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탐식마(貪食魔)
“한 달에 한 번 블루던전 원정에 참가? 해란 씨? 저랑 얘기할 때는 이런 소리 안하셨잖아요.”
“아, 세아 씨. 그게 말이죠..”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변명을 늘여놓으려던 해란과 세아 사이로 류 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류 현은 세아의 손에서 계약서를 뺏어들더니 하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내가 넣자고 한 거야. 여기 보이지? 한 달에 1회 이상 블루던전 원정 참가시 성과급 차등지급. 성과급 최대 5억, 괴수 부산물 15%지분 인정. 어차피 돌아야하는 거 교환조건으로 확실하게 넣자고 했어. 난 돈 받아서 좋고, 저쪽은 나 확실히 뽑아먹을 수 있어서 좋고.”
“현이 네가 그런 큰돈이 왜 필요해? 블루던전이면 그거 아니니? 그 퍼플던전 바로 아래..”
“두 단계 밑이야.”
“어쨌든, 대체 왜 그런 위험한 곳을 자청해서 들어가겠다는 거야!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 이런 큰돈까지 요구하면서.”
“왜 필요가 없어. 돈 있으면 좋지. 누난 돈 싫어?”
“싫어. 동생 팔아서 받는 돈은 억만금이라도 싫어.”
“에이, 또 오버한다. 뭘 동생을 팔아. 정당한 임금이지.”
“괴수랑 싸워서 받는 거면서 뭐가 달라!”
류 현은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가 세아의 말이 끝나자 허허 웃으면서 세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누나.”
“몰라, 또 네 마음대로 할 거면서 왜 이런 걸 보여줘? 5억보고 누나가 좋아라 할 줄 알았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에이, 아까 했던 말 때문에 아직도 화났어? 내가 잘못했어. 응? 그 갑자기 그런 일당하고 누나가 저쪽 편들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욱해서..”
“됐어. 마음에도 없는 말 하려고 노력 안 해도 돼. 싸인 필요해? 해 줄게.”
티격태격 하는 남매 사이에 끼인 채 애꿎은 커피만 휘젓고 있던 서해란에게 병풍처럼 서있던 남자가 속삭였다.
“어지간해서는 안 끝날 거 같은데, 애들보고 근처 피시 방이라도 가있으라고 할까요? 그것들 그냥 밖에 풀어놓으려니까 마음이 영. 안 그래도 아까 저 친구 하는 거 보고 흥분상태던데.”
해란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계속 떠들고 있었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원래 개인사정 정리하고 나서 계약서 작성해야하는 건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류 현 씨야 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조건이 좀...”
“계약금 5억 받았고, 대가로 내가 블루 던전 버스 태워주는 것도 아니고 원정대 끼는 것뿐이잖습니까. 덤으로 그 괴상한 모임인지 뭔지 감시의 눈도 피하고. 여기서 더 바라면 날강도죠. 스폰이니 어쩌니 했지만 아직까진 그린던전 솔플하는 수준이고.”
“팀을 꾸리실거라고 하셨죠.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해서요.”
“당장 완편 하겠다는 건 아니고, 영입대상 물색을 위한 자본금이죠. 개인적으로 쓸 곳도 좀 있고요.”
“알겠습니다. 다른 지원은 별의미도 없을 거 같으니 더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다른 건 그 부분은 확실히 서포팅 해 드릴 테니까요.”
“예,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가 뒤돌아서 떠나는 서해란을 바라보며 류 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죽어라 치고받았던 여자가 이번에는 내 첫 번째 스폰서라. 진짜 지랄 맞은 인생이야.’
그리고 자신의 집을 돌아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세아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은 상태였다. 계약서에 싸인은 해줬으니 반 정도는 넘어왔다고 봐야겠지만 남은 반이 괴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 테니 설득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이것도 누나가 살아있으니까 누릴 수 있는 호사지. 불평 말고 누나나 잘 달래자고.’
그럼에도 발걸음이 무거운 건 그도 별 수 없었다.
***
노을이 스러지고 있는 산중턱에는 때 아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던전 입구 주변에는 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는지 조금은 지저분한 행색의 무리가 하산 준비로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화련 씨 덕분에 사고 없이 무사히 끝냈네요.”
“아니에요, 모두들 열심히 한 덕이죠.”
“에이, 괜히 빼시긴. 저기 저 아저씨는 화련 씨 아니었으면 지금쯤 응급실행 이었을 텐데. 좀 뻐기셔도 되요. 아저씨, 아무 말 안하고 그냥 갈 거예요?”
“니가 나 구해줬냐? 지가 생색은 다 내네.”
자신에게로 시선이 모이자 중년 남자는 견디다 못해 자신보다 머리통 두 개는 작아 보이는 여성의 앞에 서고야 말았다.
“그 때, 덕분에 외팔뚝이 신세를 면했지. 고맙수. 그리고 멋대로 행동 했던 거 미안합니다.”
“아뇨, 그게 제 역할인걸요. 오히려 먼저 위험을 감지 못한 게 죄송할 따름이죠. 손목 부은 건 좀 괜찮으세요?”
“이 정도야 외팔뚝이가 되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안 쓰셔도 되우. 벌 받은 셈 치면 되니.”
“그래도 꼭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셔야 해요. 던전 내부에서 다친 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냥 넘기셨다가는 큰일 납니다.”
“꼭 그리 하지요.”
플레이어 무리가 우르르 그녀를 지나쳐가자 이번에는 훤칠한 청년이 다가왔다. 아까 전 중년남자보다 더 커 보이는 청년이 앞에 서자 여자는 거의 어린아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잔여금입니다.”
“네, 액수 맞네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저기, 화련 씨.”
“네?”
“저번에 제가 드렸던 제안 말입니다..”
“아, 죄송해요. 전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거든요. 제안은 감사합니다.”
“아..그러신가요. 혹여 마음이 바뀌시면 꼭 연락주시길. 꼭 제 팀이 아니라 원하신다면 저희길드 다른 팀에 추천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네, 마음이 바뀌면 그러도록 할 게요.”
웃으며 뒤돌아섰지만 남자는 꽤나 상심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짐꾼무리 쪽으로 향했다. 화련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스카웃 제안은 꽤 많이 받아봤지만 거절할 때마다 마음이 늘 불편했다. 상대에게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들어오는 스카웃 제안은 데려다 키우는 일반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헬퍼로서의 그녀를 스카웃 하려는 거였으니까. 그것도 저급던전을 전전하며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들을 키워줄 헬퍼로 말이다.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초보자들 헬퍼 노릇이나 하고 있는 그녀에게 헬퍼 스카웃 제안은 질 나쁜 농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치 너는 평생 그 자리에서 헬퍼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더 끔찍한 건 아마도 그 망상이 사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는 거였다.
‘며칠정도 좀 쉬어야겠다.’
산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
산을 내려올 때만 해도 화련의 하루 일정은 매우 단순했었다. 헬퍼일을 끝내고 언제나 처럼 이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병문안을 간 뒤에, 맥주 몇 캔을 사들고 귀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원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화련은 자신의 일정에 경찰서 방문을 끼워 넣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병원 정문 앞에는 생판 모르는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성년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바로 신고했을 것이다.
“그 쪽 요구를 여기까지 들어줬으면 슬슬 말해줘도 될 거 같은데요. 무슨 용무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찾아온 거죠?”
그녀를 카페까지 끌고 온 장본인은 빨대로 콜라를 휘젓던 걸 멈추고, 빙긋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서 그녀는 수상한 냄새 밖에 맡질 못했지만.
“저는 용잡이 팀, 팀장 류 현이라고 합니다. 아직 명함을 안파서 드릴 명함은 없군요. 귀하를 저희 용잡이 팀에 영입하고 이렇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용잡이 팀이요?”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어제부로 UP(United player)에 등록한 신생팀이니까요.”
“......”
화련은 맞은편의 남자를 지긋이 뜯어보았다. 어디에도 미치광이의 광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미친놈이라도 나 미친놈이요 라고 써 붙이고 다닐 리가 없다.
그녀는 인내심을 조금 더 발휘하기로 했다.
“헬퍼로요? 죄송하지만 전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있는 게 좋아요. 그 쪽 팀을 얕봐서가 아니라 헬퍼 영입제안은 전부 거절하고 있거든요.”
“헬퍼라뇨. 그런 보직에 귀하 같은 인재를 소모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그럼...?”
“당연히 정규팀원이죠. 최선을 다해서 귀하의 가능성을 개발해서..”
“됐습니다.”
화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 일이 있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웬 사기꾼 같은 어린놈이 나타나서 속을 뒤집어 놓는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요즘 들어 뜸하다 싶었더니 또 다시 이런 사기꾼이 다시 엉킬 줄이야.
준척급 유망주 취급을 받으며 ‘산군’에 영입되었다가, 자의로 탈퇴한 이후 무수히 많이 들어봤던 소리다. 목적은 다 달랐지만 사기꾼들은 이런 식으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그녀를 수차례 좌절시켰던 말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서 벽에 가로막힌 화련은 허무맹랑한 소리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헛된 희망에 대한 씁쓸한 교훈만 남겼지만.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헬퍼 스카웃제의가 훨씬 낫다. 적어도 그녀를 속이진 않으니까.
뭐라고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자신이 내뱉은 말이 정 반대로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