 출입제한 인원들이 표시되어있다.

물론, 자세한 수치가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출입 가능 인원만큼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빛이 천천히 차는 식으로 남은 시간을 알게 해준다.

류 현과 검성이 보고 온 블랙 던전의 주변에 서있는 기둥에는 그런 표시가 없었다.

“응, 퍼플 던전이 처음 나타났을 때도 그랬으니까.”

최초의 퍼플 던전을 클리어한 경험이 있는 검성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도 던전 주변의 기둥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고, 조건이 갖춰지기 전에는 반년이고,  년이고 던전은 침묵했었다. 마치 인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등장한 위협인 것처럼. 그녀가 예거즈의 정예들을 이끌고 퍼플 던전에 들어서기 전까지 말이다.


 한 번의 도전으로 퍼플 던전은 클로즈 되었고, 그들은 영영  조건이 뭔지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간간히 등장한 퍼플 던전은 다른 던전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이니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검성은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자신은 연구자가 아닐뿐더러, 던전이 터져서 괴수가 튀어나온다면 아쉽긴 하겠지만, 승산도 없는 싸움에 목숨을 내걸 정도로 절박한  아니니까.


검성에게는 그의 수락을 받아내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그가 자신과 동류라는 의미였으니까. 보통은 저런 식으로 시간제한을 걸고 가겠다는 공약조차 내걸지 않을 것이다. 뺄 거라면 더 확실하게 뺐겠지.


거기다가, 류 현이 자신의 공약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점도 신뢰성을 더해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는 성장이 멈추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못해도 퍼플 던전은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 될  같았으니까. 검성이 느끼기에는 그는 진심이었다.

검성은 희망 속에서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정말로 같이 가줄 거야?”
“예,   뒤에도 그 던전이 안 터졌다면요. 꼭  던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긴 합니다만. 그 전까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으시겠다면야.”
“좋아. 어차피 나도 준비 기간은 필요하고 그 동안 분명히 발각될 테니까. 들어가고 싶어도, 아마 예거즈 애들이 뜯어말릴 걸. 간만에 빡세게 수련 하겠네.”

그리고 류 현 또한 정말로 같이 들어가 준 다기보다도, 그런 의사를 전달하는 쪽에 중심을 두었다.


일 년 뒤라면 블랙 던전 솔플도  볼만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생각 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에 이미 큰 금이 갔다. 당장 내일 모레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일 년 후를 기약한다는 건 농담조차 되지 못한다.

‘가능성은 낮겠지만, 당신이 갑자기 거기 들어가서 죽으면 곤란해.’

전우까지는 아니어도 동업자 정도의 관계는 맺기로 결심한 상대다. 보통은 이렇게 달래놓을 필요도 없겠지만, 류 현은 검성의 행동을 가늠하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녀는 그가 만나  어떤 인간과도 다른 행동 지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되도록 확실한 약속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


‘에휴..그래, 그래도 뒤에서 칼 박을 각 노리는 놈들 보다는 물가에 내놓은 애 쪽이 낫지.’


 현이 속으로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을 하고 있는 줄은 알 턱이 없는 검성은 바쁘게 휴대폰을 매만지더니 어디론 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응, 혜라야. 응응. 어?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잠깐 나올  있어? 그  그 카페. 누구 같이 있냐고? 있어, 있어. 저번에 말한 솔플러 있잖아. 올 거지? 응, 알았어.”

류 현이 멀거니 그녀를 보고 있자, 통화를 끝마친 검성이 말했다.


“혜라 불렀어. 최대한 빨리 오겠데.”
“예..?”
“응? 같이 던전 가주기로 했잖아? 그럼 동료지. 안면 트고, 같이 밥 먹고, 훈련도 도와주고. 그러는 거잖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혜라 소개 시켜줄게.”

협조를 동료 관계로 해석해버리는 검성의 대범함에는 그도 헛웃음 짓는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