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탐식마(貪食魔)
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굳어있는 상황을 정리하고 나선 건 류 현이었다.
“저기..누구 신지?”
눈높이를 맞추려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류 현은 정장 여자가 상체를 확 일으키자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 저..기억 안 나시나요?”
“제가 사람 얼굴 기억하는 건 영 젬병이라서요. 죄송하지만 기억이 잘..”
“아, 그렇군요.”
정장여자가 눈에 띄게 실망하자 류 현은 난처하다는 듯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다시금 불편한 정적이 찾아왔다. 정장여자는 한참동안 우물거린 끝에 입을 떼었다.
“그러니까..땅돼지 때 구해주신..”
“땅돼지? 아! 그 때 그..”
“네! 오희란이라고 합니다!”
“아, 예..오희란 씨.”
너무 눈에 띄게 기뻐하자 류 현은 오히려 떨떠름해졌다. 혹여 자신이 제대로 기억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간 어떻게 반응 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계속 서있는 것도 뭣하니,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일단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세 사람은 소파에 앉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불편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각자의 앞에 놓인 인스턴트커피만 식어갔다.
가장 불편해 하고 있는 게 백화련 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지만 남은 두 사람 중 누가 더 편한지는 당사자들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졸지에 태풍의 눈 신세가 된 류 현은 오희란을 힐끔거리면서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얼핏 본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아직 협회에 사무실 주소를 등록조차 안했는데 어떻게 찾아온 것일까. 류 현 개인의 이름이 알려진 상황도 아니고 협회조차 공식적으로는 사무실 위치를 모른다. 사무실 계약도 그의 이름으로 한 것도 아니니 단서라고는 없다.
‘거기에 비밀번호까지 알아?’
현재 사무실 문 비밀번호를 아는 건 세 사람이다. 사무실을 제공한 서해란, 사무실의 실질적인 주인인 류 현, 그리고 그의 누나.
‘설마..’
“저희 누나한테 듣고 찾아오신 겁니까?”
“네, 다른 연락처는 아는 게 없고, 누나 분께 연락드렸더니 한 번 보자고 하셔서..”
‘날 잡아서 누나랑 얘기 좀 해야겠네.’
누나 소리가 나오자 옆에 앉아있던 화련의 눈초리가 기이해졌지만 류 현은 눈치채지 못했다.
서해란이 다녀간 뒤로 그와 세아는 냉전 상태였다. 류 현이 화련을 쫓아다니면서 그걸 해소할 기회가 좀처럼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 달 째 해소될 기미 없이 지속되는 중이다.
내버려두고 싶어서 내버려 둔 건 아니었다. 단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감이 안 잡혀서 손 놓고 있는 것 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한마디도 안하고.’
세아로서는 오희란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류 현에게 자신이 아직 화났음을 표현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평소의 류세아라면 아무리 어린 동생이라도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의 의사부터 묻고 나서 결정했을 테니까.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걸 말하지도 않고 사무실 비밀번호까지 알려주고 밀어 넣는 짓은 생각도 안 했을 테지.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이가 이런 극렬한 반대의사를 표하고 나서니 당황스러운 걸 넘어서 서운한 감정도 조금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 오신건지? 병원비 얘기라면 그 때 끝난 걸로 기억하는데요.”
“네에,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면 제 마음이 조금 그래서..”
‘이 아가씨도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네.’
“이미 끝난 이야기고, 그 일에 대해서 뭘 정산하려고 해도 제가 좀 바빠서 말이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아서요.”
류 현은 뚱한 표정으로 우물거리고 있는 오희란을 바라보았다.
‘아니 보통 목숨 빚 같은 거 없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나? 뭐 뜯어먹으려고 이러는 건 아닌 거 같고. 대체 목적이 뭐야?’
“사실 제가 당장은 돈도 별로 없고..플레이어가 되셨으니까, 제가 월급으로 돈으로 갚는 것도 의미가 없는 거 같아서..거기다가 저도 지연각성? 그것 때문에 잘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쭉 생각해봤거든요.”
“아, 예..”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하나 밖에 없었어요. 몸뚱이만 남았으니까 몸으로 갚을 수 밖에 없다고.”
아무래도 눈앞의 아가씨에겐 빚 같은 건 없다라는 소리만 걸러듣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비밀번호를 알았다고는 해도 남의 빈 사무실에 들어와서 기다리는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류 현은 이미 설득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자신의 말주변으로는 도저히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세아가 거들어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세아와 자신은 지금 냉전 중이다.
류 현이 자신을 던전에 던져 넣고 겁을 준 다음에 쫓아낼까 하고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오희란은 계속 말했다.
“지연각성이 끝나고 나서 검사를 받았어요. 협회에서 능력을 파악하고 협회 공증 받는 게 플레이어 본인 안전에 좋고 길드에 어필하기 좋다고 해서.”
‘협회 놈들 약 파는 거에 넘어가는 인간이 있긴 있구나.’
공식적으로 플레이어 협회는 플레이어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플레이어들은 협회에서 발급하는 위치추적 기능이 붙어있는 팔찌를 언제나 착용해야하고, 2분기 마다 검진을 받아서 협회에 결과를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거기에 협회가 괴수사체 유통의 큰 손 중 하나이니 간접적인 영향력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협회에 플레이어가 본인의 능력의 자세한 스펙을 제공할 의무는 없다.
범죄수사를 위해서는 자세한 스펙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플레이어 능력이 겹치는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고 염동력이나 신체능력 증폭 계열은 개인 특색을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의미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영향력을 늘리고, 플레이어 능력에 대한 연구 자료가 필요한 협회는 막 각성한 새내기 플레이어들에게 이런 식의 수작을 부리곤 했다. 너무 유명한 사실이라서 이제 넘어가는 이가 거의 없지만.
“그래서요?”
“검사 끝나고 나니까. 협회분이 협회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고 막..”
‘엥?’
협회의 채용방법은 기본적으로 비공개다. 크기는 작지만 실력은 알만한 길드나 소속 없이 떠도는 무적자, 소규모 팀에게 제의를 넣고 스카웃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건 검증된 자가 아니면 쓰지 않는 다는 말과 상통한다.
과거 류 현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협회 자체는 괴멸상태였지만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팀의 실력은 진짜였다.
그 협회가 방침을 철회하고 막 각성한 새내기를 스카웃 시도했다? 류 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우고 상체를 그녀 쪽으로 가까이했다. 오희란이 움찔하며 뒤로 몸을 뺐다.
“협회에서 귀하를 스카웃하려고 했단 말씀입니까?”
“예에..여기 이런 명함도..”
류 현은 받아든 명함을 왼 손목의 은백색 팔찌에 갖다 대었다. 플라스틱 카드 같은 명함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는 명함의 주인이 플레이어 협회 한국지부 인사과 과장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명함을 오희란에게 돌려주었다.
‘대체 무슨 능력을 개화했길래..’
소심하면서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센 여자가 순식간에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협회는 희귀능력자가 발견되어도 지원을 해줄지언정 바로 조직 속에 편입시키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보장된다는 뜻이다. 당장 전력으로 계산해도 될 정도로 유용한 능력이거나 아니면 막 각성한 지금 봐도 엄청난 포텐을 지니고 있거나. 류 현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여기까지 오신 건 협회의 제안을 거절 하신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오희란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류 현은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실례라는 거 알고 있지만 귀하의 능력에 대해서 조금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러려고 온 걸요. 제가 빚을 갚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오희란이 한참 무어라 주절거렸지만 류 현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속에 있는 말을 전부 토해냈는지 가슴을 쓸어내린 희란이 류 현에게 물었다.
“여기서 보여드리면 되나요?”
“예?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무슨 능력인지 듣긴 했는데 저도 정확하게 이해 한 게 아니라서요..버프계열 같은 거니까. 걸어드리면 무슨 능력인지 아실 거예요.”
류 현이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희란은 시작하는 게 아니라 류 현 옆에 앉아있던 화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화련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왜, 왜 그러시죠?”
“그게..두 사람이 필요해요.”
“버프 거는 데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예에, 그게..정확히는 버프가 아니고 비슷한 거라서..음, 아무튼 걸어드리면 아시게 될 거에요.”
버프를 거는 데 피시전자가 두 명 필요하다니 그도 금시초문이었다. 조건이 비슷한 건 직접 겪어본 적이 있긴 했다. 용잡이 팀원 중 한 명이 쓰던 능력 중에 그런 게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떠오른 동료의 모습을 그는 고개를 저어 지웠다. 그녀는 아직 일반인일 테니까. 오랜 기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기억은 좀 부정확한 면이 많았지만 오희란과 그녀는 지나온 행보가 조금씩 달랐다.
어찌 보면 충분히 의심할 법도 했지만 류 현은 부정했다.
‘일이 그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
갑작스러운 행운을 기대하기에는 지나온 그의 인생이 행운과 담을 쌓고 있었으니까.
화련이 조금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류 현을 바라봤다. 그는 괜찮을 거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여주었다.
“그럼, 시작할 게요.”
양 손을 각각 화련과 류 현에게 내뻗은 오희란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자신 내면으로 빠져 들어가는 데 별 어려움 없이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처음 변화를 감지한 건 오희란이 아닌 류 현이었다. 그는 희란이 자신의 능력을 발동했다고 확신하기도 전에 그녀가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갑자기 가슴 한복판에 강철관이 생겨난 것 같은 느낌. 그가 이전 생에서도 수없이 느껴본 것이었다.
‘미친..이거 진짜..’
그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터져 나왔다.
“어어? 이거 왜 이래요? 마력이 막 쏟아져 들어오..”
화련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오희란의 팔을 낚아챘다. 오희란은 실풀린 인형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품으로 딸려들어왔다.
그러자 가슴에 생겼던 이물감이 사라졌고,
“어? 갑자기 흩어졌네? 류 현 씨 또 뭐하는 거에요!”
화련이 뒤늦게 류 현의 품안에 들어가 있는 오희란을 보고 새된 소리를 내었다. 오희란은 반쯤 풀린 눈으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화련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희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괜찮습니까? 이게 몇 개에요?”
류 현이 그런 오희란의 눈앞에 손가락을 흔들며 물었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희란은 배시시 웃더니 그대로 기절했다.
옆에서 꺅꺅거리는 화련을 밀어내고, 희란을 끌어안은 채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류 현은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아침부터 첫 영입에 성공한 팀원이랑 말싸움을 하고, 어디 나사 몇 개가 풀린 것 같은 여자가 찾아와서 연달아 그를 괴롭혀대었다.
그래서 일진이 사나운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철회해야 할 것 같다.
‘찾았다. 링커.’
류 현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화련의 표정이 썩어들어 가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