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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탐식마(貪食魔) (23/429)



〈 23화 〉탐식마(貪食魔)

미팅의 시작이 영 이상하긴 했지만, 초반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해란이 보급품의 수량을 제시하면 류 현이 수정하고, 어떤 물품은 제외시키고 그에 대해서 해란이 재차 확인하는 식으로 겉보기에는 아주 무난하게. 해란이 받아 적고 있는 내용은 전혀 무난하지 않았지만.

서해란은 자신이   했는지도 모를 물음을 다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으시겠어요? 이틀 동안 입만 적시고 먹은 기분 낼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괜찮습니다.”
“팀원  한 분이 갓 각성한 분 아니었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해란은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덮어놓고 괜찮다고만 하는데 안 그러고 배기겠는가.


류 현이 줄곧 솔플만 해왔다는 사실이 그녀의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지금 이 남자가 그냥 자기 기준으로 곱하게 3만큼만 보급품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게 해란이 말했던 것처럼 그가 요구한 보급품은 그야말로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아사위기에 놓일 정도였다. 최소한으로 쪼개도 이틀 치조차 못되는 양.

그린 던전 쯤 되면  번 이상 클리어한 던전이 잘 없다.  번 클리어 됐다는 건 미개척 던전에 비해서 안전하다는 뜻이고, 길드나 정부에서는 그런 던전을 놀리지 않는다. 던전이  소모 되서 클로징  때까지 계속 원정대 로테이션을 빡빡하게 굴린다. 도는 족족 돈이 되는데 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류 현이 저번에 검증 받겠답시고 그린던전을 찾았을 때는 정말 운이 좋아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리 길어도 클리어 하는데 이틀이상 걸리지 않는  더욱 드물다.  얘기는 이번에는 미개척 던전을 돌아야한다는 의미다.

미개척 던전에 도전하면서 보급품을 극단적으로 줄인다? 자살행위다.


서해란은 어떻게 둘러서 말해야 자살행위라는 말이 좀 덜 기분 나쁘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녀의 고민을 알 턱이 없었지만 류 현이 그녀를 도와주었다. 해란이 기뻐할 수 없는 도움이었지만.

“개척된 그린 던전  곳을 제공받기로 되어있습니다. 저번에 돌았던 곳이랑 비슷하다더군요.”
“네? 어디서요?”

그린 던전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면 개인이든 단체든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해란이 놀라서 물었다. 류 현은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터주’에서 제공받기로 했습니다.”
“..‘터주’라고요? 정말인가요?”
“생각하시는  ‘터주’ 맞습니다. 그리고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터주’에서 그 검성 타도 모임인지 뭔지에 한 발 걸치고 있다는 거 들었습니다. ‘터주’ 팀장 중 하나한테서 직접.”

화련을 쫓아다닌 지난 한 달 사이에 문민호가 그를 찾아왔었다. 그는 ‘터주’가 검성을 노리고 있으며 노리는 와중에 건드려볼 곁가지 중 하나로 그를 낙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이전 생에서 검성을 죽이는 데 ‘터주’가 크게 거들었다는  알고 있고, 해란으로부터 사정도 들어둔 류 현에게는 별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그 이상한 모임에 참가한 팀장 이름도 압니다. 뭐라고 했더라. 최현우?”
“네에, 맞네요. 제가 기억에도 그런 이름이었어요.”
“어쨌든 그쪽에서 준비해주기로 했습니다. 돈은..흠, 달라고는 안하던데 주긴 줘야겠군요. 1억 정도면 적당하려나요?”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런데,..”
“말씀하시죠.”
“참 빨리 스폰서를 구하셨다 생각이 들어서요. 홍보할 시간도 없으셨을 거 같은데.”
“스폰서요? 아, 그 양반은 그런 거 아닙니다. 하는 짓은 비슷하긴 한데 지분 주장한 적도 없고. 애초에  양반이랑 접촉했을 때 제가 스폰서 구할 때도 아니었고요. 뭣보다, 제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가 좋다고 먼저 조건 없이 시작한 건데요. 뭘.”


참으로 무사태평한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주’소속의 인간을 원하는 만큼 빨아먹고 버릴  있는 대상 취급이라니.

‘보통 인간이 아니긴 하네. 그 정도는 원할  털어낼  있다고 자신하는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도록 하죠. 정확한 일자를 생각해두셨나요?”
“뭐 일단 일주일 정도는 천천히 쉬면서 그동안 배운 걸 곱씹어 보게 하려고요. 오늘이..수요일이니 다음  수요일에 제가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때    만나야  거 같기도 하고. 정확한 일시는 그  정하는 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이번에는 팀원들 동원 안 해도 될  같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맞나요?”
“정확하십니다.”
“그럼  때 연락주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해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 현도 배웅을 위해서 따라 일어섰다. 류 현은 허리를 살짝 숙여보이며 말했다.


“거의 막무가내로 나와 달라고 연락했었는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지원을 약속했으니 약속을 지키러 나온 것 뿐 인걸요. 그럼 수요일 날 뵙겠습니다.”

해란 또한 허리를 살짝 숙여 답하고는 문으로 향했다. 해란이 사무실 문에 거의 도달한순간이었다.

“더는 못해! 못한다고! 아니  해!”

문이 벌컥 열리며 먼지가 확 덮쳐들었다. 해란은 반사적으로 입가를 손으로 가렸지만 그 직후 펼쳐진 광경에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대비되다 보니 오히려  어울려 보이는 두 여자가 문 밖에 있었다. 먼지투성이 라기 보다도 그냥 먼지덩어리 상태인 그녀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곯아떨어질 것처럼 피곤에 절은 기색이 역력했다.

우습게도 덩치와 정반대로 작은 쪽이 큰 쪽을 질질 끌다시피 부축하고 있었지만, 외모보정 덕택인지 그럴듯한 그림이 나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란에게 찌르는 듯 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비켜요.”
“아, 네네.”

서슬 퍼런 기세에 해란이 옆으로 비켜서자 작은 여자는 자신보다 머리통 두 개 분량만큼 커 보이는 여자를 질질 끌고 소파까지 걸어갔다. 소파에 도달하자마자 여자를 굴려 소파위에 눕힌 작은 여자는 그 위에 엎어져버렸다. 깔린 쪽이 잠깐 움찔했지만 반항할 기력도 없는 것인지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사무실의 주인인 류 현은 멀뚱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입을  기력이 있는 이 중에서 유일하게 사태를 정리할 수 있는 그가 침묵하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편함을 견디다 못한 해란이 뭐라고 하려고 하던 때였다.


“진짜 못됐어. 스카웃 과정에서 좀 튕겼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게 어디 있어? 재계약 기간만 되면 내가..”
“우리 팀은 그런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 운운한 건 까먹었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대우가 나쁘면 소속 옮기고 은혜는 다른 방법으로 갚을 수도 있죠!”
“대우가 나쁘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직장  성추행이라도 한 줄 알겠네. 그리고 그걸 뭘로 갚으시게? 나 키워줄 수 있습니까? 안될 텐데.”
“이익..”

엎어진 채로 웅얼거리는 작은 여자와 류 현이 입씨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해란은 슬쩍 몸을 빼서 문 밖으로 향했다.


‘난 아무것도 못 본거야.’


자신이 생각해도 참 탁월한 결정이었다.

한편, 희란의  위에 엎어져서 웅얼거리던 화련은 어느새 고쳐 앉은 채, 반대편 앉아 있는 류 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류 현이 시큰둥하게 마주보고만 있자 결국 그녀가 먼저 운을 떼었다.

“나한테  너무 한다는 생각 안 들어요?”
“뭐가 말입니까.”
“얘 덩치를 봐요.”

화련은 소파와 하나 된 것 같은 희란을 가리키고 있었다. 류 현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발언 같은 여자로서 괜찮은 겁니까. 팀원끼리 헐뜯고 그러는  좀.”
“아니! 내 말은! 얘랑  체격차를 좀 보라고요!”


안 그래도 작은 화련이였다. 여자치고  편인 희란의 옆에 서면 단순히 작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약해보이기 까지 하다. 그런 화련이 자기보다 머리통 두 개 분량은  큰 희란을 부축한다는 건 육체적, 정신적 학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원래라면 플레이어인 그녀가 느낄 곤혹스러움은 정신적인 쪽이 더 컸겠지만, 화련도, 희란도 마력은 바닥에 체력도 거덜 난 상태였다. 좀 더 경험이 많은 화련 쪽이 정신줄을  더 붙잡고 있었을 뿐.


실제로 그녀는 콜택시에서 내려서 건물 입구에 들어서는  짧은 시간 동안에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택시기사가 오는 내내 룸미러로 힐끔 거린 건 덤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녀가 그런 일까지 당하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현은 한 번 갸웃하고는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반쯤은 나름 농담한답시고 내뱉은 말이었다.

“콤플렉스가 있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직장 동료 키를 줄이자는 건 좀..”
“진짜 이 인간이! 나한테 무슨 유감 있어서 이래요!”


결국 화련이 폭발했다.

***
치이익.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무실에서 보일 법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두 명이 나가서 하는 회식을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류 현은 무표정하게 고기를 뒤집어놓고는 말했다.

그의 맞은 편 소파에는 두 여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근처 찜질방에서 말 그대로 먼지를 긁어내고 온 그녀들은 고기냄새가 베는 건 신경도 안 쓰이는  소파와 하나 된 채로 미동도 없었다.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이는 두 여자는 자매처럼 딱 붙은 채로 눈알만 굴려서 류 현을 바라봤다.

“당장 제가 훈련에 끼어봤자. 자멸테크 밖에  됩니다.”
“왠지 왜 그런지 알 거 같지만 일단 물어볼게요. 왜요?”
“중계기 역할을 하는 희란 씨가 버티질 못합니다.”
“으아아..”

화련이 앓는 소리를 내며 희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희란이 물었다.

“그럼 그린 던전은 무리 아닐까요? 그..가기 싫다는 게 아니라요..”
“아주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희란 씨가 못 견딜 정도로 마력이 흘러 들어가는 게 문제이니, 제 쪽에서 조절하면 됩니다. 정 안될 거 같으면 저 혼자 정리해버리는 수도 있고요. 스폰서가 따라붙겠지만, 너무 부담 안가지셔도 됩니다. 대충 얼굴만 확인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 그럼 훈련도 그런 식으로 조절해서 같이 하면 되잖아요.”


류 현의 말에 화련이 고개를 퍼뜩 들며 말꼬리를 잡았다. 언제 퍼졌냐는 듯이 그녀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어떻게든지 류 현도 구르는 꼴을 봐야겠다고 말하는 듯 했다.

“훈련이  훈련입니까. 그런 식으로 이거저거 가려서 해서 뭐가 남는다고. 그리고 처음부터 제 마력통에 기대서 마법난사하면 혼자 있을 때 기본적인  조절도 못해서 금방 퍼질 겁니다. 자기 바닥을 한 번 봐야, 부족한 점 채울 수도 있고요.”
“..잘 났어 정말. 마스터 마력통 커서 좋겠네요. 됐어요?”


다시 고개를 파묻는 화련을 류 현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기회만 오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틱틱 거리면서 화련은 그를 팀장이 아니라 꼬박꼬박 마스터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어도 말없이 노려보고 말 뿐이라 류 현은 캐묻는 걸 포기했다.


“어쨌든 당분간 훈련은 그런 식으로 계속 할 겁니다. 희란 씨가 좀 더 익숙해지면 2단 연결도 시험해  거고요. 미세한 컨트롤에 익숙해져야 큰 것도 쉽게 쓰는 겁니다.”
“누가 몰라서 그래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마스터 보다 경력은 길거든요?”
“아시는 분이 그럼 왜 그러십니까?”
“훈련이 싫다는 게 아니라..아, 됐어요.”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화련을 희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려 봤다.  현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고기나 뒤적거릴 뿐이었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다 됐으니 먹기나 합시다.”


그런 화련도 고기의 유혹을 버티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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