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탐식마(貪食魔)
“그래, 오실 분들도 다 오셨으니 말을 해보게. 대체 어떻게 된 겐가?”
노신사의 물음에 좌중의 시선이 노신사의 반대편 자리로 향했다. 타원형 탁자 끝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 중 가장 젊은 이의 나이를 반으로 나눠도 그보다 젊은 남자.
자신보다 곱절은 나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음에도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을 떼었다.
“소집문자에 나온 내용 그대로입니다. 검성이 움직였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이겠다고 오늘 통보해왔죠.”
“이 무슨 뜬금없는...”
“벌써 그 멍청이들이 움직였다는 거요? 검성이 그에 응해서 우리한테 연락한 거고?”
“그런 거라면 여기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지원 병력을 파견한 다음에..”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이런 젠장. 그 머저리들이 검성에게서 번호를 알아냈든 아니든 병력을 준비해야하는 건 똑같잖은가. 당장 소집령을 내려서..”
소란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자 처음 말을 꺼낸 노신사가 수습에 나섰다.
“그만, 그만.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무슨 소용이요? 그래,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던가?”
아무 말 없이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없었다고?”
“예, 우리의 예상대로 그녀의 최측근인 안혜란양이 합류한 것 외에는 변동 사항이 없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예거즈를 나온 뒤에 독자적인 팀을 꾸릴 생각인 것 같습니다.”
“팀을 꾸린다고? 그냥 은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욕저하는 유명한 사실 아닌가. 우리도 그리 예상했고 말일세. 달리 생각하게 된 이유라도 있는가?”
“탈퇴 결정을 내리는 데 다른 요소가 끼어든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제 추측이긴 합니다만.”
“검성을 직접 상대하는 건 자네고, 자네에게 그런 역할을 맡긴 건 우리지. 자네의 말을 재검토 해볼지언정 웃어넘기는 일은 없으니 말해보게.”
“그냥 흘리듯이 한 말입니다만, 그녀가 그러더군요. 예거즈 소속으로는 만나기 곤란한 이가 있다고 말입니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저라면 거짓말을 이런 식으로 하진 않을 겁니다. 아무런 이득이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젊은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만나 볼 이? 우리 말고 검성에게 제안을 한 조직이라도 있는 건가? 그것도 한국 내에?”
“그거야 확인하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 동네는 요인 보안 개념도 희박한 곳 아닌가. 외부 세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검성을 탐낼 곳은 많으니.”
“생각해보면 접촉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그녀는 계속해서 혼자 던전을 돌았으니까. 그러면서 문지기조차 세우질 않으니 던전 내에서 얼마든지 접촉 할 수 있지 않겠나. 어떤 면에서는 비밀스러운 만남을 진행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으니.”
“골치 아프군. 던전 내에서 만났다면 흔적 찾기도 힘들 텐데. 그나마 고랭크 던전을 주로 돌았다는 게 위안거리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블루급 이상에서 만나진 않았을 테니 말이야. 경우의 수가 줄긴 하는군.”
“그럼 일단 그 기준으로 조사에 착수해야겠군. 큰 기대는 마시게.”
“예거즈에 제휴 요청을 한 번 더 넣어봐야겠어.”
“난 너무 대놓고 말한 게 조금 이상한 걸. 블러프일 가능성도 생각해둬야지.”
다시금 소란이 일었지만 그것을 제어할 이가 없었다. 유일하게 그럴 수 있는 노신사는 뭔가를 숙고하는 듯한 표정으로 탁자모서리만 노려봤다.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자기 일을 찾아 몇몇이 방을 나서고 오가던 말들이 뜸해지자 누군가 푸념하듯이 말했다.
"인류의 에이스 카드를 키우기는커녕 내부의 적으로 부터 지키기 바쁘다니, 우리 신세가 참 처량하군요."
그 말에 동의 한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자조 섞인 중얼거림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때 마침 숙고를 끝낸 노신사가 좌중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그 내부의 적에게 제거당할 위험에 놓인 그녀를 놓고 처량함을 말해봐야 뭐하겠소. 어쨌든 중요한 건 침묵하고 있던 검성이 움직이려고 마음먹었다는 것 아니겠소. 마음을 바꾼 이유야 차차 알아내면 될 일. 혹여 그녀가 예거즈를 나와 다른 조직에 몸담게 되더라도 검성 이라는 에이스 카드 자체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을 터.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오."
노신사가 좌중을 돌아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평화에 찌들어 인류가 보유한 에이스 카드마저 없애고자 하는 멍청한 자들에게서 그녀를 지킬 것. 명심들 하길 바라오. 우리의 목적은 검성의 영입이 아닌 그녀의 생존이요. 영입을 한다면 좋겠지만 그것에 집중해서 진짜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좌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던 노신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살아만 있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그녀는 싫어도 우리와 함께 힘을 합쳐 싸우게 될 테니 말이오."
***
여자는 우거지상을 쓴 채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바로 옆자리의 사람의 얼굴표정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그런 어두움도 여자의 살기등등한 기세를 가려주진 못했다. 탁자에 둘러앉은 이 중에서 그런 여자에게 말을 붙일 정도로 할 일 없는 이는 없었고 여자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자신의 불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중이었다.
보다 못해 여자 뒤에 서있는 두 사람 중 왼편에 서있던 여자가 귓속말을 했다.
“팀장님, 표정관리. 표정관리.”
“시끄러.”
여길드원을 물리친 여자 서해란은 자신이 들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회의 내용은 귓등으로 흘렸다. 진지하게 들었다가는 귀가 썩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검성을 치운다고? 그것도 예거즈 놈들이 앞장서서?’
자연스럽게 해란의 시선이 탁자 끝의 상석으로 돌아갔다. 그 끝에는 안대를 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잘 못 알아볼 일 없는 유명인물이다. 예거즈 대표로 참석한 이는 예거즈의 부 길드마스터였다. 그녀는 상대가 눈치 채기 전에 시선을 다시 원위치 시켰다.
‘미친놈들. 전부 다 미쳤어. 여기 있는 놈들 전부 다 미쳤어. 우리 마스터도.’
대행으로 자신을 이 회의에 참석시킨 길드마스터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 여기서 얼마나 더 해쳐먹겠다고...진짜로 미쳤어.’
불과 십분 전만 하더라도 서해란은 자신이 길드마스터를 미친놈 취급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길드 내에서도 기인 취급받기는 하지만 그녀의 상관은 굳이 따지자면 호감을 느낄만한 그런 기인이었으니까. 누구도 그 기인의 머릿속에 검성 살해계획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지를 보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여기 있는 놈들 소속 길드 줄 세우면 길드 탑 10은 따로 순위 선정할 필요도 없겠네.’
자리한 이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부러움을 사고 다니는 중견급 이상의 길드 소속 뿐 이었다. 하나 같이 길드에서 한자리 꿰차고 있는 인사들.
‘예거즈 부길마 놈은 1인자 자리에 눈이 멀었다고 치더라도 저 인간들은 대체 왜 이런데 와 있는 거지? 검성을 죽인다 쳐도 자기들 위치가 바뀔 리가 없잖아.’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그것이었다.
예거즈의 부 길드마스터는 검성이 죽을 경우 1인자의 자리를 꿰찰 수 있다. 산군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도 대항마를 키워낼 수 없었던 검성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당장 한국 제일의 길드는 못되더라도 입지가 커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길드들은? 그런 메리트가 없다. 산군이 한국 길드 중에서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지만 검성을 제외하더라도 예거즈와의 격차는 제법 된다. 당장 검성이 급사하더라도 예거즈는 한동안 1인자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산군과 3인자 취급 받고 있는 파이터즈 길드와의 격차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 그 밑으로 가면 순위 다툼은 그들만의 리그라고 봐야한다. 4,5,6위의 힘을 다 합쳐봐야 파이터즈 길드보다 못하니까. 그런 길드들이 검성을 죽인다고 한들 당장 돌아오는 이득이 있을까? 없다. 오히려 밑지는 장사가 될 공산이 더 크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다. 서해란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흘낏 훔쳐보았다.
‘거기다가 터주까지 나서다니 이 나라에는 정상적으로 사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없는 거야?’
행정안전부 휘하의 플레이어 기관인 터주의 팀장까지 참석했다. 이쯤 되면 암묵적인 동의 정도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검성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보호하겠다고 나서도 모자랄 판에 미친놈들.’
검성의 팬 같은 건 아니었지만 서해란의 생각에 검성은 국빈급 대우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퍼플던전을 홀로 클로즈 해버리는 용력도 높이 사지만, 그녀의 생각에 검성의 가장 큰 가치는 상징성이다.
정부가 존재를 감추고 플레이어들을 핍박하던 암울한 시기가 끝나고 그들이 영웅이 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는 걸 알린 시대의 상징. 검성은 시대를 만든 영웅이었고, 그저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태껏 검성이 보여 온 행보를 비춰볼 때 그녀는 세속적인 욕망과는 담을 쌓은 듯 했으니까. 다른 잡음 없이 대중이 원하는 영웅다운 행보만 보여주는 진짜배기 영웅, 그게 검성이다.
그런 검성을 제거한다? 플레이어고 일반인이고 동요를 보일 게 뻔하다.
일단 검성은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다. 그것만으로도 사후처리가 부담된다. 거기에 이 회의에 출석한 이들이 머리가 있다면 그녀를 죽인 후에 정당화를 위해서 누명을 씌울 테니 동요는 피할 수 없다. 플레이어라는 새로운 구성원을 흡수하고 가까스로 안정되기 시작한 사회가 다시금 들썩거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건? 없다. 정치적 주도권이라던가,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해란이 생각에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진짜 미치겠네. 산군에서 발을 빼야하나? 이런 회의에 내보냈으니 쉽게 놔 줄 리도 없겠지. 젠장, 촉대로 꾀병이라도 부렸어야 했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멍청한 계획에 동의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참석한 시점에서 이미 한 발은 담근 거나 다름없다. 발을 멋대로 뺄 수조차 없는 상황.
“아오...진짜.”
머리를 부둥켜안고 앓는 소리를 내는 해란의 아까전의 여길드원이 두드렸고, 그녀는 신경질을 부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 터질 거 같으니까 좀 냅둬.”
“팀장님, 저거요. 저거.”
“뭐? 뭐가 있든 간에 난...어?”
해란의 앞에는 사진 여러 장과 서류다발이 놓여있었다. 그녀와 여길드원의 관심을 끈 것은 사진 쪽이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cctv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남자는 그녀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 사진을 왜...”
그녀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귓가로 여태껏 흘려듣고 있던 목소리가 확 파고 들어왔다.
“...포함해서 검성은 지난 일주일 동안 세 곳이 넘는 던전을 클로즈 했습니다. 이전 달에는 달에 한 곳을 길드 요청 때문에 마지못해서 클로즈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신변에 우리가 모르는 변화가 있다는 의미지요. 저희는 외부세력의 개입을 의심했고 검성의 행동경로를 역추적해서 그녀와 접촉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들을 추려냈습니다. 배부해드린 자료를 한 번 봐주시죠.”
애꾸눈 여자의 차분한 설명과는 반대로 서해란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길드 내부 정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접촉해보려고 한 루키가 왜 이런 자리에서 등장하는가.
“가장 최근 검성과 접촉한 것으로 추측되는 플레이어 후보군의 사진과 그 중 한 명의 신상명세서입니다. 나머지 후보들의 신상은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제대로 된 얼굴 사진을 확보한 것도 이 친구가 유일하군요. 이름은 류 현. 무소속이며 각성한지 반년도 안 된 친구입니다. 이력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그와 최근 일주일간 검성이 보여준 이상행동과 연관성은 적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더라도 일을 허투루 처리 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감시를 맡아줄 분이 필요한데...”
서해란은 지체 없이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