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탐식마(貪食魔)
“마스터, 그런데 서해란 씨가 우리 스폰서면 우리도 태양그룹이랑 거래하는 거에요?”
“태양그룹이요?”
자그마한 여자가 자신의 몸집만한 배낭을 메고 통통 뛰면서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명백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화련은 그런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 모르세요?”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습니다만.”
“서해란 씨, 태양그룹 오너가 장녀에요.”
“예?”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며 류 현이 되물었지만, 돌아온 건 화련의 황당하다는 반응 이었다.
“아니 그걸 모르시면서 스폰서로 삼으신 거에요? 전 알고 스폰서 삼으신 줄 알았는데.”
류 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제일 후미에서 따라오고 있던 서해란을 돌아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서해란은 쓴웃음만 지었다. 류 현은 다시 시선을 화련에게로 돌렸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산군’에 잠깐 있었을 때 들었어요. 연차 제법 된 플레이어들도 대충은 알고 있을 거에요.”
“나 원...”
전혀 몰랐었던 사실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서해란과 첫 대면이 첫 대결이 되어 버렸었고, 양측이 암묵적으로 주변을 건드리지 않기로 동의한 상태였기에 뒷조사를 할 생각조차 안했었다.
현재는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고민 중 이었고.
말이 스폰서지 유보상태나 다름없었다. 당장 손을 뻗을만한 다른 스폰서 후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이러고 있을 뿐.
‘부잣집 금지옥엽이라서 억 단위로 턱턱 내놓고 더 줄 수 있다고 한 건가. 어쩐지 나 같은 뉴비한테 막 던진다 싶더라니.’
‘태양그룹이라...’
류 현도 몇 번 들어서 아는 이름이다. 그룹 자산 규모가 한국에서 몇 번째니 하는 건 몰라도, 그들이 히트친 플레이어 상품정도는 대강 기억하고 있다.
‘히트 상품 만든 본인들한테 내가 되팔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나 포션이다. 그림자 두꺼비의 독을 해독해서 만든 마나 포션이 태양그룹의 대표적인 히트상품 중 하나였다. 없어서 못 파는 정도가 아니라, 그림자 두꺼비 외의 다른 독을 재료로 만든 다운 그레이드 상품마저 재고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그림자 두꺼비의 가공방법을 아는 건 지금 한 사람 밖에 없다.
‘좀 사기 치는 기분이지만, 굳이 길이 있는데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서해란 씨.”
“네에,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류 현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손해 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빨리 생산해서 꿀 빨면 저쪽도 이득이지. 암, 그렇지.’
“거래하고 싶은 품목이 있어서요. 서해란 씨가 다리역할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사기를 친다는 꺼림칙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미소였다.
***
“마, 마스터. 아직도 있는데요.”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열심히 해란에게 마나 포션 레서피를 세일즈 중이었던 류 현은 화련의 말에 시선을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갔다가, 곧바로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해란이 흠칫 할 정도로 신속한 표정 변화였다.
산 입구에 놓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검성은 화련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는지, 일어서서 손을 흔들어대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해란의 표정은 박제처럼 굳었고,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그의 팀원들의 표정도 굳어 들어갔다.
‘전생에 사람 잡았다고 지금 벌 받는 건가.’
검성이 바위를 폴짝 뛰어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류 현은 한탄했다. 해가 중천에 떴다가 이제 석양이 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히죽 웃으면서 달음박질 쳐왔다.
‘대체 쟤는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아니, 현시점에서 내가 쟤한테 줄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류 현이 고민하는 사이에 그의 골칫덩어리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네. 그린 던전 간다고 하길래, 난 여기서 야영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그 때는 빼느라 실력을 숨긴 거였어?”
“납치당한 거랑 별 다를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제 실력 다 발휘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죠.”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 자금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 산통이 깨지자 짜증을 부린 것이었다. 아차, 했지만 류 현은 굳이 말을 주워 담으려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정체를 아는 해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 미안. 그 땐 신경도 날카롭고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다고 생각해서 흥분했었어. 괜찮으면 그것도 빚으로 달아놔도 되는데?”
“됐습니다. 그거 핑계대고 귀찮게 구시려고요?”
“귀찮게 군다니 너무 매정하네. 내가 찾아오는 게 그렇게 민폐야?”
“예, 민폐입니다.”
“윽,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알맹이 없는 대화가 지속될 기미가 계속 보이자 류 현은 별 수 없이 다시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편에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팀원과 이제 막 거래를 시작하려는 고객이 있었으니까.
“진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저랑 농담 따먹기 하려고 오셨습니까?”
“그것도 좋겠지만 나라고 그렇게 할 일 없진 않아.”
검성은 류 현의 뒤편에 서있는 일행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서서 할 얘기는 아니고.”
“......”
의도가 명백한 검성의 눈짓에 류 현도 뒤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도 검성의 의도를 읽었는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화련 이었다.
“마스터, 사무실 가서 정리해놓고 있을 테니까. 볼 일 보고 오세요. 와이번 심장은 냉동실 맞죠?”
“미안하지만 좀 부탁드립니다. 정리 끝나시면 오늘은 이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훈련은...오늘은 되도록 쉬도록 하시구요. 출근은 내일 모레부터 하시면 됩니다. 정식 정산은 내일 모레 출근할 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알겠어요. 희란아? 가자.”
류 현이 상대하고 있는 이가 검성인 줄 꿈에도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화련은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멍하니 있던 희란을 챙겼다. 희란을 반쯤 끌고 가듯 화련이 퇴장을 선언하자 서해란이 덧붙이듯이 말했다.
“전 사무실까지 두 분을 태워다 드려야겠네요. 방금 전에 말씀해주셨던 건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곧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섬전 같은 퇴장이었다. 순식간에 단 둘이 남게 된 류 현과 검성은 서로 상반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검성은 아까 전부터 짓고 있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고, 류 현은 똥 씹은 표정이 굳은 표정 정도로 순화된 상태였다.
검성에게도 최소한의 눈치 정도는 있는지 류 현이 짜증을 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걸으면서 이야기 할까?”
“제가 거기에 왜 가야하는지부터 설명해 주시죠.”
“흐음, 역시 곤란한데. 같이 가주지 않으면 이야기 해줄 수 없어.”
말이 안 통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류 현은 듣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 뒤 그냥 가버릴까 하고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가 검성에게 틱틱 거릴 때마다 하얗게 질리던 해란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차를 돌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분위기는 다 조성해놓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서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팀원들에게 해명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덮어놓고 가자고 하는 거에 따라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응, 응. 그럴게.”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검성은 연신 웃으며 고개를 아래위로 붕붕 휘둘렀다. 류 현은 이전 생에서 검성이 정신병 때문에 공격당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인상적인 외모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온도차였다.
허락을 얻은 검성은 타닥타닥하고 박자까지 맞춰가면서 뛰어갔다. 물론 플레이어 중에서도 육체능력이 뛰어난 그녀의 ‘타닥타닥’은 거의 몇 분 만에 산을 넘을 기세였다. 류 현 또한 신체능력이 높은 편이기에 문제없이 따라붙었다.
두 번째 산을 넘었을 무렵 검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엊그제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을 찾았어. 아니다, 닫혀있던 게 열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뭐라고요?”
류 현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검성도 류 현이 멈춰 설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멈춰 섰다. 검성의 얼굴에는 아까 전보다 짙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듯 했다. 류 현은 검성 정신병자설이 강고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산 두 개만 더 넘으면 거기야. 보러 갈 거야?”
여기까지 끌고 와서 무슨 소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류 현은 그 말을 삼켰다. 검성의 표정에서 그녀를 의도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류 현이 동지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류 현은 검성이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솔플러 라는 것에 왜 집착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무런 물증도 없는 감에 기반을 둔 추측일 뿐이지만, 적어도 틀린 답은 아닐 것 같았다.
류 현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기로 했다. 자신도 원하는 답이었으니까.
“예, 갑시다.”
“좋아.”
두 개의 인영이 화살처럼 석양이 부서지는 산등성이를 내달렸다.
***
“미친...”
“아하하, 나랑 반응이 똑같네.”
“씨발.”
욕설을 주워 삼기는 남자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여자의 앞에는 그들의 상황과는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땅을 받치는 열주처럼 서있는 한 쌍의 바위와 그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빛 무리. 대소환 전이라면 세계의 신비라고 꼽혔을 풍경이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존재하고 있는 던전은 다른 던전과는 전혀 달랐다. 보통의 던전 근처에서는 예민한 사람이라면 플레이어가 아니더라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던전은 위화감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던전에서 끊임없이 내뿜어지고 있는 위압감! 던전을 중심으로 사방 500미터 내에는 벌레소리 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그런 플레이어를 데려다 놓는다면 줄행랑을 치거나 거품을 물고 기절하리라. 류 현은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폐부를 짓누르는 듯 한 감각을 떨쳐내며 물었다.
“엊그제 찾으셨다고 하셨습니까?”
“응. 개인 수련 실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느낌이 팍 하고 오더라고. 뛰어나와서 느낌가는 대로 와보니까, 이게 있더라고.”
“맙소사..”
검성이 반 장난조로 지껄이는 말은 이미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류 현은 눈을 감고 달려오면서 수 십 번을 반복했던 계산을 다시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놓은 결론을 부정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블랙이 열리는 건 분명히 3차 대소환 이후였어! 진행이..6년 이상 빠르다. 젠장, 대체 뭣 때문에..’
이전 생에서 그가 3차 대소환 이후 대면했던 블랙 던전이 그가 아는 미래보다 6년 빨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