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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탐식마(貪食魔) (20/429)



〈 20화 〉탐식마(貪食魔)

“제가 본 바에 의하면 화련 씨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마력량 미달입니다.”
“그러니까, 마력량을 채우면 되는 일이죠.”
“그림자 두꺼비로 채우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직접 겪어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그건 용량자체를 늘리는 것 보다는 충전 쪽에 가깝죠.”
“제가 채워드리면 됩니다. 예, 이것도 제 능력의 일부입니다. 아직 정식팀원이   아니니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그렇군요.”
“밖에서도 채울 수 있습니다만. 갑자기 벽을 넘을 경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몇 번 들어보셨겠지만 갑자기 벽을 넘은 플레이어 중에서 폭주해서 인명피해를 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사람이랑 부술 만한  없는 곳에서 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근처에 클리어 된지 얼마 안  레드 던전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던전에는  들어가요.”


열성적으로 던전행을 설득하던 류 현은 화련의 말 몇 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라  말을 붙이기에는 화련의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 류 현 본인도 설득이 실패한 걸 그다지 아쉬워하는 눈치도 아니었지만.

“아직  그 쪽을 다 믿기 힘들어요. 그런 상태에서 던전에 같이 들어갈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요.”
“그러시다면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폭주가지고 더 이상 강요할 수는 없겠죠.”

세상에 거짓말 하나를 늘렸지만 류 현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였다.

첫 벽을 뚫고 나서 화려하게 날뛰었다는 걸 이전 생에 그녀에게서 들었었다. 그녀의 별칭인 에스퍼 라는 이름이 붙게 만든 사건이었고, 류 현도 되도록 눈에 띄는 사건은 막고 싶었지만 그녀를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한 것도 말주변 없는 그로서는 굉장히 선전한 것이니까.

아니, 선전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성향이 아니었으면 진작 구치소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뭐 폭주 방지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해도 내가 커버할 수 있을테니까.  상관은 없겠지.’


화련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생각을 하는 류 현이었다.

‘하여튼 진짜 대단한 인간이라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헬퍼나 하고 말텐데.’

화련의 입장에서야 헬퍼가 미래가 없는 보직이지 보통 플레이어들에게는 나름 꿈의 보직이다. 고정 고객길드가 있을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실제로 그녀의 수입은 개인실에 간병인까지 붙인 이모의 입원생활을 문제없이 유지할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사기꾼 냄새가 풀풀 나는 발언이라도 벽을 뚫을 수 있다고 하면 일단 듣고 볼 수밖에 없는, 작은 몸집을 꽉 채우고 있는 듯 한 편집증에 가까운 향상심. 그것이 그녀를 현재 위치에 머무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이전 생에도 그랬듯이 그녀는 아마 류 현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벽을 뚫을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류 현이 용잡이 팀에 필수 영입대상  중 하나에 그녀를 넣은 건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런 그녀의 위를 향한 욕구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이전 생보다 강한 패가 필요했고, 그 때보다 더 빨리 첫 번째 벽을 넘은 그녀는 이전 생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누가 닦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자신이 곁에 있으니  이상의 벽도 없을 테지.


혹여 자신이 듣지 못한 벽이 있더라도 그녀는 뚫어낼 것이다.

이전 생의 에스퍼 백화련은 자력으로 용잡이 팀에 스카웃될 수준까지 올라온 괴물이었으니까.


‘이번에는  같은 건 나한테 맡기고 어디 마음껏 올라가 보라고.’


류 현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마땅한 장소가...폐교 운동장이라도 수배해봐야겠군요. 운동장은 괜찮으십니까?”
“네, 거기라면 괜찮겠네요.”
“그럼, 수배되든  되든 삼일 안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처 좀 받을  있을까요?”


***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폐교 운동장 한가운데였다. 보통 사람이면 바로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화련은 내밀어진 손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손만 잡으면 된다고요?”
“접촉 면적이 넓을수록 편하긴 합니다만, 다른 부분을 제가 잡겠다고 하면 거절하실  아닙니까.”
“당연하죠!”


화련이 짐승 보듯이 그를 노려봤지만  현은 멀뚱히 마주볼 뿐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류 현이 한마디 했다.


“안 하실 겁니까?”
“해요! 하는데..”

화련이 열성적으로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런다고 없던 독심술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이걸 진짜 해야돼? 저 스토커 말만 믿고?’


이성은 이런 야밤에 폐교 운동장에서 할  범죄행위 밖에 없으니 당장 집어치우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 안의 욕구는 뭘 망설이고 있냐고 닦달해온다.


결국 이긴 건 욕구였다.

“그럼..가요.”
“예, 오십시오. 이러다가  빠질 거 같으니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류 현을 한 번 흘겨준 후 화련은 류 현의 손을 맞잡았다. 가벼운 소름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럼 시작합니다.”

류 현의 말에 화련이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변화라고 해봤자,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지는 류 현의 체온 뿐.

화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류 현에게 향하려고 할 때 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딘가에서 뻗어 나와 그녀의 왼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화련은 기겁하며 손을 팔을 빼려고 했지만  현과 맞잡은 오른 손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움찔거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 둘  늘어나 그녀의 왼팔을 붙잡아왔다.

화련은 비명을 지르고자 했으나 언제 막혔는지 목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녀가 미약한 희망을 품고 류 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곳에는 시커먼 불꽃이 있었다. 주변의 빛을 불살라 버린 듯한 시커먼 불꽃은 맞잡은 손을 통해서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검은 불꽃은 그냥 타고 올라오지 않았다. 불꽃이 지나친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팔의 형태를  살덩이는 남아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팔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맞잡고 있던 손의 감각도, 타는 듯한 아픔도,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편  숫자를 불리며 왼팔을 타고 올라오던 보이지 않은 손은 이미 어깨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어깨까지 타고 올라온 보이지 않는 손들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는지 더욱 빠른 속도로 목을 타고 올라왔다. 숨이 막히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화련은 얼굴까지 올라오면 끝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리 생각한 순간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화련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류 현은 시체처럼  늘진 여자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상쩍기 그지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런 걸 신경  여유가 없었다.


‘끄응, 좀 더 수련하고 찾아올  그랬나.’

평온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류 현은 오랜만에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행여나 화련을 집어삼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플레이어나 괴수나 그에게는 집어삼켜서 마력으로 삼을  있는 건 똑같았으니까. 오히려 플레이어 쪽이 마력만 뺏기는  쉬웠다.

‘아냐, 2단계 개발까지 끝내고 왔으면 진짜로 마력만 빨아먹었을 지도 몰라.’

화련에게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의 능력을 다 아는  지껄였지만, 실제로 류 현은 자신의 능력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니, 아는 걸 꺼렸다. 그가 생각해도 그의 능력은 뒤로 갈수록 괴물에 가까워졌으니까. 마력을 탐하는 괴물.

‘일하는 중에 무슨  생각이야. 집중하자 집중.’


고개를 내젓고 다시 화련을 내려다본 류 현은 그녀를 뒤덮고 있는 시커먼 마력덩어리에 숨을 삼켰다.

그건 단순히 마력덩어리라고 지칭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무시무시한 탐욕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류 현이 긴장을 끈을 잠깐이라도 놓는다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집중해야지. 실수로 동료를 쳐 먹다니 농담거리도 안된다고.’

류 현은 천천히 그녀를 뒤덮고 있는 시커먼 마력덩어리에서 ‘탐욕’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한줄기 마력을 짜내서 천천히 내뻗는다. 마침내 맞닿은 ‘탐욕’을 달래듯이 유혹한다. 이리로 와. 이쪽이  커다란 먹잇감이 있어. 그래, 천천히. 옳지, 그렇게.


작업이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다. 류 현이 미끼로 짜낸 마력줄기는 계속해서 뜯어 먹혔고, 연결이 끊어지면 여태껏 해온 작업이 무상하게 ‘탐욕’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류 현은 인내심을 가지고 작업을 반복했다. 연결이 끊어져도 급하기 다시 접근하지 않았고, 끌어들인 ‘탐욕’을 갈무리 한 후에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작업이 끝났을 때는 그의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해 진 후였다.

“후, 두 번은 못해 먹을 짓이다.”

대충 퍼질러 앉은 다음  현은 아직도 손을 맞잡고 있는 화련을 살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었다.


일부러 ‘탐욕’을 늦게 끌어 모아서 기절시킨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알았다면 노발대발 했겠지만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은  그의 심정이었다. 이미 귀찮은 일에 너무 많이 발을 담근 상태였다.

“링커만 있었어도...아, 진짜 그 인간은 또 어떻게 찾지.”

푸념과 함께 뒷머리를 벅벅 긁던 류 현은 한숨과 함께 그것들을 갈무리 한 후 몸을 일으켰다. 고민은  상황을 정리한 후에 해도 된다.


“음..이 근처에 호텔이 있었던가. 오면서  거 같긴 했는데.”


화련을 둘러업으며 그녀가 들었다면 기겁했을 말을 중얼거리는 그였다.


***


뚜벅뚜벅. 정확하게 겹치는 발소리가 정겹기까지 하다. 두 발소리의 주인공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류 현과 백화련은 거리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로 잰걸음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서로를 따라한 것처럼 짜증이 가득했고, 그게 사람들이 둘을 돌아보는 이유였다. 겉보기에는 싸운 연인 같아 보였으니까. 작고 인형 같은 화련의 외형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돋웠다.

류 현이 사 층짜리 회백색 건물 앞에 멈춰 서자 화련도 따라 멈춰 섰다.

류 현은 지난 한달 동안 화련을 쫓아다니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서해란에게 부탁해서 임시 사무실도 구하고, 화련에게 내놓은 그림자 두꺼비를 잡기 위해서 던전을 전전하는 등 꽤나 바쁜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눈앞의  건물 2층 전체가 그 결과물 중 하나였다. 서해란에게서 거의 뜯어내다시피 한 용잡이 팀 임시 사무실.


류 현은 감회를 느껴볼 겨를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련이 뒤따르는 걸 발소리로 확인하자마자 류 현은 아까 하다만 말싸움을 재개했다.


“아니,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  못한 게 없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내가 미치고 폴짝 뛰겠네! 그럼 그게 잘한 짓이라는 거예요?”
“누가 들으면 내가 몹쓸  한 줄 알겠네. 아니 잠자리 구해주고 곱게 눕혀놓고 나왔을 뿐인데 내가 왜 욕을 들어먹어야 합니까?”
“그럼 정신없는 여자를 혼자 호텔방에 던져놓고  게 잘  짓이에요?”
“그럼 거기서 내가   해야 합니까?  옆에 앉아서 동화책이라도 읽어줬어야 합니까?”
“아니 진짜 이 남자가!”
“시술 끝나고 지쳐서 뻗었길래, 좋은 호텔방 잡아서 눕혀놓고 나온 게 그리 큰 잘못인 줄 처음 알았네.”
“류 현씨, 당신 나 스카웃  생각 없죠? 그냥 시비 걸러 온 거죠?”
“그렇게 생각한 거면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까? 그냥 쪽지 쌩까면  거.”
“누굴 은혜도 모르는 금수로 알아요?”
“은혜인 줄은 아시니 다행이네.”


흥하고 콧방귀를 끼며 류 현은 2층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그는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기어코 한마디 했다.

“자연을 벗 삼아서 누워있는  더 좋은 모양이신데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죠.”
“뭐에요?”

화련이 발끈해서 다시 쏘아붙이려던 그 때였다.


“응?”
“어? 여기 우리 사무실이라고  그랬어요?”

문이 열리자 둘을 반긴 것은   사무실이 아니라, 늘씬한 정장차림의 여성이었다. 키가 거의 류 현과 비슷해보였다.
정장차림의 여자는 류 현을 발견하자 꾸벅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 오랜만에 뵙네요. 안녕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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