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탐식마(貪食魔) (27/429)



〈 27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현의 등을 봤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퍼져있는 희란의 창백한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 새 깜빡 잠들었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화련은 뭔가 결심했는지 혼자 끄덕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련이 바로 뒤까지 접근했지만 류 현은 돌아보지 않고 와이번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피와 심장을 빼두었기에 피 냄새와 내장 냄새가 진동했지만, 이미 보스몹까지 고꾸라진 시점에서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화련은 몇 번 머뭇거린 끝에 그를 불렀다.

“저기요. 마스터.”
“예, 말씀하십쇼.”

류 현은 여전히 작은 손칼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류 현이 돌아볼 기색이 없자 화련은 작게 볼을 부풀린 후에 말했다.

“제가 도울  없어요?”
“없습니다.”

아주 단칼이었다. 이렇게 단칼에 말을 자를 줄은 몰랐기에 화련은 입을  번 뻐끔거린 후에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필요하긴 해요?”
“예?”

 현이 돌아앉았다. 와이번을 잡고 나서 대충 피를 씻어내긴 했지만 여기저기 피딱지가 남아있어 꽤나 험악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못들을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  해지자 험악하다 못해 괴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화련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 아니 그게 그렇잖아요..마스터는 혼자서 와이번도 때려잡고 그러는 데 우리는 둘이 합쳐서 일반몹도 겨우겨우 잡고..수준 차이가 너무 나잖아요. 희란이는 초보긴 하지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희란 씨는 각성한지 아직 한 달 차도 안됐고, 화련 씨도 벽 뚫은 지 한 달도 안됐고. 저번에 그러셨잖습니까. 각성 직후랑 그 이후 벽 뚫기 전 2년이랑 숙련도 빼고는 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그러고 나서 2주 됐으니까. 당연한 겁니다.”
“..마스터도 각성한 지 두 달 좀 넘은 정도잖아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전 특이 케이스고요. 이상한 바람 들까봐 얘기 안했지만, 두 분 다 성장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아마 대형 길드 찾아가서 두 분 성장 속도 얘기하면  미친놈 취급받을 겁니다.”
“이상한 바람이라니, 누가 사춘기 애인가.”
“하는 행동이 딱히 차이가 안 나서요.”
“뭐에요?!”


 쳐져 있던  거짓말처럼 화련이 펄쩍 뛰었다.  현은 피식 웃으면서 마무리했다.


“그럼 갑자기 사춘기 온 애처럼 굴지 마십쇼. 던전 잘 클리어 하고 갑자기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립니까? 나는 쓸모없어. 아무도 날 필요하지 않아. 뭐 그런 겁니까?”
“나, 나는 나름대로 좀 미안하고 그래서 그런 건데 그걸 그렇게 받아쳐요?”
“미안하고 빚진 것 같은 마음이 들면 수련이나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탈 날 정도는 하지마시고요. 제가 언제 당장 써먹을 동료가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그러려면 예거즈에 찾아갔겠죠.   쪽도  차이는 없겠지만.”

류 현은 다시 돌아앉아서 박피 작업을 재개했다. 화련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콧방귀를 흥하고 뀌더니 희란의 옆자리에 퍼질러 앉아서 명상을 시작했다. 류 현은 픽 웃고 말았다.


“결국  거면서 콧방귀는 왜 뀌나 몰라.”

***

기분 좋은 바람이 연보랏빛 머리칼을 살짝 헤집어놓았다. 검성은 산 입구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바람에 머리를 내맡기듯 고개를 내밀고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소리 없이 인기척이 들어섰을 때, 검성의 유쾌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적의가 가득 채웠다. 심약한 이라면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구토할 정도의 농도 짙은 적의.


그런 적의를 받는 이 치고는 너무나도 유유자적하게 남자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회색 정장차림에 아무런 무늬도 없는 가면을  남자는 검성의 노려봄에도 개의치 않고 그녀의 앞에 섰다.


“부른 기억도 없는데, 대체 여긴  왔지? 영감들이 가서  신경 좀 긁으라고 시키든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디 노기를 거둬주시길. 협회차원의 초청행사에 제가 지목 되서 한국에 들른 김에 온 것뿐입니다.”
“핑계도 좋네. 요즘 협회에서는 초청 인사한테 가면 쓰고 와달라고 하나 보지? 짜증나니까 가면채로 쪼개버리기 전에 그거 벗어. 전화 받을 때도 음성변조까지 하더니 이젠 가면까지 쓰고 나타나?”


검성의 서슬 퍼런 협박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가면을  손 쪽 팔을 과장되게 휘두르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성님. 웨인 크로이츠 라고 합니다. 부디 웨인이라고 불러주시길.”
“..웨펀 마스터를 보낼 줄이야. 협회 영감탱이들은 어지간히 내가 못 미더운가 보지? 왜 내가 사자의 목이라도 잘라서 부길마한테 고해 바칠까봐?”
“그저 최대한 격에 맞추려고 노력한 게지요.”
“입에 발린 소리는 그쯤하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거지? 연락처나 슬쩍 찔러보는 식으로 접근하던 겁쟁이들이.”

호의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가면을 벗은 말쑥한 미남자는 빙긋 미소 지었다. 이성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미소였지만 검성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당장 저희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그리 한 것입니다만, 불쾌하셨다면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쯧, 그래서 뭣 때문에 찾아온 거지. 웨펀 마스터.”


웨펀 마스터, 웨인 크로이츠는 그 호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검성으로서는 알바가 아니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최강 플레이어가 자신에게 붙은 별칭을 싫어하고 있다는 걸 그녀가 알리도 없었고.


“별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검성님의 친구 분을 한 번  수 있을까 해서..”
“..오래 살고 싶지 않은가봐?”


어느새 검성은 바위 위에 선채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의는 살의로, 살의는 검기로 뒤바뀌었고, 그 결과 웨인은 아무런 무장도 없는 검성이 검을 뽑아들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니, 그녀는 검을 들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들이 이제야 자신의 능력을 다루는  숙련자 수준에서 조금 벗어난 걸 비춰 볼 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성취다.

그야말로 궤를 달리하는 괴물.

그런 괴물의 분노를 정면에서 사게  남자의 행동은 매우 간단했다. 교묘하게 보는 것만으로는 존재를 눈치 챌  없게 숨겨둔 두 뼘 길이의 검을 풀어버리고, 정장 안에 숨겨둔 조립식 단창, 투척용 단검 두어 개  모든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항복입니다.”

손바닥을 펴 보이며 항복의사를 내비치는 것. 그럼에도 검성은 기세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차갑게 내뱉을 뿐이었다.

“비무장이면 못 밸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무장하고 있다고 한들 별 의미도 없고, 제겐 악의도 없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검성님의 확언도 들은 판국에,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악의도 없는 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내 면전에서 그를 언급하셨다?”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고, 협회 측에서도 그를 알고 싶어 합니다.”
“뒷구멍으로 조사는 다 해놓고?”
“아무리 신상명세서를 자세하게 작성해놓는다고 해도 직접 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요.”


금발의 남자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검성은 기세를 거두더니 바위 위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통보했다.


“돌아가.”
“......”
“나야 내 멍청함 덕택에 일을 키우는 바람에 너희한테 손을 빌려야 하지만 그는 그럴 이유가 없어. 스스로 선택한 거면 모를까. 나 때문에 끌려들어가는  내가 보고 있을 거 같아?”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나는   말 없어. 솔직히 말해서 뒷조사 하는 걸 묵인 해준 것도 많이 양보한 거거든? 그래도 만나야겠다면, 나도 그 유명한 웨펀 마스터의 실력이 궁금해질 것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일방적인 통보에 이은 협박. 한 국가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로서 출세가도를 달려온 남자로서는 당할 일이 없었던 폭거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변변한 반론조차 내놓을 수가 없었다. 상대는 검성. 그가 속한 조직에서 인류의 에이스 카드라고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괴물 중의 괴물.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는 플레이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당장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도 없다. 이렇게 시비 붙을 뻔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속한 조직에서는 질겁할 터.

결국, 답은 나와 있는 셈이었다. 플레이어라면 궁금해  수밖에 없는 검성의 실력에 대한 호기심과 그의 호승심이 잠깐 머뭇거리게 만들었을 뿐.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지요.”


그 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남자는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검성은 그 모습을 보지도 않고 깊은 한숨을 내어쉬었다.


***


자신의 몸집만한 배낭을 메고도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며 까불거리던 화련이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류 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짜 반띵해요?”
“하고많은 말 중에서 반띵이 뭡니까. 반띵이. 없어보이게.”
“뭐가 없어 보인다고 그래요? 마스터도 그랬잖아요. 뜻만 통하면 그만이라고.”
“..말을 말죠. 마음대로 하십쇼.”
“아씨, 진짜 반띵 하는 거 맞죠?”
“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겁니다. 근데 계약서 작성할 때 분배항목 안보셨습니까? 거기 적어뒀는데.”
“어차피 도장 찍어야 하는  대충 봤죠.”

천연덕스럽게 계약서를 대충 봤다고 하는 자신의 말에 류 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화련은 급하게 아군을 찾았다.

“희, 희란이도 안 봤을 텐데. 나만 왜 그렇게 봐요? 그치 희란아? 너도 분배 부분 몰랐지?”
“네에..”
“희란 씨랑 화련 씨는 경력이 다르잖습니까..”


거의 기어들어가는 희란의 대답에  현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거면 계약서는 뭣 하러 작성한 건지.


“던전 내에서 발생하는 괴수 사체에 대한 권리는 제가 절반,  분이 합쳐서 절반입니다. 대신 두 분은 아티펙트에 대한 우선권을 가지게 됩니다. 아티펙트의 소유를 원할 경우에는 우선적으로 두 분이서 의견조율을 한 뒤에 저한테는 감정가의 1/4만 지급하시면 됩니다.”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던 화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마스터가 너무 손해 아니에요?”
“보통은 그렇죠.”

류 현도 이번만큼은 순순히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높은 등급의 괴수일수록 사체도 비싸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가공전의 원료일 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공까지 해서 내다파는 것이겠지만, 생산라인과 레서피에서 유통라인까지 대형 길드와 연합한 기업체에서 독점하고 있다.

그런 길드 소속 플레이어도 간부급이 아닌 이상 약간의 웃돈만 받고 원료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니, 원료인 괴수사체와 현재 인류의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이적을 발휘하는 아티펙트는 비교하려야 할 수가 없다.


아티펙트 라는 게 그렇게 흔히 발견되는 것도 아니니 당장은 류 현의 수입이 더 좋아 보이겠지만 던전사냥을 거듭할수록 그가 손해 보는 상황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능력을 제외한다면.


‘아티펙트를 쳐 먹을 것도 아니고. 돈도 그냥 제대로 된 후원자한테 빨대 꽂는  훨씬 빨라.’

가장 급한 건 자신의 성장이다. 자금이나 아티펙트 수집은 그 대전제가 성립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괴수를 먹어 치워야한다. 계속해서 팀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숨길 생각은 없다. 자신의 성장 따로, 팀원 육성 따로  여유가 없다.


이번 생에는 그냥 악룡 사냥꾼으로 남는 게 아니라 인류의 선봉장이 되어야 할 테니까. 그냥 아지다하카만 때려잡는 게 목적이었다면 지금쯤 던전에 죽치고 있었지 팀원을 모으지도 않았다.


괴수 사체에 대한 배분도 나중이 결국 되면 그가 독식하게 될 것이다. 그냥 던전에서 나오는 흔한 괴수가 아니라 진짜 괴물들의 사체를 말이다.

 때가 되면 오히려 그녀들이 손해 보는 상황이  테지. 아마 능력을 밝히고 난 이후에는 류 현이 그녀들의 손해를 메워  방법을 고심해야 될 터. 류 현은 아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들을 힐끗 돌아보고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셔도 됩니다. 제가 다른 부분까지 고려해서 책정한 비율이니까요. 저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합니다.”


화련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확신에 찬 그의 표정을 보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끄덕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