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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탐식마(貪食魔) (28/429)



〈 28화 〉탐식마(貪食魔)

“마스터, 그런데 서해란 씨가 우리 스폰서면 우리도 태양그룹이랑 거래하는 거에요?”
“태양그룹이요?”

자그마한 여자가 자신의 몸집만한 배낭을 메고 통통 뛰면서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명백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고, 화련은 그런 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 모르세요?”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습니다만.”
“서해란 씨, 태양그룹 오너가 장녀에요.”
“예?”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며 류 현이 되물었지만, 돌아온 건 화련의 황당하다는 반응 이었다.


“아니 그걸 모르시면서 스폰서로 삼으신 거에요?  알고 스폰서 삼으신 줄 알았는데.”


류 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제일 후미에서 따라오고 있던 서해란을 돌아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서해란은 쓴웃음만 지었다. 류 현은 다시 시선을 화련에게로 돌렸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산군’에 잠깐 있었을 때 들었어요. 연차 제법 된 플레이어들도 대충은 알고 있을 거에요.”
“나 원...”

전혀 몰랐었던 사실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서해란과 첫 대면이  대결이 되어 버렸었고, 양측이 암묵적으로 주변을 건드리지 않기로 동의한 상태였기에 뒷조사를 할 생각조차 안했었다.
현재는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고민  이었고.

말이 스폰서지 유보상태나 다름없었다. 당장 손을 뻗을만한 다른 스폰서 후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이러고 있을 뿐.

‘부잣집 금지옥엽이라서 억 단위로 턱턱 내놓고  줄 수 있다고 한 건가. 어쩐지 나 같은 뉴비한테 막 던진다 싶더라니.’
‘태양그룹이라...’


류 현도  번 들어서 아는 이름이다. 그룹 자산 규모가 한국에서 몇 번째니 하는 건 몰라도, 그들이 히트친 플레이어 상품정도는 대강 기억하고 있다.


‘히트 상품 만든 본인들한테 내가 되팔게  줄은 몰랐지만.’

마나 포션이다. 그림자 두꺼비의 독을 해독해서 만든 마나 포션이 태양그룹의 대표적인 히트상품 중 하나였다. 없어서 못 파는 정도가 아니라, 그림자 두꺼비 외의 다른 독을 재료로 만든 다운 그레이드 상품마저 재고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그림자 두꺼비의 가공방법을 아는 건 지금 한 사람 밖에 없다.


‘좀 사기 치는 기분이지만, 굳이 길이 있는데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지.’

“서해란 씨.”
“네에,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류 현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손해 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빨리 생산해서 꿀 빨면 저쪽도 이득이지. 암, 그렇지.’

“거래하고 싶은 품목이 있어서요. 서해란 씨가 다리역할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사기를 친다는 꺼림칙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미소였다.


***

“마, 마스터. 아직도 있는데요.”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열심히 해란에게 마나 포션 레서피를 세일즈 중이었던  현은 화련의 말에 시선을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갔다가, 곧바로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해란이 흠칫 할 정도로 신속한 표정 변화였다.


 입구에 놓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검성은 화련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는지, 일어서서 손을 흔들어대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 해란의 표정은 박제처럼 굳었고,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그의 팀원들의 표정도 굳어 들어갔다.


‘전생에 사람 잡았다고 지금 벌 받는 건가.’


검성이 바위를 폴짝 뛰어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현은 한탄했다. 해가 중천에 떴다가 이제 석양이 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히죽 웃으면서 달음박질 쳐왔다.

‘대체 쟤는 나한테 바라는  뭐야? 아니, 현시점에서 내가 쟤한테 줄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류 현이 고민하는 사이에 그의 골칫덩어리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네. 그린 던전 간다고 하길래, 난 여기서 야영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그 때는 빼느라 실력을 숨긴 거였어?”
“납치당한 거랑 별 다를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제 실력  발휘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죠.”

 현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 자금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 산통이 깨지자 짜증을 부린 것이었다. 아차, 했지만 류 현은 굳이 말을 주워 담으려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정체를 아는 해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 미안. 그 땐 신경도 날카롭고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다고 생각해서 흥분했었어. 괜찮으면 그것도 빚으로 달아놔도 되는데?”
“됐습니다. 그거 핑계대고 귀찮게 구시려고요?”
“귀찮게 군다니 너무 매정하네. 내가 찾아오는 게 그렇게 민폐야?”
“예, 민폐입니다.”
“윽, 사람   없게 만드네.”

알맹이 없는 대화가 지속될 기미가 계속 보이자 류 현은 별  없이 다시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편에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팀원과 이제 막 거래를 시작하려는 고객이 있었으니까.

“진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저랑 농담 따먹기 하려고 오셨습니까?”
“그것도 좋겠지만 나라고 그렇게  일 없진 않아.”

검성은 류 현의 뒤편에 서있는 일행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서서 할 얘기는 아니고.”
“......”

의도가 명백한 검성의 눈짓에 류 현도 뒤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도 검성의 의도를 읽었는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화련 이었다.

“마스터, 사무실 가서 정리해놓고 있을 테니까. 볼 일 보고 오세요. 와이번 심장은 냉동실 맞죠?”
“미안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정리 끝나시면 오늘은 이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훈련은...오늘은 되도록 쉬도록 하시구요. 출근은 내일 모레부터 하시면 됩니다. 정식 정산은 내일 모레 출근할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알겠어요. 희란아? 가자.”


 현이 상대하고 있는 이가 검성인  꿈에도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한 화련은 재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멍하니 있던 희란을 챙겼다. 희란을 반쯤 끌고 가듯 화련이 퇴장을 선언하자 서해란이 덧붙이듯이 말했다.


“전 사무실까지 두 분을 태워다 드려야겠네요. 방금 전에 말씀해주셨던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있을 것 같네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섬전 같은 퇴장이었다. 순식간에  둘이 남게 된 류 현과 검성은 서로 상반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검성은 아까 전부터 짓고 있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고, 류 현은 똥 씹은 표정이 굳은 표정 정도로 순화된 상태였다.


검성에게도 최소한의 눈치 정도는 있는지 류 현이 짜증을 내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야  곳이 있는데 걸으면서 이야기 할까?”
“제가 거기에 왜 가야하는지부터 설명해 주시죠.”
“흐음, 역시 곤란한데. 같이 가주지 않으면 이야기 해줄  없어.”


말이  통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현은 듣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 뒤 그냥 가버릴까 하고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가 검성에게 틱틱 거릴 때마다 하얗게 질리던 해란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차를 돌리게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분위기는 다 조성해놓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서는  내키지가 않았다. 팀원들에게 해명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덮어놓고 가자고 하는 거에 따라주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응, 응. 그럴게.”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검성은 연신 웃으며 고개를 아래위로 붕붕 휘둘렀다. 류 현은 이전 생에서 검성이 정신병 때문에 공격당한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인상적인 외모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온도차였다.

허락을 얻은 검성은 타닥타닥하고 박자까지 맞춰가면서 뛰어갔다. 물론 플레이어 중에서도 육체능력이 뛰어난 그녀의 ‘타닥타닥’은 거의 몇 분 만에 산을 넘을 기세였다. 류  또한 신체능력이 높은 편이기에 문제없이 따라붙었다.


두 번째 산을 넘었을 무렵 검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엊그제 퍼플 던전의 상위 던전을 찾았어. 아니다, 닫혀있던 게 열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뭐라고요?”

 현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검성도 류 현이 멈춰 설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멈춰 섰다. 검성의 얼굴에는 아까 전보다 짙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했다.  현은 검성 정신병자설이 강고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산 두 개만  넘으면 거기야. 보러  거야?”


여기까지 끌고 와서 무슨 소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현은 그 말을 삼켰다. 검성의 표정에서 그녀를 의도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현이 동지라는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류 현은 검성이 처음 만났을  그가 솔플러 라는 것에 왜 집착했는지 이제 알  같았다. 아무런 물증도 없는 감에 기반을 둔 추측일 뿐이지만, 적어도 틀린 답은 아닐  같았다.


류 현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기로 했다. 자신도 원하는 답이었으니까.


“예, 갑시다.”
“좋아.”


두 개의 인영이 화살처럼 석양이 부서지는 산등성이를 내달렸다.

***


“미친...”
“아하하, 나랑 반응이 똑같네.”
“씨발.”

욕설을 주워 삼기는 남자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여자의 앞에는 그들의 상황과는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땅을 받치는 열주처럼 서있는  쌍의 바위와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빛 무리. 대소환 전이라면 세계의 신비라고 꼽혔을 풍경이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존재하고 있는 던전은 다른 던전과는 전혀 달랐다. 보통의 던전 근처에서는 예민한 사람이라면 플레이어가 아니더라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던전은 위화감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던전에서 끊임없이 내뿜어지고 있는 위압감! 던전을 중심으로 사방 500미터 내에는 벌레소리 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그런 플레이어를 데려다 놓는다면 줄행랑을 치거나 거품을 물고 기절하리라. 류 현은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폐부를 짓누르는 듯 한 감각을 떨쳐내며 물었다.

“엊그제 찾으셨다고 하셨습니까?”
“응. 개인 수련 실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느낌이 팍 하고 오더라고. 뛰어나와서 느낌가는 대로 와보니까, 이게 있더라고.”
“맙소사..”


검성이 반 장난조로 지껄이는 말은 이미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현은 눈을 감고 달려오면서  십 번을 반복했던 계산을 다시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놓은 결론을 부정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블랙이 열리는  분명히 3차 대소환 이후였어! 진행이..6년 이상 빠르다. 젠장, 대체 뭣 때문에..’

이전 생에서 그가 3차 대소환 이후 대면했던 블랙 던전이 그가 아는 미래보다 6년 빨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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