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탐식마(貪食魔)
산봉우리에 검은 바위가 놓여있었다. 바위는 산봉우리를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마침내 산허리로 굴러 떨어졌다. 내달리듯 산허리를 굴러 내려간 바위는 붙어있던 옆 산의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 산봉우리에 도달했다. 산봉우리에 도달한 바위는 높이를 만끽해보기도 전에 다시 산허리를 굴러 내려갔다. 그리고 바위는 또다시..
“후우.”
류 현이 집중을 풀자 그의 손을 산봉우리 삼아 뒹굴던 검은 마력덩어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약간 저린 손을 대충 털며 그는 던전 출구를 향해서 몸을 던졌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따가운 햇살이 류 현을 반겼다. 류 현은 주변에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등에 닿은 이끼가 차가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전성기 까지는 아니어도 컨트롤은 대강 돌아왔다. 남은 건..마력량.’
각성과 동시에 어느 정도 돌아온 마력 덕택에 일의 진행이 빠르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진행속도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 류 현은 자신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마력을 가늠해 보았다.
1단계 진행도 50%. 그가 만든 기준으로 재면 마력량 10만. 바로 코앞이다. 목표치까지 남은 마력량은 일 만여.
사실 크게 의미 있는 수치는 아니었다. 단계가 바뀌는 것도 아니니 큰 변화는 없다. 마력량이 늘어나봐야 지금 단계에서는 유지력이 늘어나는 정도다.
수치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도 그것을 달성한 시점이 중요했다. 회귀 전 그가 3차 대소환 직전이 되서야 달성한 경지이며 그가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기점이었다. 자신이 최고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기점. 그것이 눈앞에 있다.
‘조급해하지 말자. 단거리 경주가 아니야. 아직 시간은 있어.’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산을 넘어야만 했지만 그의 확신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악룡 아지다하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뿌득. 악룡의 이름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죽여주마.’
전생에서는 준비를 다 갖추지 못했었다. 인류가 저항할 힘을 완전히 잃기 전에 싸우기 위해서 최소한의 조건만 충족시키고 싸웠다.
인류애 같은 고상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지다하카만 두고 승산을 점쳐도 긍정적인 소리가 나올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괴수 군단까지 염두에 둔다는 건 이기는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용잡이 팀원 외의 도움이 필요했고 아슬아슬한 시점에 악룡 사냥을 천명했다. 만족할만 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예상이상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악룡을 잡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지원해 준 그 어느 세력도 용잡이 팀이 성공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악룡을 죽인 류 현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기적.
‘단순 년 수로 따져도 9년은 남았다. 3단계 다 개발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악룡을 죽이지 못한다면 이번에는 악룡이 그에게 죽음을 언도할 테니까.
‘이렇게 시간이 남았는데도 준비 제대로 못해서 못 잡으면 내가 병신인거지.’
류 현은 몸을 일으켰다.
***
“에휴.”
스마트 폰의 액정을 가득 채운 글자를 노려보던 류 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어쉬었다. 문자 내용은 별건 아니었다. 류 현이 세아에게 오늘 파견 간다고 얘기 했었던 파견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저 지친 상태라 안돌아가는 머리로 이걸 외워야 한다는 게 애달플 뿐.
‘그래도 이 짓을 계속 할 순 없어. 문민호 그 인간이 주는 걸 계속 받아먹는 것도 찝찝하고.’
공무 대행이라는 변명도 계속 써먹을 수는 없다. 협조자가 협조자일 뿐더러, 이제 류 현 본인의 스펙업은 안정궤도에 올랐으니 다른 요소에도 신경을 써야하는 시점이다.
‘슬슬 용잡이 팀 애들을 찾긴 찾아야 하는데.’
용잡이 팀을 모아야만 한다. 단순히 모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팀원들의 수준을 이전 생보다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그들의 목숨으로 류 현과 아지다하카의 1:1 무대를 만드는 걸로 그쳐서는 안 된다. 주변을 정리하고 살아남아 그를 보조할 수준은 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이전에 1:1로 악룡을 떨어뜨렸다고는 해도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9년의 시간을 힘을 키우는 데 쏟아 부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으니까. 용잡이 팀을 결성한 류 현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적.
다시 기적을 바란다면 그건 도박수도 뭣도 아니다. 뭣보다 류 현의 목표는 공멸이 아니라 악룡을 사냥 하는 거다. 패 하나만 믿고 밀고 나가는 건 도박꾼의 싸움이다. 사냥을 위해서는 자신 외의 패가 필요하다.
‘지금 시점에서 데려올 수 있는 건...‘에스퍼’ 뿐이네.’
문제는 당장 끌어들일 수 있는 전 팀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영입해야하는 두 명 중 하나인 링커는 신상명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나머지 팀원들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 뭘 하고 있는지 대강은 예상이 가능할 정도.
하지만 지금 당장 데려올 수 있는 이는 한 명 뿐이다. 나머지는 류 현이 찾아가도 만나는 것 조차 힘들 것이다. 대부분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조직에 속해 있을 테니까. 현 시점에서 무적자 신분으로 미등록 던전이나 어슬렁거리는 건 그 뿐이다.
‘그래도 전 팀장인데 내 처지가 한심하구만.’
“스폰서라도 찾아야 하나.”
푸념은 의미 없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에 픽 웃어버리고는 류 현은 멈췄던 발걸음을 떼었다. 집에 가까워지자 기분 조금씩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5층에 도달한 류 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복도 귀퉁이를 도려는 순간이었다.
[쉬익!]
머리 깨를 향해서 달려드는 손아귀를 류 현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 한 채로 피했다. 그리고 무의식이 잡아끄는 대로 류 현은 상대의 팔꿈치를 올려쳤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우드득!] 상대의 팔꿈치가 역방향으로 꺾여 올라갔다. 비명은 없었다. 섬뜩한 뼈 소리 뿐 이었다.
류 현은 그게 어쨌냐는 듯이 곧바로 상대의 하체를 노렸다. 상대의 오른쪽 무릎을 향해서 조준하고 발을 내려찍는다!
“잠깐만 현아!”
류 현은 말 몇 마디에 멈출 예정 따위는 없었다. 사실 공격을 피한 것부터 반격을 가한 것 까지 그가 생각하고 한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목소리의 주인을 판별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목소리를 알아듣자마자 그렇게 칼같이 멈춰선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류 현은 상대의 무릎에 발을 댄 채, 조금은 기괴해 보이는 모습으로 멈춰 섰다. 류 현은 잠깐 동안 자신이 왜 멈춰 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멈췄지? 그는 상대가 저항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눈을 돌렸다.
류 현의 눈에 비친 것은 하얗게 질린 채 떨고 있는 자신의 누나였다. 누나가 왜 저러고 있지?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류 현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누나?”
“현이 너 대체 뭐하는 거야...”
망연한 표정을 한 채 영원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남매의 사이에 끼어들어왔다. 류 현도 잘 아는 얼굴이었고, 그래서 류 현은 세아의 뒤쪽에서 걸어 나온 여자를 보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가 대체 왜 여기에?’
“자자, 세아 씨.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잘잘못을 따지자면 류 현 씨는 피해자고, 전 그의 대응이 과했다고 보진 않아요. 오히려 당연한 대응입니다.”
“그건 당신들 유적사냥꾼들이나..”
전 적수가 누나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안 그래도 과부하 직전의 그의 머릿속을 거세게 휘저어놓았다. 반쯤 넋이 나간 그의 입으로 생각이 흘러나왔다.
“파도잡이?”
그의 생각이 그대로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파도잡이 서해란은 활짝 웃으며 응대했다.
“개인적으로 별명까지 지어서 기억해 주셨을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