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탐식마(貪食魔)
맨입으로 쌈 채소를 질겅거리고 있던 류 현은 턱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말을 들어야 할 이들은 정신없이 고기를 식도에 쑤셔 넣기 바쁜 상태였다.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혜?”
입안에 고기를 쑤셔 넣다 말고 희란이 돌아보자 류 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별 거 아니니까. 드시면서 들으십시오. 드시면서.”
희란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했다. 류 현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수도꼭지 이미지 자체가 문제인 거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에는 희란도 더 이상 고기에 집중할 수 없는지 억지로 삼키려다가 켁켁 거렸다. 류 현이 음료수를 건네자 겨우 진정된 희란이 반문했다.
“수도꼭지 자체가 문제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안하면..”
“예, 제어 없이는 ‘연결’된 상대방이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거나 과도하게 많이 들어간 풍선 꼴이 되겠죠.”
희란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화련 씨랑 할 때는 딱히 그럴 우려도 없지 않습니까. 뭐 설령 재수 없어서 희란 씨 마력을 다 쏟아 부어도 화련 씨 정도면 잠깐 기절하고 끝일 텐데.”
“듣자, 듣자 하니까. 너무 말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둘의 대화에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배를 채우는 데 열중하던 화련이 끼어들어왔다. 졸지에 중간에 끼인 희란은 바쁘게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아니 몸에 이상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양이면 용량 늘리는 데 도움이 될텐데 뭐가 문젭니까? 희란 씨 마력량 뻔히 아시면서.”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뜻만 통하면 되는 거지 별 걸 다 따지십니다. 입술에 묻은 쌈장이나 좀 어떻게 하시죠.”
“윽-”
화련을 격침시킨 류 현은 다시 희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희란이 움찔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잊었다.
“수도꼭지 자체는 필요합니다. 저와 연계를 하든, 안하든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바닥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닥이요? 하지만 그건 이미 본 것 같은데..”
“그건 흐름을 제어해야한다는 의식 하에 훈련한 거니까요. 계속 연결을 끊었다가 했다가 반복하느라 소모된 마력이 더 많을 겁니다. 그리고 희란 씨의 마력이 아닌 순수하게 타인의 마력을 옮기는 한계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희란 씨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제어가 아니라 연결이니까요.”
오희란의 능력은 ‘링커’와 동일하다. ‘링커’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통로를 만들고 양극을 연결하는 것이다. 중간 파이프 역할을 하는 건 오희란 본인이다.
현재 오희란의 한계는 자신을 제외한 두 사람과의 마력통로를 연결하는 정도다.
요 며칠 간 희란과 화련이 같이 붙어 다니며 한 훈련은 그런 희란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희란이 화련과 마력통로를 연결해서 화련에게 자신의 마력을 일정량을 주기적으로 보급해주는 훈련. 화련에게도 영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희란을 중심에 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직 그녀는 본인의 내구성 문제 때문에 류 현이 발맞춰 주지 않으면 그와는 연결하지 못한다. 사무실에 찾아온 첫날에 능력을 쓰자마자 기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있는 거대한 통에 구멍을 뚫고 그 내용물을 옮기려고 들었으니 파이프가 성할 리가 없을 터.
막 각성한 그녀가 그런 짓을 하고도 아무런 후유증 없는 게 기적이었다. 그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마 지금쯤 병원침대에 누워있고, 류 현은 협회에 불이 나게 전화를 걸고 있었을 테지.
그래서 류 현은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단단히 주의를 줬지만 그래도, 이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아가씨가 뻘 짓하다가 ‘링커’가 그랬던 것처럼 장기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 곤란해지는 건 그니까. 차별이니 어쩌니 하는 화련의 말은 영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이후로 일주일간은 던전 안에서 하는 훈련은 쉬려고 했었는데 마침 잘 됐군요. 저랑 같이 연습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가, 같이요?”
“예, 화련 씨랑 할 때는 희란 씨 마력을 주는 쪽으로 연습하셨잖습니까. 내일부터는 저랑 파이프 라인 역할만 하는 연습을 합시다. 수도꼭지 이미지는 이 훈련이 끝난 뒤에 하는 게 맞는 거 같네요. 지금 급한 건 이쪽이 더 급한 것 같군요.”
희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다 알아듣고 하는 행동 같지는 않았지만 류 현은 그 열의를 높이 사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한 말도 ‘링커’가 과거에 했던 말들과 자신의 어림짐작을 뒤섞은 것뿐이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화련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불공평해.”
“다 들리니까. 구시렁거리지 말고 이의가 있으면 확실하게 제기 합시다. 그리고 뭐가 불공평하다는 겁니까? 희란 씨에게 맞는 훈련법을 제공하는 것뿐인데.”
“..난 그냥 방치하고 있잖아요.”
“방치가 아니라 자율 훈련 기간을 드리겠다는 겁니다. 휴식을 원하시면 휴식하셔도 되고, 훈련할 장소를 원하시면 텅 빈 레드 던전 정도는 구해드릴 겁니다.”
“그게 방치지..”
삐죽거리는 화련의 모습에 소리 없이 한숨을 내어 쉰 류 현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훈련이 좋으시면 화련 씨도 봐드리죠. 우는 소리 내셔도 봐 드리는 거 없습니다.”
그의 말에 화련의 입 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
쉬익! 섬뜩한 바람소리와 함께 볼펜 다발이 날아들었다. 흉흉한 기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날아다니는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런 공격을 류 현은,
쒜에엑! 상체를 살짝 뒤로 빼는 것으로 피해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격을 피했다는 안도감보다도 심드렁함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항의라도 하듯이 다음 공격은,
쿠웅! 보이지 않는 압력이었다. 류 현이 움찔하는 사이에 그를 지나쳤던 볼펜 다발이 다시 빙 돌아서 그에게 다시 날아들었다.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류 현이 한숨을 내뱉듯이 말했다.
“제가 말했을 텐데요.”
그는 발 구름 한 번에 압력을 떨쳐내고는 술수를 부린 공격자에게로 뛰어들었다. 그에게 걸었던 압력이 파훼된 반동으로 굳어있던 화련은 반응하지 못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사정거리까지 거리를 좁힌 그는 망설임 없이 오른팔을 휘둘렀다. 화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공격패턴이 너무 뻔합니다. 그리고..”
코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화련이 본 것은 류 현의 얼굴이 아니라 닿을 것 같이 가까이 다가온 그의 주먹이었다. 화련이 움찔하자 류 현은 주먹을 거둬들이며 말을 마무리했다.
“제가 누누이 큰 거 노리는 버릇 좀 버리시라고 했는데도, 계속 큰 걸 노리시는군요. 화련 씨 마력통이 저보다 큽니까? 왜 자꾸 계란으로 바위를 후려치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가는 군요.”
긴장이 풀린 화련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그의 말을 듣다고 있다가 눈을 흘겼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류 현은 꿈쩍도 안했다. 화련은 마주보는 류 현의 눈빛에 못 견뎌 눈을 슬쩍 돌리고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마력통 무식하게 커서 참 좋으시겠네요. 마스터.”
“예, 좋습니다. 화련 씨처럼 기술 하나 쓸 때마다 계산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화련은 방금 류 현의 눈길을 피한 것도 잊었는지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뭐라 쏘아붙이기 전에 류 현이 말문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무식하게 마력통 큰 저도 그런 식으로는 안 싸웁니다.”
“읏..”
“압니다. 화련 씨가 헬퍼로 활동하는 동안 이렇게 능력 쓰는 게 재미가 좋았겠죠. 오렌지 이하 던전에서 나오는 괴수 항마력 이라고 해봐야 뻔한 수준이니까요.”
괴수에게는 화기를 바보로 만드는 실드를 제외하고도, 플레이어들의 마력에 기반을 둔 능력에도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항마력 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던전 급수가 높아질수록 그 안에서 등장하는 괴수들의 항마력도 올라간다.
문제는 화련이 헬퍼로 활동한 시간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서 시작했다.
주로 오렌지 던전 이하의 저급 던전에서 활동한 그녀에게 항마력 이라는 개념을 체감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자연스럽게 큰 기술 한 방에 괴수를 거꾸러뜨리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계속 헬퍼로서 활동할 거라면 별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용잡이 팀의 일원이 된 이상 고쳐야하는 악습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년 단위 시간 동안 만들어진 버릇이 쉽게 고쳐질 리가 없을 터. 류 현과 훈련하기 시작한지 삼 일째. 그녀는 이렇다 할 진전 없이 류 현에게 잔소리만 듣는 걸로 하루를 보내는 처지가 되었다.
“대련시간 다 됐으니 이제 순발력 훈련을 하죠.”
“..또 그거 해요?”
“예.”
“날아오는 야구공 멈추는 거랑 괴수 때려잡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에요..그리고 어제 반 정도 멈췄잖아요...”
화련 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류 현은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한 숨을 내어쉬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안 이랬는데.
“목표치는 반이 아니라 전부. 통과하실 때 까지 할 겁니다. 그렇게 바라시던 훈련 아닙니까? 개인적으로는 좀 더 열의를 보여주셨으면 좋겠군요.”
류 현이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화련도 더 뭐라고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씨이..이게 아닌데..’
입술을 짓씹던 화련은 류 현이 피칭머신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울상이 되었다.
***
“자아, 천천히. 내쉬고, 들이쉬고. 예, 잘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요.”
“진짜 너무해. 완전 차이 나잖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류 현의 귀는 정확하게 그것을 잡아내었다.
뒤편에서 튀어나온 볼멘소리에 잠깐 눈을 흘겨준 류 현은 다시 정면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오희란은 눈을 감은 채,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심리치료 같은 게 아니라 훈련의 일환이었다.
류 현은 천천히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갔다가, 맞잡은 손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마력의 움직임을 주목했다. 그리고 흘러나가는 마력을 조심스럽게 통제했다.
화련이 매일 같이 내뱉는 불평에 눈을 흘길 정도로 그는 잔뜩 날이 선 상태였다.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 마력이 흐르는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는 희란이 크게 다칠 것이다. 혹여, 희란의 집중이 깨질 경우 대처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그의 우려와는 달리 희란은 그가 목표로 잡았던 시간보다 오래 집중력을 유지했다. 류 현이 훈련종료를 알렸을 때 그녀가 앉은 자리는 그녀가 흘린 식은땀으로 흥건할 지경이었다.
류 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도 기록 갱신하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삼 일째. 희란은 훈련에 들어간 지 삼 일째 계속해서 그가 정한 목표치를 넘어서는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웃음이 인색한 그조차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상황.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던 희란이 미소로 화답했고, 화련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
퉁! 퉁! 퉁! 부르르 몸체를 떨던 피칭 머신이 연달아 공을 토해내었다. 피칭 머신의 몸체에 적힌 숫자는 150km. 이쯤 되면 야구공이 단순한 야구공이 아니라 흉기가 된다.
성인남자도 맞았다간 그냥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는 강속구 앞에 서있는 여인은 너무 가녀렸다. 보통 여자보다 작은 체구에, 인형 같은 외형의 여인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그 앞에 서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참사가 연상되는 상황.
그 때 여인의 눈에 기이한 하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침없이 날아들던 야구공의 주변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우웅!
기이한 진동음과 함께 최선두에 있던 공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현상은 곧바로 최선두를 제치고 나온 두 번째 공에게도 일어났고, 약간의 텀을 가진 후에 마지막 공에도 일어났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인이 세 개의 야구공을 모두 멈추자 갑자기 천장이 벌컥 열리더니 동그란 물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을 가득 채운 물 풍선부터, 계란, 볼링골 등. 동그랗다는 것만 빼면 아무런 유사점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물건의 개수는 백을 헤아리는 상황.
여인이 내달렸다. 여인은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모두 보려는 것처럼 체육관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달렸고, 그런 여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짙게 하얀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인의 눈길에 닿은 물체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좀 물렁한 것들은 잠깐 형태가 망가졌다가하다가 허공에 멈춰 섰다. 단단하고 무거운 것들은 여인의 시선이 닿자마자 멈춰 섰다.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은 이상현상 이었지만 여인은 계속 해서 체육관을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마침내, 여인이 체육관을 가로질렀을 때. 허공에는 수많은 동그란 물체들이 우주공간에서처럼 떠있게 되었다. 우주공간과의 차이점이라면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미동조차 없다는 것이리라.
자신이 달성한 위업을 아무 감흥 없이 바라보던 여인은 자신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대답을 요구 하는 듯 한 시선에 남자는 그녀가 원하던 대답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합격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합격하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원정을 늦춘 보람이 있군요. 혼자서 연습하겠다고 하셨을 때는 솔직히 좀 걱정했었는데 말입니다. 삼 일만에 이렇게 하실 줄은..”
남자, 류 현의 말에 백화련은 옅게 미소 지었다.
“목표가 확실해지니까.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더라고요.”
“목표요?”
“그런 게 있어요.”
류 현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주억거렸다. 딱히 무리한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내왔는데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성장에 류 현은 훈련 계획을 조금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수첩에 메모를 했다.
그래서 그는 화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악동의 그것이 되어가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