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탐식마(貪食魔) (26/429)



〈 26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해란에게 ‘황금손’의 행방을 캐내려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지금은 만날 때가 아니야.’


‘황금손’은 분명 악룡 사냥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하나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전 생에서 아지다하카를 토벌하려는 용잡이 팀에게 성의 표시 수준으로 브류나크 몇 발을 제공받은 게 전부였지만, 그 정도도 꽤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런 그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이르다. 파도잡이가 개인적인 인맥이라고  걸로 봐선 강 찬은 아직 소속이 없어. 있더라도 지금은 팀을 정비하는 게 더 급하다. 당장 내가 손을 뻗는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을 테고. 지금 상황에서 더 욕심내다간 탈날게 뻔해.’


‘검성 그 인간이랑도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 할 테고. 그 인간은 진짜 무슨 속셈이지?’

쉴  없이 밀려드는 행운 덕택에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억지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 해야  일이 있고, ‘황금손’과의 일은 급하게 추진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던전을 돌고나서도 검성과의 일이 남아있기도 했고

류 현은 배낭을 짊어진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같이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잔뜩 긴장한 그의 팀원과 옵저버로 참석한 서해란이 보였다. 그는 허리춤을 더듬어 매달아 놓은 칼을 재차 확인하고는 말했다.

“준비  되셨으면 출발하죠.”


대답소리는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그린 던전에 진입하려는 원정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간결한 출발이었다.

회색빛을 내뿜는 던전 입구를 지나치자 밀림의 열기가 그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눈앞에는 우거진 밀림이 그에게 손을 내밀 듯이 펼쳐져있었다.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나가고 멈춰선 류 현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표정을 되돌리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옵저버 서해란이 들어서는  까지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밀림에 들어가면 땅파기도 쉽지 않을 테니, 여기다가 바로 짐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의견 있으신 분?”

매장은 당장 사용할 것 이외의 보급품들을 땅에 묻는 것. 던전에서 보급품을 보관할 때 가장 안전하고 널리 쓰이는 방법이었다. 물론 ‘가방’ 아티펙트가 없다는 전제하에서지만.


이견은 없었다. 그의 팀원은 물론이고 옵저버인 서해란까지 배낭 옆에 달려있던 3단 삽을 꺼내들었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고, 류 현은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들 플레이어라는 걸 과시 하려는 듯 2미터 남짓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는 작업은 반시간도  걸려서 끝이 났다. 배낭을 방수포를 뒤집어씌운 상태로 구덩이 안에 집어넣고 흙을 덮는  까지 끝냈을 때,  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가는 기척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의 부재를 확인한  사람은 얼빠진 표정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땅파기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지만 세 사람의 눈을 피해서 이렇게 사라지다니? 괴수의 습격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류 현은 그린 던전을 혼자 씹어 먹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을 소리도 없이, 반항조차 못  정도로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 할 수 있는 괴수가 그린 던전에 존재하는 것 보다는 그가 자의로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게 훨씬 현실성 있어보였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셋 중 화련이 슬슬 조바심을 느끼고 그를 부르려던 찰나였다.

밀림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현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얼굴을 확인한 그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고 한 찰나, 그녀들은 그의 손에 잡힌 물체를 보고는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들 중에서 가장 행동력 있는 건 역시 화련이었다.


“그..그게 대체 뭐죠?”
“긴 다리 도마뱀입니다. 근처에서 피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돌아다니고 있길래 일단 잡아왔습니다.”
“그게요..?”


류 현은 보라는 듯이 왼손에 쥔 꼬리를 끌어올렸고, 그의 팀원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성진 중에서 유일하게 덤덤함을 유지하고 있던 서해란이 한마디 보태었다.

“..변종이네요.”
“예, 빨간 점이 꽤 많이 있더군요. 지금은 안보이시겠지만.”


류 현은 그리 말하고는 피투성이의 도마뱀을 내팽겨 쳤다. 도마뱀은 거의 그의 상반신을 넘을 정도로 컸고, 다리는 그 몸집보다 훨씬 길었다.


대지위로 도마뱀의 피고름이 진득하게 배어들자 그의 팀원들의 표정이 더 썩어 들어갔다. 류 현은 그런 그들을 깨우치듯이 말했다.

“긴 다리 도마뱀. 출현 범위도 옐로우에서 블루까지 넓고, 출현 범위만큼  뛰는 놈입니다. 다 크면...최소 소형차 크기 정도는 되는 녀석이고요. 그리고 변종이 많아서 이래저래 귀찮은 놈이기도 하고요. 기본 피부색은 옅은 녹색. 변종 구분을 할 때는 대게 피부색이나 일정한 패턴의 반점이 있는가 여부로 구분합니다. 이놈은 빨간 점이 있었고, 빨간 점이 있는 놈은..”
“장시간 노출되면 닿은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독을 품고 있죠. 보통 독니와 독을 피부에 전체에서 배어나오게 한다고 들었는데 이건  다른 거 같네요.”


 현은 해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보충해주었다.

“자기 독을 감당 못했는지 중독 되서 천천히 죽어가던 상태더군요.”
“자기가 감당도 못할 독을 품을 정도라니, 확실히 그린 던전 값을 하긴 하나보네요.”
“예,  크지도 못 한 놈이 독부터 품고 볼 정도면 보스몹이 주는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인  같습니다.”
“보스몹이 와이번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하죠. 배고파서 사냥하는 게 아니라 재미로도 사냥하는 녀석이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꽤나 성질이 고약한 모양이네요.”


별 말 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화련과 희란 중에서 화련의 귀가 벌겋게 익어 들어갔다.


원정대원끼리 던전 내 정보를 교환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옵저버인 해란이 할 일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가세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도 아니다. 그런 두 사람이 저렇게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이유는 뻔하다. 화련과 희란이 오늘 돌 던전에 대해서 아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팀에 합류하고 이 주가 좀 넘는 시간동안 희란과 화련은 훈련만 거듭했고, 던전 공부는 공부했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료를 한  슥 보는 정도로 그쳤다. 희란이야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첫 원정을 그린으로 돌게 된 만큼 그 자체로도 고평가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화련은 활동한지 2년이 넘은 팀 내 최고참이지 않은가. 아무리 훈련에 집중했다는 핑계거리가 있긴 했지만 창피한 기분이 드는 건 별 수 없었다.

그런 화련이 창피함을 떨쳐내기도 전에 류 현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뭐 잘 되지 않았습니까. 괴수 성격이 좋다고 안 잡을 수도 없는데. 그럼 일단 보스룸에 가서 와이번 놈 풀어놓고 오겠습니다.”
“네? 아, 아니. 보스룸에 얌전히 갇혀있는 걸 왜 꺼내요!”

창피함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화련이 놀라서 따지고 들었다. 아는 게 거의 없는 희란마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볼 정도였지만,  현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게 원래 원정계획이었습니다. 보스 풀어놓고 던전 돌파.”


뻔뻔스러울 정도로 무덤덤한 그의 표정을 보며 화련은 혈압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요?”
“이 던전 보스몹은 와이번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이죠.”
“그건 저도 알아요. 마스터, 그래서요?”
“아무리 넓어도 던전 전체 보다는 좁은 보스룸에서 상대하면 녀석이 마음대로 활개 칠 수 가 없죠.”

일반 몹보다 최소 1.5배가량 강화된 보스몹은 최소 옐로우 던전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말이 옐로우 던전 부터지 실질적으로는 그린던전부터 보스몹의 존재가 확정된다.

그런 보스몹은 던전이 플레이어가 없을 경우 던전 전체를 자기 영역삼아 활개치고 다니지만, 플레이어가 던전에 입장할 경우 꼼짝없이 보스룸으로 소환된다. 플레이어가 보스룸에 접촉해서 격리에서 해방될 때까지 말이다.


당연히 던전 내부를 청소하기 전에 보스몹을 일부러 보스룸에서 해방시켜주고 싸우는 원정대는 없다. 뭣 하러 던전 내의 가장 큰 변수를 풀어놓겠는가?

화련의 물음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아, 아니..대체 왜 그 녀석이 활개  수 있게 해줘야하는 데요. 마스터 혹시 괴수지만 정정당당하게 승부한다.  그런 주의에요? 거기다가 이렇게 할 거라고 말도 안하셨잖아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보통 원정처럼 보스룸에서 처치하면 부족할 거 같아서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 화련의 흥분도 점점 가라앉았다. 뭔가 속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화련은 묻는 수밖에 없었다.


“..뭐가 부족하다는 거죠?”
“우리 팀 상대로요.”

류 현은 히죽 미소 지었다. 화련은 드물게도 그 미소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
[끼르륵]

높은 하늘 위까지 닿은 피 냄새가 심기를 긁어대었다. 와이번은 충혈된 눈으로 하계를 훑어보았다. 높은 하늘에서도 먹잇감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 할 수 있는 좋은 시력은 여과 없이 하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었다.

침입자(인간) 세 명이 라가 전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 명이 바쁘게 움직이고 남은 한 명은 간간히 소리칠 뿐이었다.

일반 라가보다 1.5배는 되어 보이는 라가 전사는 큰 방패와 창의 조합으로 힘겹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미 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라가의 상징과 같은 가면은 이미 부서져서 벗겨진지 오래였다. 간간히 흉성을 터뜨리며 저항하고는 있었지만, 저 상태면 얼마 못  숨이 끊어지고  것이다.

와이번은 마음을 굳혔는지 콧김을 내뿜고는 하계로 쏘아져 내려갔다.


그 때 였다.

[쉭!]

추락하듯이 쏘아져 내려가던 와이번의 눈꺼풀 근처로 뭔가가 스쳐지나갔다. 와이번은 반사적으로 멈춰 서고는 다시 고도를 높였다.

벌써 네 번째도 넘는 일이었다. 자신의 장난감들을 망가뜨리는 침입자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뭔가가 날아와 와이번을 공격해대었다. 당장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눈이나 생식기 같은 급소를 노려오니 반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와이번은  차례 으르렁 거린 후에 다시 하계에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끼익! 갹! 꺆!]

“시끄러워! 정신 사나워 죽겠네!”

발악하는 라가 전사에게  소리치면서도 화련은 자신의 말처럼 정신 사나울 정도로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오른손은 마치 지휘자처럼 허공을 일정한 박자로 휘젓고 있었고, 남은 왼손은 무슨 발작이라도 하는 듯이 주기적으로 움켜쥐었다 폈다가 하는 중이었다. 눈은 자신의 뒤편의 잔소리꾼의 동향을 살피기 바빴다.

보다 못해 류 현이 쏘아붙였다.


“제 눈치를 왜 보십니까. 그렇게 여유로우시면 근처에  다리 도마뱀 하나 몰아올까요?”
“진짜 신경 쓰여 죽겠는데. 서해란 씨처럼 어디  보이는 데 있으면  돼요?”
“그렇게 떨어져 있다가 사고라도 나면 대처가 늦습니다.”
“아니 애초에 사고 날만한 환경을 만든 게 누구인데! 안 그래도 와이번 견제하느라 힘들어 죽겠구만!”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냥 하면 우리 팀 수준에 안 맞는다고. 잘 하고 계시니 우는 소리만 줄이시면 딱 이겠네요.”
“진짜, 내가 말을 말아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화련의 귓가를 잡아끄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언니 지금!”
“오케이!”

화련이 대답과 동시에 왼손아귀를  움켜쥐었고,

[끼아악?!]

좌우로 열심히 뛰고 있던 라가 전사가 팔다리가 묶인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쉬칵!]


오희란이 라가 전사에게 달려들어 장검으로 말 그대로 멱을 따버렸다. 라가 전사를 옮아 매던 압력은 그 순간 풀려버렸고, 라가 전사는 목에 난 구멍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버둥거리다가 축 쳐졌다.

오희란은 긴장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상황을  놓고 지켜보고 있었던  현은,

“이걸로 다섯 마리.”

칭찬도, 격려의 말도 없이 덤덤하게 전투 기록을 메모할 뿐이었다.


***


화련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밧줄 다발을   보고  현의 얼굴을 봤다. 그는 방금 전 전투기록을 남길 때처럼 무표정했다. 화련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시 물었다.


“어, 그러니까. 이걸 와이번 발목에 묶기만 하라고요?”
“예, 제가 하늘을 나는 능력은 없어서요. 그리고 화련 씨도 아직 사람을 안정적으로 띄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제  염동력 같은 게 아니라 공간우선 순위를..아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진짜로 묶기만 하면 된다고요. 마스터?”
“예.  분이서 와이번을 잡을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절대 안돼요!””

화련과 희란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야자수 같아 보이는 나무 밑동에 기대어  쳐져 있던 희란은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리라고 하시고, 제가 보기에도 두 분께는 아직 이릅니다. 이번 원정에서 기대 이상으로  해주시기도 하셨고요. 그러니까, 제가 처리  테니 와이번에 접근할 끈만 매어주시면 됩니다.”

다시 들어도 황당한 그의 설명에 화련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해란을 돌아보았지만, 해란은 어색하게 미소 지을 뿐 이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화련은 결국 한숨을 내어 쉬면서 밧줄을 공중에 띄웠다.




[쿠웅!]

던전이 아니라 그냥 숲이었다면 주변에 있던 새들이 전부 날아올랐을 거대한 충격음이었다. 희란과 화련 그리고 해란은 충격음에 개의치 않고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에 두 어 번 눈을 비비적거렸다.

납작한 마름모꼴 모양의 머리와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을 따라난 톱날 같은 이빨. 방향타 같은 기다란 꼬리. 익룡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피막 날개, 온몸을 덮은 회색빛 비늘. 와이번이다. 와이번은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류 현이 밧줄을 타고 올라간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말을 잃은 채 바라보는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혼자서 와이번을 잡아 죽이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올려 보내긴 했지만 정말로 해버릴 줄이야.


 현은 와이번의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중형차만한 와이번의 몸통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피투성이의 모습이었지만 상처라고는 없어보였다. 희란이 류 현에게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화련은 중얼거렸다.

“..괴수보다 우리 마스터가 더 괴물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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