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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탐식마(貪食魔) (18/429)



〈 18화 〉탐식마(貪食魔)

“한 달에 한 번 블루던전 원정에 참가? 해란 씨? 저랑 얘기할 때는 이런 소리 안하셨잖아요.”
“아, 세아 씨. 그게 말이죠..”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변명을 늘여놓으려던 해란과 세아 사이로 류 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류 현은 세아의 손에서 계약서를 뺏어들더니 하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내가 넣자고 한 거야. 여기 보이지? 한 달에 1회 이상 블루던전 원정 참가시 성과급 차등지급. 성과급 최대 5억, 괴수 부산물 15%지분 인정. 어차피 돌아야하는  교환조건으로 확실하게 넣자고 했어.  돈 받아서 좋고, 저쪽은 나 확실히 뽑아먹을 수 있어서 좋고.”
“현이 네가 그런 큰돈이 왜 필요해? 블루던전이면 그거 아니니? 그 퍼플던전 바로 아래..”
“두 단계 밑이야.”
“어쨌든, 대체 왜 그런 위험한 곳을 자청해서 들어가겠다는 거야!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 이런 큰돈까지 요구하면서.”
“왜 필요가 없어. 돈 있으면 좋지. 누난 돈 싫어?”
“싫어. 동생 팔아서 받는 돈은 억만금이라도 싫어.”
“에이,  오버한다. 뭘 동생을 팔아. 정당한 임금이지.”
“괴수랑 싸워서 받는 거면서 뭐가 달라!”

류 현은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가 세아의 말이 끝나자 허허 웃으면서 세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누나.”
“몰라, 또 네 마음대로 할 거면서 왜 이런 걸 보여줘? 5억보고 누나가 좋아라 할  알았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에이, 아까 했던  때문에 아직도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응? 그 갑자기 그런 일당하고 누나가 저쪽 편들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욱해서..”
“됐어. 마음에도 없는 말 하려고 노력 안 해도 돼. 싸인 필요해? 해 줄게.”


티격태격 하는 남매 사이에 끼인 채 애꿎은 커피만 휘젓고 있던 서해란에게 병풍처럼 서있던 남자가 속삭였다.

“어지간해서는 안 끝날  같은데, 애들보고 근처 피시 방이라도 가있으라고 할까요? 그것들 그냥 밖에 풀어놓으려니까 마음이 영. 안 그래도 아까 저 친구 하는 거 보고 흥분상태던데.”


해란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줄도 모르고 계속 떠들고 있었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원래 개인사정 정리하고 나서 계약서 작성해야하는 건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류  씨야 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조건이 좀...”
“계약금 5억 받았고, 대가로 내가 블루 던전 버스 태워주는 것도 아니고 원정대 끼는 것뿐이잖습니까. 덤으로 그 괴상한 모임인지 뭔지 감시의 눈도 피하고. 여기서  바라면 날강도죠. 스폰이니 어쩌니 했지만 아직까진 그린던전 솔플하는 수준이고.”
“팀을 꾸리실거라고 하셨죠.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해서요.”
“당장 완편 하겠다는 건 아니고, 영입대상 물색을 위한 자본금이죠. 개인적으로 쓸 곳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다른 지원은 별의미도 없을 거 같으니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다른  그 부분은 확실히 서포팅 해 드릴 테니까요.”
“예,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가 뒤돌아서 떠나는 서해란을 바라보며 류 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죽어라 치고받았던 여자가 이번에는 내 첫 번째 스폰서라. 진짜 지랄 맞은 인생이야.’

그리고 자신의 집을 돌아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세아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은 상태였다. 계약서에 싸인은 해줬으니 반 정도는 넘어왔다고 봐야겠지만 남은 반이 괴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테니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도 누나가 살아있으니까 누릴  있는 호사지. 불평 말고 누나나  달래자고.’


그럼에도 발걸음이 무거운 건 그도 별  없었다.

***


노을이 스러지고 있는 산중턱에는 때 아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던전 입구 주변에는 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는지 조금은 지저분한 행색의 무리가 하산 준비로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화련  덕분에 사고 없이 무사히 끝냈네요.”
“아니에요, 모두들 열심히 한 덕이죠.”
“에이, 괜히 빼시긴. 저기 저 아저씨는 화련 씨 아니었으면 지금쯤 응급실행 이었을 텐데. 좀 뻐기셔도 되요. 아저씨, 아무  안하고 그냥 갈 거예요?”
“니가 나 구해줬냐? 지가 생색은  내네.”

자신에게로 시선이 모이자 중년 남자는 견디다 못해 자신보다 머리통 두 개는 작아 보이는 여성의 앞에 서고야 말았다.


“그 때, 덕분에 외팔뚝이 신세를 면했지. 고맙수. 그리고 멋대로 행동 했던  미안합니다.”
“아뇨, 그게 제 역할인걸요. 오히려 먼저 위험을 감지 못한 게 죄송할 따름이죠. 손목 부은 건 좀 괜찮으세요?”
“이 정도야 외팔뚝이가 되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안 쓰셔도 되우. 벌 받은 셈 치면 되니.”
“그래도 꼭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셔야 해요. 던전 내부에서 다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냥 넘기셨다가는 큰일 납니다.”
“꼭 그리 하지요.”

플레이어 무리가 우르르 그녀를 지나쳐가자 이번에는 훤칠한 청년이 다가왔다. 아까 전 중년남자보다 더  보이는 청년이 앞에 서자 여자는 거의 어린아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잔여금입니다.”
“네, 액수 맞네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저기, 화련 씨.”
“네?”
“저번에 제가 드렸던 제안 말입니다..”
“아, 죄송해요. 전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거든요. 제안은 감사합니다.”
“아..그러신가요. 혹여 마음이 바뀌시면 꼭 연락주시길. 꼭 제 팀이 아니라 원하신다면 저희길드 다른 팀에 추천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네, 마음이 바뀌면 그러도록 할 게요.”


웃으며 뒤돌아섰지만 남자는 꽤나 상심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짐꾼무리 쪽으로 향했다. 화련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스카웃 제안은  많이 받아봤지만 거절할 때마다 마음이 늘 불편했다. 상대에게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들어오는 스카웃 제안은 데려다 키우는 일반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헬퍼로서의 그녀를 스카웃 하려는 거였으니까. 그것도 저급던전을 전전하며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들을 키워줄 헬퍼로 말이다.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초보자들 헬퍼 노릇이나 하고 있는 그녀에게 헬퍼 스카웃 제안은 질 나쁜 농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치 너는 평생  자리에서 헬퍼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끔찍한 건 아마도 그 망상이 사실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는 거였다.

‘며칠정도  쉬어야겠다.’

산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


산을 내려올 때만 해도 화련의 하루 일정은 매우 단순했었다. 헬퍼일을 끝내고 언제나 처럼 이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병문안을 간 뒤에, 맥주 몇 캔을 사들고 귀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원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화련은 자신의 일정에 경찰서 방문을 끼워 넣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병원 정문 앞에는 생판 모르는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성년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바로 신고했을 것이다.

“그  요구를 여기까지 들어줬으면 슬슬 말해줘도 될 거 같은데요. 무슨 용무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찾아온 거죠?”

그녀를 카페까지 끌고 온 장본인은 빨대로 콜라를 휘젓던 걸 멈추고, 빙긋 미소 지었다.  미소에서 그녀는 수상한 냄새 밖에 맡질 못했지만.

“저는 용잡이 팀, 팀장  현이라고 합니다. 아직 명함을 안파서 드릴 명함은 없군요. 귀하를 저희 용잡이 팀에 영입하고 이렇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용잡이 팀이요?”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어제부로 UP(United player)에 등록한 신생팀이니까요.”
“......”

화련은 맞은편의 남자를 지긋이 뜯어보았다. 어디에도 미치광이의 광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미친놈이라도 나 미친놈이요 라고 써 붙이고 다닐 리가 없다.

그녀는 인내심을 조금 더 발휘하기로 했다.

“헬퍼로요? 죄송하지만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있는 게 좋아요.  쪽 팀을 얕봐서가 아니라 헬퍼 영입제안은 전부 거절하고 있거든요.”
“헬퍼라뇨. 그런 보직에 귀하 같은 인재를 소모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그럼...?”
“당연히 정규팀원이죠. 최선을 다해서 귀하의 가능성을 개발해서..”
“됐습니다.”

화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 일이 있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웬 사기꾼 같은 어린놈이 나타나서 속을 뒤집어 놓는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요즘 들어 뜸하다 싶었더니  다시 이런 사기꾼이 다시 엉킬 줄이야.

준척급 유망주 취급을 받으며 ‘산군’에 영입되었다가, 자의로 탈퇴한 이후 무수히 많이 들어봤던 소리다. 목적은 다 달랐지만 사기꾼들은 이런 식으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그녀를 수차례 좌절시켰던 말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서 벽에 가로막힌 화련은 허무맹랑한 소리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헛된 희망에 대한 씁쓸한 교훈만 남겼지만.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헬퍼 스카웃제의가 훨씬 낫다. 적어도 그녀를 속이진 않으니까.

뭐라고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반대로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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