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탐식마(貪食魔)
최강의 플레이어는 누구인가?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대답이 바뀔 수 있는 질문이다. 문제는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은 실력을 겨뤄보기는커녕, 서로 얼굴보기 조차 힘든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주변의 누구도 그들이 서로 만나는 걸 원치 않았다.
3차 대소환 이전의 그들은 던전사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존재였으며, 3차 대소환 이후에는 작게는 길드 크게는 국가를 떠받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암살대상 리스트에 0순위로 등록되어있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 일터.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에 기대어 최강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의견은 일치한 적이 거의 없다.
전성기상태였던 류 현도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최강자로 인정받았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했었다. 그 즈음에 미디어 매체는 괴멸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유명했던 플레이어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정해져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대답할 것이다. 검성 이라고.
이견이 없는 최강자 자리에 가장 근접했었으며, 말 그대로 시대를 주름 잡았던 플레이어. 그게 바로 검성이다. 그 외에도 그녀를 수식하는 말은 무수히 많다.
한국의 수호자, 최강 검, 퍼플 던전 슬레이어, ‘예거즈’의 길드마스터, 솔로 플레이어.
3차 대소환 이전 특기할 만한 플레이어의 업적들은 모두 그녀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검성은 개인이 아닌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대소환 이라는 위협을 인간이 두 번이나 이겨냈다는 상징.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검성을 오래도록 기억했고, 그 강렬한 기억은 그녀가 활동했던 기간보다 더 오래 남았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회귀 전, 검성은 3차 대소환이 터지기 전에 사망했었다. 사고나 던전 사냥 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예거즈’와 ‘산군’, 터주 연합에게 암습을 당해 중상을 입은 채로 혈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류 현과 활동시기가 겹치기는커녕 접점조차 없지만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너무 유명한 플레이어였으니까.
유명도에 비해서 얼굴 사진이 없다시피 한 그녀지만 그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검성이니까.
눈앞의 훤칠한 미녀 검사는 분명히 검성이었다.
덤으로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대는 류 현의 감이 그의 추측을 강력하게 뒷받침 해주었다.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정도의 반응을 하게 만드는 게 다른 플레이어 일리가 없다.
그가 바라던 일은 아니었지만.
‘씨발.’
그야말로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
별 생각 없이 던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목적지가 옐로우급 던전이긴 했지만 지금 그의 수준에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난이도였다.
더군다나 페이스 조절이 용이한 개척던전 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던전을 털어먹고 나와서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자빠져 잘 것이지 내가 무슨 광명을 보겠다고..’
이런 폭탄과 마주하게 될 줄이야.
위험. 도주. 싸우면 죽는다. 위험. 위험.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류 현은 자신의 감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몇 번이고 감 덕택에 목숨을 건졌으니까.
당장이라도 감이 시키는 대로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벼르고 벼르던 옐로우급 던전 솔로플레이고 뭐고 전부 집어치우고 튀고 싶었다.
물론 눈앞의 상대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멀뚱히 서있을 뿐이었고, 류 현 자신도 딱히 잘못한 건 없었다. 방금 막 맞닥뜨렸으니 잘못을 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무슨 위압감이..’
멀뚱히 서있는 여자에게서 나올 수 없는 위압감이 그의 머릿속을 헝클어 놓았다. 위압감의 근원은 검성이 새카만 구멍으로 보일 정도로 응축된 마력일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마력이 체외로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플레이어 특유의 위압감이 형성되고는 한다.
류 현의 빠른 성장이 오히려 독이 되는 상황이었다. 빠른 성장으로 인해 확장된 감각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검성 특유의 위압감을 남들보다 배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성장했으면 얘기가 달라졌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육감이 미친 듯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 판국에 위압감까지 더해지자 더는 이 장소에 있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검성은 항상 암살 위험을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하는 거물이다.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어떻게 나올지 뻔하다. 반쯤 정신이 빠져있는 류 현이 만나서 좋을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아니, 멀쩡한 상태였어도 류 현은 절대 다시는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류 현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당신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거야?”
여자치고는 조금 낮은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잡아채었다. 류 현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이런 멍청이..그냥 지나쳤으면 됐을걸. 괜히 제발 저려서...’ 자신의 멍청한 대처를 씹어봐도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간신히 자세를 다잡은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검성. 아니십니까?”
“아니라고 해봐야 믿을 거 같은 얼굴이 아니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쪽은 나를 단번에 알아보다니...암살자 치고는 좀 이상하고..흐음, 어디 소속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위기 순간에 극한까지 날카로워진 그의 감은 숨겨진 뒤엣말까지 포착해내었다. “아니면 암살자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는데.”
피해망상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발언이지만 검성이니까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꽤 오래전부터 암살위협을 당해 왔으니까.
거기에 지금 이런 시간에 던전 근처를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수상하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발언은 류 현의 도망욕구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튀자. 아무리 검성이라도 내가 전력으로 도망치면 잡지는...’
다음 순간 류 현은 간신히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억누를 수 있었다. 검성이 대뜸 허리춤의 칼을 뽑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류 현의 머릿속의 경고등이 더욱 요란하게 울었다. 대신 그를 압박하던 위압감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지만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그 기세가 전부 검 끝으로 모이는 게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을 보이면 베겠다. 검끝에 맺힌 기세가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젠장, 대체 왜 검성씩이나 되는 여자가 왜 혼자서 이런 곳에 돌아다니는 거야.’
근처에는 가장 높은 랭크라고 해봐야 옐로우의 윗 단계인 그린 던전 하나가 전부다. 그것도 개척 던전이다.
낮은 등급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퍼플 던전을 혼자서 클로징한 경험이 있는 검성에게는 터무니없이 낮게 보일 것이다.
“소속은 아직 없습니다.”
“응? 없다고?”
“예, 원하시면 팔찌를 보여드릴..”
“아니, 그렇게 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냥 의례상 물어본 거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아니, 나빴겠지. 미안. 요새 하도 뒤숭숭해서.”
류 현이 왼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내미려고 하자 검성이 칼을 갈무리하며 손을 내저었다.
반질반질한 금속질의 시계같이 생긴 이 물건은 플레이어들에게 강제로 착용되며, 플레이어 레벨과 소속이 기록된다.
레벨이라고 해봐야 그냥 던전을 들락거리기만 해도 오르는 것이라 직접적인 전투력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해당 던전을 클리어 하는데 한 기여도 같은 건 정산되지 않았으니까.
원정대가 괴수를 총합 12마리 잡으면 대원 전원에게 12마리를 잡은 경험이 있다고 기록되는 식이다.
당연히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기여도를 정산하는 기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다른 쓸 만한 지표가 없기에 경험이라도 보증하는 플레이어 레벨이 중시되고는 있지만.
어찌됐든 검성이 칼을 꽂아 넣자 류 현은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미친 여자 같으니 그냥 압박 좀 넣겠다고 칼을 뽑아? 그것도 검성 씩이나 되는 작자가?
‘미친년.’
류 현은 검성을 미친년 리스트 제일 위에 올려놓기로 했다. 예전과 똑같이 역사가 흘러간다면 그녀는 죽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혼자?”
“예?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일 돌 던전을 잠깐 보러..”
“거짓말.”
단언하면서 그녀는 씩 미소 지었다. 보는 이의 가슴이 뻥 뚫리게 만드는 미소였지만 류 현에게는 그저 미친년이 실실 쪼개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저는 솔플러입니다. 하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무슨 정찰이야. 여기가 사전답사 할 정도로 오지도 아니고.”
“.....”
다른 상황이었다면 정신이상이 의심되는 발언이었지만 류 현에게는 이 이상 정곡도 없을 것이다.
“하하, 저한테서 그런 냄새가 나는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정말 불안해서 잠깐 나와 본 것 뿐 입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렇죠. 딱히 소속도 없는 초짜가 솔로플레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검성은 전혀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더 몰아붙일 것 같지도 않아보였다. 껀덕지가 없으니까. 류 현이 한 거라고 해봐야 마주친 순간 도망가려는 자세를 잡은 게 전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지만 암살자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이를 다그칠 필요는 없을 테지.
류 현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고 작별 인사말을 고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럼, 나랑 같이 해보자고. 사전답사. 시시하게 주변부만 하지 말고 던전 안까지 말이야. 내 무례에 대한 사과도 겸하는 거니까 사양하지 않아도 돼.”
검성이 폭탄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