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탐식마(貪食魔) (17/429)



〈 17화 〉탐식마(貪食魔)

“‘산군’에서는 스카웃하고 싶어 하던 상대가 거절하면 곧바로 제거리스트에 올리는 가 봅니다.”


바로 옆에서 세아가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을 내보내고 있었지만 류 현은 무시했다. 평소라면 생각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는  짜증나 있는 상태였다.


바로 맞은편에서 남매의 실랑이를 구경하고 있던 서해란은 지체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무리 누나분의 허락을 맡았다지만 제가 경솔했어요.”
“허락?”

류 현은 여전히 세아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세아가 대답했다.

“시늉만 한다고 했어. 해란 씨가 그러시더라, 현이 네가 현장대행인지 뭔지 안가고 던전 들락거린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산군’소속으로 뛰는 게 훨씬 안전하지 않겠냐고. 현이 너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 여기 사진까지 있어.”


날짜와 시간까지 같이 나와 있는 걸로 봐선 cctv캡쳐본 같았다. 사진속의 류 현은 던전 내부에서나 쓰는 칼이며 단창을 구매하고 있었다. 저번 주 화요일 오전. 류 현이 현장대행 나간다고 집을 나선 날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 증거물이었지만 류 현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렇다고 동생을 공격해도 좋다고 해? 누나, 내 누나 맞아?”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럼 처음부터 거짓말 같은 거 안 했으면 됐잖아!”

 현에게 맞서서 소리치긴 했지만 세아의 목소리는 거의 잠긴 상태였다. 고집스럽게 세아를 보지 않던  현도 돌아보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류 현은 곧바로 세아를 돌아본 걸 후회했다. 그의 누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건 없잖아.”
“안 울었어.”
“그래, 안 울었어. 나를 공격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너...정말..대체 왜 이러니.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니..”


세아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자 류 현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
“내가 당신이라면 내가 누나를 달래는 동안 튀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도망갔으면 다시는 제 얼굴 안보셨겠죠.”
“도망  가고 남았다고 해서 딱히 기특하진 않은데.”
“그래도 꼴도 보기 싫다고는 안하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쯧-”


류 현은 팔짱을 낀 채 맞은편의 상대를 노려봤다. 그런다고 뭔가가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수 밖에 없었다.  곳 없는 짜증을 계속 방치했다간 이상한 곳에서 사고를 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애꿎은 화풀이라는 거다.

그의 애꿎은 화풀이 상대, 서해란은 우거지상을 쓰고 있는 그를 달래듯이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류 현 씨야 말로 그 때 저를 내쫓지 않으셨잖아요.  같으면 일단 눈앞에서 꺼지라고 소리부터 질렀을 텐데. 아마, 제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셔서 그런 거겠죠. 그리고  그 부분에 기대를 걸기로  거구요.”
“나 빡치게 해서 말싸움 하러 왔습니까?”
“그럴 리가요.”


해란의 화사한 미소에 류 현은 반쯤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두었던 비아냥거림이 다 쓸모없는 것들이 되었다. 눈앞의 여자는 화풀이 대상으로도 써먹을 수 없다. 류 현은 시간낭비만이라도 그만두기로 했다.

“설명해 보시죠.  습격한 거부터 우리 누님 어떻게 홀렸는지 까지.”
“홀렸다니, 세아 씨를 정말 좋아하시나보군요.”
“아, 잡설은 그 쯤 해두고.”

서해란은 목이  타는지 여태 손도 대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키위 쥬스로 손을 뻗었다. 류 현이 닦달하듯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서해란이 다시 입을 떼었다.


“저번에 드렸던 스카웃 제의를 다시 하려고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그건 저번에 거절했을 텐데요.”
“네, 거절하셨죠. 그 때, 당장은 소속을 갖는  이른 것 같다면서 거절 하셨어요.”
“잘도 기억하고 계시네. 그래,  달 사이에 내 마음에 바뀐  같아서 오신 겁니까?”
“아니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럼?”
“이걸 한 번 봐 주시겠어요?”


제법 두툼한 서류 파일을 받아든  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충 대충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의 표정도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멈췄을 때 그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적의로 가득했다.


“나를 납득시킬 만한 변명을 준비해뒀기를 바랍니다. 그게 아니면 당신과 나는 지금부터 아주 재미없는 관계가 될 테니까.”
“저희 측에서 작성한 자료가 아니에요. 그런 거라면 제가 이렇게 떠벌일 리가 없죠.”
“......”
“대뜸 이런 걸 내놓으면 기분 나빠하실 걸 알고는 있지만 별 수 없었어요. 증거라고  만한 게 이것 뿐 이었거든요. 워낙 황당무계한 이야기라 증거부터 보여드리지 않으면 믿지 않으실 게 뻔해서.”
“나를 지금보다 더 짜증나게 만들 수 있다는 소리 같은데, 그게 가능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로군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검성을 치고자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속을 삭이려고 앞에 놓여있던 콜라를 들이키던 류 현은 그대로 뿜을 뻔했다. 단박에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미친 그 얘기가 왜 벌써부터 나와? 3차 대소환은 한참 멀었는데? 원래 이 시기부터 살해모의를 한 건가? 미친놈들   없으면 수련이나 할 것이지.’

류 현의 반응을 다른 종류의 당황스러움으로 해석한 해란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서 망상모의를 하는 게 아니라 꽤 본격적인 모임입니다. 개입한 곳들의 이름을 말하는  부담될 정도로요.”
“그게 제 신상을 턴 걸로 모자라서 이렇게 책까지 만든 것에 대한 변명이 되는지 궁금한데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놔서 대충 얼버무리려는 거라면..”
“류 현 씨가 검성과 접촉했었다는  알고 있습니다.”
“......”


류 현은 입을 다문 채 콜라가 담긴 잔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당황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일함이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말이 안 나왔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검성과 만난 후 거의 2주나 되는 시간동안 그 일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거물을 만나고 거의 2주 가까이 아무생각 없이 있었다니.


“정확히는  모임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죠. 검성은 최근에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고, 그래서 그 모임에서는 최근에 검성과 접촉한 걸로 예상되는 외부 플레이어들을 닥치는 대로 조사하고 감시를 붙이고 있습니다.  현 씨는 그 대상 중 한명이고요.”
“들어보니 그 모임인지 뭔지에 한 발 걸치고 있으신 거 같은데..내 감시로 배정된 겁니까?”
“모임 내부에서 지원자를 받기로 했고 제가 자원했죠.”
“제가 고맙다고 하면 됩니까. 이제부터 감시할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서해란은 서류 파일을 갈무리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하면 어떻게 보일지 알지만, 저도 원해서 발을 걸친 건 아니에요. 원래는 그냥 구경만 하려다가 빠지려고 했죠.”
“......”
“그런데 찍어놨던 사람이 언급되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좋은 자리도 아니고 그런 자리에서.”
“본론만.”
“류  씨, 이런 식으로 다시 제의하게 돼서 좀 그렇지만 지금  현 씨에게는 소속이 필요해요. 저희 팀에 들어오세요. 최선을 다해서 지켜드리겠습니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해란의 눈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현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전 아직 어디에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류 현 씨 신변에..”
“당장 어디에 소속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 스폰서 정도는 필요할 것 같군요.”
“..네?”
“그러니까, 나에 대한 지분을 팔겠다는 겁니다. 물론 검증과정도 거칠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그 쪽한테도 나쁘지 않은 일 일겁니다. 검증되지도 않은 놈 들였다가 쪽박 차는 것 보다는 우량주 검증  걸 사들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광고도  되서 지금 사면 거저먹긴데.”

‘좀 조용히 클 시간도 안주는구만. 젠장.’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당장이라도 샌드백을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현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런 속사정을 해란이 알 리가 없는 해란은 자신만만한 류 현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야, 쏭. 내 팔 좀 꼬집어봐. 이거 꿈이지? 아니면 검성이 성전환 수술 받고 나타난 건가?”
“미친놈, 꿈꾸는 소리는 자면서 해라.”
“수호오빠 큰일 났네. 저런 사람을 건드렸으니..”
“야, 그게 왜 내가 건드린 거야? 난 시킨 대로만  건데.”
“오빠가 제일 격렬하게 반대한  사실이잖아.”


쑥덕대고 있는 일단의 무리 정면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대지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갑옷 멧돼지였다.


별명은 마법사킬러. 갑옷 멧돼지는 시력과 청력이 거의 없는 수준인 대신 어마어마한 후각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체취 같은  맡는 정도를 넘어서 놈은 마력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놈은 그 후각을 이용해서 마법이 날아온 궤적을 역추적 한 뒤, 카운티만한 몸뚱이를 있는 힘껏 돌진시킨다. 단순하지만 위력하나는 확실하다. 거기에 이름에 걸 맞는 금속갑옷 같아 보이는 가죽의 방어력이 단순무식한 공격방식을 커버해준다.

특수 능력은 없지만 그래서 크게 부각되는 약점도 없는 괴수다.

이놈이 보스룸에서 튀어날 경우에는 출혈이나 독을 이용한 장기전 전략 외에는 답이 없을 정도다. 안 그래도 단단하고 귀찮은 기믹을 가진 녀석이 1.5배가량 더 강하게 만드는 보스 보정까지 받으면 단기결전으로 해결 보는 건  건너 간 것과 다름없다.


그런 갑옷 멧돼지를 단독으로 때려잡은 남자의 등을 서해란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갑옷 멧돼지의 사체 위에 앉은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어느 정도 괴물인 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누군가가 해란에게 각성한지 두 달된 신인 플레이어가 단독으로 갑옷 멧돼지를 때려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해란은 그 누군가의 정신병 여부를 걱정 할 것이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 류 현은  상식을 비웃듯이 별다른 상처조차 없이 혼자서 갑옷 멧돼지를 때려잡았다. 각성한지 이제 두 달 남짓 되었고, 제대로  훈련이나 교육조차 받지 못한 이가 말이다.

그야말로 상궤를 벗어난 괴물이다.

‘원래도 괴물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이야...진짜 계속 솔플을 한 건가?’

터주에서 건네받은 정보에 의하면 각성이후 단 한 번도 원정대에 끼어서 던전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고 했다. 터주라고 해도 미등록 던전 전부 관리할 수는 없지만, 원정대에 끼어서 활동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 그들의 판단이 맞을 것이다.

거기에 폭발적인 성장이 그녀의 추측을 뒷받침 해줬다.

던전 밖에서의 수련으로도 플레이어 능력의 숙련도를 높일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마나가 가득한 던전 내에서의 실전보다는 못한 게 사실. 이 정도 성장속도라면 던전은 쉬지 않고 계속 돌았을 테고, 원정대에 소속되었던 흔적이 없으니 솔플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보통 이런 식으로는 결론 내지 않겠지만 류 현이 보여준 움직임은 숙련자의 그것이었다. 단순히 혼자 보스몹을 때려잡겠다고 나선 애송이가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둔 절제된 움직임. 재능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만 쌓아올릴 수 있는 것.


‘대체 어디서 이런 인간이 튀어나온 거지? 스폰서를 구한다는 건 진짜인건가?’

서해란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그저 마력통이 큰 줄로만 알았던 뉴비가 위험한 모임에서 언급되었기에 신병 확보 차 달려왔더니, 그 뉴비는 두 달 사이에 그린던전을 혼자서 클리어 해버리는 괴물이 된 상태라는 거다.


류 현에 대한 정보를 처음부터 다시 다 뜯어봐야 하는 상황. 해란이 생각에 잠기려던   아무 말 없이  곳을 바라보던 류 현이 입을 열었다.

“검증,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네?”
“검증 말입니다. 검증. 이 정도면 스폰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갑옷 멧돼지의 사체에서 훌쩍 뛰어내려 눈앞까지 다가온 류 현에게 서해란은 고개를 끄덕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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