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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탐식마(貪食魔) (25/429)



〈 25화 〉탐식마(貪食魔)

서해란은 벌써  번째인 지도 모르겠지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다고 시간이 빨리 가거나 하진 않는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어나올 것 같은 한숨을 억누르며, 옆에 선 이를 슬쩍 훔쳐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연보랏빛 머리카락이었다. 어깨를 살짝 넘은 머리카락은 혈색이 부족해 보이는 뺨과 대비되어 더욱 눈에 띄었다. 반쯤 감은 채인 눈도 머리카락과 비슷한 보랏빛이었다. 그 기묘한 색체는 이질적인 느낌보다는 동성마저 흠칫하게 하는 색기를 띄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갑자기 자신 쪽으로 돌아보자 해란은 흠칫하고 시선을 돌렸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담량으로는 저 눈의 주인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훔쳐보다가 걸렸다면 더더욱.


불편한 침묵을 깬 건 결국 해란이 훔쳐보던 여인이었다.


“그렇게 눈치  봐도 아무 짓도 안 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친구 만나러 온 거니까.”


검성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해란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친구라고..? 그럼 우연히 동선이 겹친  아니라 정말로 이전부터..’

그 순간 해란의 생각을 가로막듯이 벨소리가 울렸고, 해란은 발신자를 확인하자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전화를 받았다.


“네, 서해란 입니다.”
[류 현입니다.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안보이시네요. 아직 도착 전이십니까?]
“아뇨, 던전 입구를 잠깐 살피러 올라와있어요. 내려갈 테니..”


해란은 검성을 한  돌아보았다. 검성은 고개를 까딱이더니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친구 분이 와계셔서 같이 갈거에요.”
[..친구요?]
“네, 아주 특별한 분이 오셨어요.”


***

‘이런 미친..’

서해란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부터 류 현은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친구라고 칭할 만한 인간이 대체 누구일지. 그가 내린 결론은 ‘없다’ 였다. 좀 민망한 이야기지만 전생도, 현생에도 그에게는 친구라 불릴 만한 인연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 비슷한 건 죽은 용잡이 팀과 서해은 정도다.


서해은이 왔다면 서해란이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지도 않았을 테고, 특별한 분이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식으로 스폰서가 된 이후 그의 팀을 내보이는 자리에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동생을 데려올 리도 없을테고.

문민호가 찾아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는 류 현의 주변 상황을 대강 알고 있는   하나이니, 이렇게 연락도 없이 섣불리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결국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그는 기다리기로 하였고, 지금 실시간으로 후회하는 중이었다.

‘저 인간이 대체 왜 여기에..’


해란과 같이 산길을 내려오고 있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검성이었다. 혹여 자신이 잘  본 것일까. 아니,  못 본 것이기를 바라며 류 현은 눈을 비볐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늘씬한 미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친구라고? 친구는 개뿔..대체  찾아온 거지?’

엄한 해란에게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는 곧바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한 발만   딛어도 터지는 지뢰밭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만큼은 피해야했다.


“마스터? 들었던 것 보다  사람이  많은  같은데요. 아니에요?”
“뒤에 오시는 분은 서해란  같은데..저 분은 처음 보는 거 같아요.”


뒤쪽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물었지만, 류 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다가오는 검성을 기다렸다.


검성은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멈춰 섰다. 그는 뒤편에서 마른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바짝 긴장하고 있는 서해란이 보였다.

‘입 잘 못 털면 개판 나겠네.’


먼저 입을 연 건 검성이었다. 츄리링 차림인 그녀는 자신의 차림새만큼이나 편안하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예,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
“표정을 보니까.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보네. 너무하네,  하도 연락이 없어서 걱정 되서  본 것뿐인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안부전화 주고 받을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그렇게 하면 되겠네.”
“이런 식으로 습격하듯이 찾아오기 전에 연락하시겠다면 생각해보도록 하죠.”
“그 때랑 다르게 좀 까칠하네. 혹시 갑자기 찾아와서 화났어?”
“글쎄요.”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하지만 이상한 단체랑 엮이는 거 같은데 그냥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이상한 단체요?”

검성은 힐끗 뒤편의 서해란을 돌아보았다. 해란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주변을 좀 더  살피면 보이지 않을까?”

류 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녀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 지는 명확했으니까.

“해란 씨랑은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래?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분명히 그럴 겁니다.”


류 현이 힘주어 단정하자, 검성은  말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하면서 물러났다. 그 모습에 해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짓은 아니어도 찔리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


검성도 그냥  번 찔러 소리였는지 더는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류 현의 뒤편으로 향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류 현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던 화련이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희란은 아예 화련의 뒤편에 숨은 상태였다. 전혀 숨겨지지 않았지만.


“팀을 꾸렸다는 게 진짜인가 보네. 좀 놀랐어. 팀을 꾸리더라도 한 일 년 후  얘기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영입할 만한 인재들이 있는데 시간 죽이고 있을 이유가 없죠. 그런데, 방금 이상한 단체 운운한 것도 그렇고, 제 뒷조사 하셨습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뒷조사를 하고 그러겠어. 그냥 어떤 할 일 없는 작자들이 알려주더라고.”

검성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흘러가듯이 말했지만 류 현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검성에게 외부 조력자가 있는 것일까.

“할 일 없는 작자들?”
“궁금해? 궁금하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맨입으로는 좀 그렇고.”
“여기서 그런 얘기 하기는  그렇고, 나중에 하죠.”
“좋아, 나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빙긋 미소 짓는 검성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현은 물었다.


“그래서 진짜 찾아오신 목적이 뭡니까? 이런 건 전화통화로 충분히 할  있는 얘기 같은데요.”
“응? 정말 안부 확인 차  건데. 겸사겸사 당신 팀 좀 구경하고, 괜찮으면 같이 던전도..”
“안됩니다.”
“칫.”


단칼에 거절당할 걸 예상했는지 검성은 그리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란은 속으로  현의 위험도를 한 단계 더 상승시켰다. 상대가 검성  걸 알고도, 검성에게 담담하게 제 할 말을 다하는 모습도 그렇고, 말하는 투로 봐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게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은, 검성의 성격을 대강 파악한 류 현이 좋을 대로 지껄이는  뿐 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 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검성을 쏘아붙였다.


“완전히 무료 봉사해주려고 온 건데? 실력 좋은 헬퍼 하나 끼고 간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무료 봉사가 아니라 민폐죠. 그렇게 같이 던전 들어가고 싶으시면, 예거즈 아무 팀이나 붙잡고 들어가시면  거 아닙니까.”
“바쁜 시간 쪼개서 와줬는데 이렇게 면박만 줄 거야? 거기에 처음이랑 완전히  판이네. 팀원들 앞이라고 그러는 거야?”
“아까 전에 시간 남아도신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그 때처럼 대해 드리면 얌전히 돌아가실 겁니까?”
“칫, 진짜 완전히 속았네.  때는 연기였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류 현이 꿈쩍도 않고 거절의 말만 내뱉자, 이내 포기했는지 검성은 입구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바위 중 하나에 걸터앉더니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던전 털고 내려오면 털어버려야지.”
“다 들립니다. 그리고 좀 가십쇼.”

검성에게 한 번 쏘아준 후,  현은 검성에게서 관심을 끄고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화련은 대놓고 삐죽거리고 있었고, 희란은 아직도 화련의 뒤편에 숨은 채였다. 전혀 가려지진 않았지만.

할 말이 많겠지만  현은 수다 떠는 것 보다는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좀 지체됐으니 올라가면서 이야기들 나누도록 합시다.”


대화 주도권을 쥐고 있는 그가 그리 말하자 모두 끄덕거리는 수 밖에 없었다.


***

여자 셋과 남자 하나로 이루어진 무리는 하나같이 등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편하기는 편한 복장이었지만 가죽 갑옷을 입고 산을 오르는 이는 없을 테니까. 있다면 그건 열이면 열 플레이어일 테지.

그런 플레이어 무리 중에서도 눈에 띄는 외형의 여자가 입을 떼었다. 그녀의 작은 체구는 등산도, 가죽갑옷도 감당하기 버거워보였지만 그녀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였다.


“마스터,  여자 누구에요?”

여자, 백화련은 검성이 보이지 않을 만 한 거리가 확보되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그녀와 선두의 남자를 제외한 일행 전체가 움찔했지만,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남자의 입이었다.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입을 다문 채로 계속해서 산을 올라갔다. 남자는 질문한 여자가 조바심을 느낄 무렵에야 답을 내놓았다.

“제 지인입니다.”

화련은 못 믿겠다는 눈으로 남자를 흘겼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그의 뒤통수뿐이었다.


“지인요? 마스터 표정이 지인 만난 사람이 아니던데..”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긴 합니다만, 좀 특이한 사람이라 서요. 예고 없이 멋대로 불쑥불쑥 얼굴을 디밀기도 해서 말입니다. 그냥 두면 성가시게 굴게 뻔 하니 떼어놓은 것뿐입니다.”


남자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운을 띄운 화련 말고도 다른 일행들도 만족하지 못했지만, 류 현은 당장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없던 일 취급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절충안을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던전 돌고나서 하도록 하죠.”


어느새, 일행은 던전 입구가 위치해 있는 산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원래 던전이 자주 생기는 편인지 그 곳은 풀과 나무가 정리되어 작은 공터를 이루고 있었다. 공터 주변에는 커다란 배낭이 사람 숫자에 맞춰서 부려져있었다. 배낭 옆에는 칼이나 단검 묶음 따위가 놓여져 있었다.

 현은 배낭들을 살피다가 기다란 통이 하나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해란에게 물었다.


“보급품 목록에 없었던  같은 물건인데 뭡니까?”
“아, 저희 협력 공방 중 하나에서 보내온 시제품이에요.”
“협력 공방? 산군 쪽입니까?”
“아뇨, 제 개인적인 인맥이에요. 그렇게 유명한 공방은 아니지만 물건은 확실해서 가져가면 도움은 될 거에요.”

류 현은 별 기대 없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통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촉 없는 화살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응?’


그가 촉 없는 화살을 잡고 잠시 멍해져 있자 해란이 끼어들어왔다.


“투척무기라고 들었어요. 마력을 불어넣고 던지면 괴수 방어막 중화시킨다고..”


류 현은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재검토 해보느라 바빴으니까.

‘미친, 이거 설마 브류나크 초기 버전인가?’


그는 해란의 말대로 슬쩍 마력을 흘려 넣어 보았다.


그러자,

부우웅! 그가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갈색을 띄고 있던 촉 없는 화살은 황금빛을 내뿜으며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지만,  현의 귓가에는 전혀 닿지 않았다. 그는 실실 새어나올  같은 웃음을 억누르라 바빴다.

‘진짜네. 하하..진짜 우주의 기운이 나한테 몰려들기라도 하나.’


‘섬광’ 브류나크. 이전 생에서 ‘황금손’  찬이 개조의 개조를 거듭한 끝에 악룡 아지다하카의 방어막마저 뚫어낸 말 그대로 괴물같은 위력의 아이템의 이름이었다.


‘황금손은..영입은 힘들 테니까. 거래루트라도 터둬야겠지.’
‘그런데 진짜 이렇게 잘 풀려도 돼?’


아직도 행운에 대해선 면역이 없는 류 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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