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탐식마(貪食魔)
전생에서 류 현은 도무지 편하게 강해질 기회가 없었다. 그가 각성한 건 2040년 무렵. 2차 대소환이 끄트머리에 달하고, 3차 대소환을 코앞에 두었을 시점이었다.
그가 플레이어로 각성한 계기는 앓아누운 누나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서 뛰었던 짐꾼 일을 하면서였다. 플레이어가 된 이후에는 한 동안 자신의 능력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남들처럼 원정대에 끼여 다녔었다.
당연히 괴수 사체에 입을 대는 건 꿈도 못 꿨었다. 혹여 알고 있었더라도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류 현이 각성했을 무렵에는 류세아는 실명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으니까.
그 때 류 현에게 가장 급한 건 세아의 치료에 쓸 돈이었고, 미래를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그게 당연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알았더라도 그는 괴수의 사체를 먹는 대신 팔았을 것이다.
류 현이 자신의 능력을 대강 인지하고, 자신의 힘을 키우기 시작한 건 2040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3차 대소환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왔던 그 시기였다. 명백한 재앙의 전조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사회 분위기와 반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류 현을 엄습했고,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괴수를 먹어치웠다.
그렇게 1년여 가 좀 더 지난 2042년. 3차 대소환이 일어났다.
3차 대소환은 던전에 관한 상식들을 부숴놓았다. 퍼플미만의 던전들이 유예기간 없이 괴수를 쏟아내었다. 던전이 아닌 현실세계에 플레이어들이 느낄 정도로 짙은 농도의 마력이 흩뿌려졌다. 일각에서는 그것들이 던전과 현실세계가 합쳐진 증거라고 했다.
그 외에도 네임드 몹의 등장 등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최상위 던전이라고 알려진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이 등장 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등급을 알 수 없었던, 들어가지도 못하는 던전들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자기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이 등장한 것으로 알았다.
검성의 뒤를 이은 퍼플 던전 슬레이어들을 연이어 배출하고 대소환을 정복했다고 자신만만해 있었던 인류였다. 당황스러움은 당연한 것 이었고, 그들은 곧 미지의 영역을 정복해줄 영웅의 등장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미지의 정복자를 자처하며 수많은 미래의 군벌과 길드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는 기회로 삼았다. 류 현 또 한 그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는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인 블랙과 화이트 던전을 돌아본 경험이 있었다. 하위 던전 보다 퍼플이상의 던전을 돈 경험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런 류 현의 감각은 눈앞에 있는 던전이 빼도 박도 못하게 확실한 블랙 던전 이라고 고하고 있었다.
‘블랙 던전 이라고...? 대체 왜..? 아직 3차 대소환 까지 6년은 남았다. 왜 지금 열린 거지? 뭐가 바뀌었다고? 내가 놓친 큰 사건이라도 있나?’
이마를 부여잡고 골몰하고 있는 류 현을 이리저리 살피던 검성이 한마디 했다.
“같이 들어가 볼래?”
“미쳤습니까!”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에 끓는 물을 들이붓는 발언이 들려오자 류 현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는 아차 했지만,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검성을 보고는 맥이 풀렸다.
“..죄송합니다. 좀 놀라서요.”
“괜찮아, 괜찮아. 이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했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테니까.”
블랙 던전을 눈앞에 두고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생글거리는 검성을 바라보며 류 현은 생각했다.
‘나를 왜 데리고 온 거지?’
미래를 알고 있는 류 현이야 블랙 던전이 열렸다는 사실에 머리를 부여잡겠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검성에게는 트렌드를 선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혹은 블랙 던전에 반강제로 투입될 상황을 우려해서 존재를 감출 수도 있을 것이다.
류 현이 알기로 현재 던전 감지망에는 옐로우 이하 하위 던전과 마찬가지로 블랙 던전도 감지되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터주’같은 던전 관리과가 아니라 검성이 감으로 먼저 찾은 것만 봐도 블랙 던전을 감지할 방법이 없는 게 확실하다.
정말 그녀는 자신을 동류라고 여기고 이런 비밀을 보여준 것일까? 자신이 내놓은 답이었지만 류 현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안고 멀거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서 검성이 말했다.
“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 괜찮지?”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화낼 거 알지만 묻겠는데, 지금 한계가 어느 정도야? 저번에 보니까 그린은 문제없이 혼자 돌 거 같던데.”
갑자기 날아온 직구에 콜라로 속을 식히던 류 현이 얼굴이 확 구겨졌다. 류 현은 그대로 콜라를 원샷하고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검성의 표정은 전혀 변함없이 웃는 낯이었지만.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화내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됩니까?”
“으음, 좀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가게가 부서지면 주인장이 곤란해 하지 않을까? 배상은 하겠지만.”
류 현은 검성의 대꾸에 그만 맥이 빠져버렸다. 아마 가게를 대절한 후에 싹 비워서 대화 장소를 마련한 정도가 그녀의 한계일 것이다. 그는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건 왜 궁금하신 겁니까? 우리 좀 진지한 이야기하러 여기 온 거 아니었습니까?”
“응? 맞는데?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야 날짜를 정할 거 아냐?”
검성이 말하는 날짜가 무슨 날짜인지 알 것 같았지만 류 현은 다시 한 번 더 묻기로 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희망을 담아서.
“..무슨 날짜 말입니까?”
“그거야 아까 그 던전..”
“안 갑니다.”
“응?”
“무슨 천재지변이 있어도 그 안에는 안 갑니다. 반 년 이내에는 거기 근처도 안 갈 겁니다.”
류 현은 최대한 정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검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재차 물었다.
“진짜 안 갈 거야?”
“예.”
“같이 가면 재미있을 텐데...”
“...던전이 무슨 놀이 동산인 줄 아십니까?”
던전 안에 있는 괴수를 밥 먹듯이 씹어 먹는 류 현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는 진심을 담아서 물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검성은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놀이동산이 아니니까 재미있는 거잖아? 아니야?”
“전혀 아닙니다.”
“그래?”
“명백히, 확실하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아닙니다.”
“칫, 그냥 그렇다고 맞장구 쳐주면 어디 덧나나.”
류 현은 재차 검성 정신병자 설을 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런 나사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틀에서 튀어나온 인간이 영웅 취급을 받았었다니. 공명심 따위와는 담을 쌓은 류 현마저 억울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검성을 내팽겨 쳐두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류 현은 빨대로 당근 쥬스에 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블..아니 그 던전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저도 모르게 블랙이라고 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수습할 수 있었다. 검성은 한참이나 빨대로 당근 쥬스를 더 부글거린 후에 입을 떼었다.
“음, 한 두 달 쯤 열심히 수련해서 부딪혀보면?”
“안됩니다.”
류 현이 단칼에 말을 자르자 검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의 단호한 표정에 맞서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렸다.
“..같이 가줄 것도 아니면서.”
“잊으신 모양이신데, 전 각성한 지 세 달도 안 된 뉴비 입니다.”
“세 달 차에 그린 던전 솔플 하는 뉴비가 있다고 하면 전부 날 미친년 취급할 걸.”
“후우,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 때 빚 대신으로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실 겁니까?”
“응? 갑자기 왜 그래?”
그의 급격한 태도 변화에 검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전만 해도 찬바람이 쌩하고 불던 이가 지금은 적극적으로 그녀의 안위를 위해서 그녀를 뜯어말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류 현은 진심이었다.
‘판이 바뀌었다.’
류 현은 자신에 대한 검성의 태도에서 자신이 이미 변화를 일으켰다는 걸 깨달았다. 블랙 던전의 발견이 결정타였다.
모르긴 몰라도 눈앞의 검성은 그가 아는 전생처럼 의욕 없이 칩거하다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봐도 지금의 그녀는 의욕과잉처럼 보였으니까. 저 과잉된 의욕으로 최소한 거대한 변화를 한 번 더 일으키고 죽겠지. 아니, 블랙 던전을 그녀가 혼자서 발견했으니 이미 큰 변화의 물결에 한 발 담근 셈이다.
거기다가 ‘검성 살해 모의 모임’ 때문에 이 시기에는 짐꾼조차 아니었던 류 현이 플레이어계에서 알아주는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디까지 영향을 끼쳤는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또 다른 변수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결과 블랙 던전이 이전보다 6년 빠르게 열렸다. 그게 무슨 전조인지는 그조차 알 수 가 없다. 분명한 건 그렇게 좋은 일의 전조는 아닐 거라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는 결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판이 흔들리는 데 손 놓고 멍 때리고 있는 건 등신짓이지.’
생각을 하지 않을 지언정 멈춰서는 것에는 취미가 없는 이였다. 그리 생각하자 시야가 확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쁘지 않은 느낌에 류 현은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의 관계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정립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성격이 조금 골 때리지만 그걸 커버할 정도의 강함과 그에 대한 호감을 가진 대상이 코앞에 있었다. 어차피 변한 미래라면 죽었어야 할 규격외의 괴물이 살아남아 일으킬 변화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터.
‘당신은 살아줘야겠어. 예거즈, 터주, 산군. 세 곳 다 쓸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어차피 그 놈들은 있어봐야 도와주는 척하면서 칼 꽂을 궁리 밖에 안할 테니까. 엉터리 선동꾼들보다 영웅이 내 뒷배인 게 움직이기는 데는 낫겠지.’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검성은 류 현의 태도 변화에 그저 갸우뚱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