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탐식마(貪食魔)
‘듣던 것 이상 이었어.’
손안을 뒹구는 출입증을 내려다보며 류 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터주에 출입하기 위한 출입증이었다. 문민호가 그에게 떠넘기고 간 미행에 대한 보상.
출입증에는 류 현의 증명사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학생증을 만들기 위해 고등학교 입학 당시 찍은 사진이다. 그냥 길드도 아니고, 터주 정도에 몸 담그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사진이다.
[출입증만 제시하시면 수도권 내의 웬만한 저급 던전은 프리패스 일겁니다. 결정체 처분도 하실 수 있게 밀수꾼들한테 손을 써놓도록 하죠. 협회에서 매입하는 것보다는 훨씬 가격이 좋을 겁니다.]
‘..미친놈.’
[언제든 마음이 내키시면 본부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본부에도 등록해 뒀거든요. 아참, 출입은 손님방까지만 됩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바로 저한테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만. 꼭 가입 의사 타진 말고도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최대한 손 써드릴 테니 부담 없이 연락하시길.]
그에게 중요한 건 그 사진이 문민호 손에 들어간 루트가 아니라 이미 자신의 출입증까지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류 현이 거절하더라도 폐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들은 문민호라는 남자는.......
‘내가 거절하는 걸 감안했을 리가 없지. 그놈은 퍼주고 그걸로 희한하게 얽어매는 또라이니까.’
과거, 문민호가 이 좁아터진 땅에서 거대 군벌을 일궈낸 과정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었다. 그가 터주를 군벌로 만들려고 했을 때 수많은 플레이어가 그의 곁에 있었고, 그 중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터주 내부에서는 어떤 잡음도 흘러나오지 않았었다.
거대 군벌 터주의 탄생이었다.
괴상한 일이었다. 그는 엄청난 리더쉽으로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료애가 극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터주에 팀장으로 있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제공하고 다녔고,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은 그의 심복이 되어있었다. 이상한 건 그가 제공한 편의가 목숨 걸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소한 편의를 제공하는 걸로도 사람을 얽어매고 심복으로 만들 수 있는 괴상한 인간이다.
류 현이 맞섰던 다른 길드마스터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향의 리더.
‘이걸 써먹어 말어?’
받아온 출입증을 두고 그가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괴상한 인간과 별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런 걸로 터주에 종속될 거라고는 생각 안했지만 찝찝한 건 찝찝한 거니까.
아예 안 받자니 귀찮게 들러붙을 게 뻔했고. 서해란 이상의 혹을 붙이는 건 사양이었다.
당장 써먹을 곳은 많다. 이것만 있으면 방치된 던전 찾는데 정보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고, 세아를 설득 하는데 써먹을 수도 있다.
내부 사정이 어쨌든, 미래에 군벌이 되든 말든 현재 터주는 정부 소속 기관이니까. 플레이어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세아로서는 ‘산군’보다는 터주가 낫게 보일 것이다.
그것 외에도 터주와 연계한 기관에서 각종 편의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조만간 자신의 팀을 꾸리기 시작할 생각이고, 터주의 미래를 아는 이상 거기에 속할 생각도 없으니까.
문제는.
‘젠장. 그래도 찝찝한데.’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류 현 본인의 감정문제였다.
***
“그러니까, 현이 네가 공무원이 됐다는 거니? 어떻게? 플레이어라도 시험 봐야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진짜 공무원이라기보다도 그 뭐시냐..”
류 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적당한 말을 고르려 애썼지만 없던 말솜씨가 생겨나진 않았다.
“현장 대행 쯤 되는 거지. 아무래도 플레이어 되고 공무원 하려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현장 대행?”
“어, 토벌전 위치 정찰이나 던전 터졌을 때 주민 대피 같은걸 주로 한다던데.”
“그거 위험하지 않아? 토벌전 위치 선정이면 터지기 직전 던전 근처에 가는 거 아니니?”
“에이, 그래도 던전 안에 들어가서 직접 사냥하는 거랑 비교가 안 되지. 토벌전 보다 안전하고. 호위 병력도 소대 단위로 붙여준다던데. 정부 입장에서도 괜히 플레이어 혼자 정찰 보냈다가 다치거나 죽으면 손해니까.”
“그래도 위험할 거 같은데......”
세아는 류 현이 내민 출입증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마음 같아선 반대하고 싶다. 그녀는 동생이 플레이어 같이 위험한 직종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것 보다는 그냥 착실하게 대학교 진학을 하고 졸업 후 취직하기를 원했다.
위험하니까. 두 남매에게서 부모님을 빼앗아간 건 괴수니까.
류세아가 괴수와 동생간의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 건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머리로 하는 생각하고 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토벌전에 해은을 끼고 참가하게 하는 것도 상당한 양보를 한 것이다. 아직도 그녀는 토벌전 전날 밤에는 잠을 설칠 정도다.
마음 같아서는 그것도 못하고 말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류 현의 행동을 살피는 중이니까. 강건하게 나갔다가는 동생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런 불안감이 세아를 옭아매었다.
류 현과 달리 세아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류 현의 갑작스러운 짐꾼 사고가 또렷하게 남아있으니까.
“확정..된 거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인턴 비슷한 거라고 해야 하나. 내가 정식으로 시험 쳐서 붙은 것도 아니니까. 확실한 건 내일 가서 들어봐야 알아.”
“그래?”
류 현이 조심스럽게 고개 숙인 세아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에 드리운 음영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고심하는 것 자체가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여태껏 세아는 일단 안 된다고 하고 봤으니까.
이윽고 세아가 작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알았어. 내일 준비 잘해서 다녀오렴.”
그리고 이 주일이 지났다.
류 현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산을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산 전체에 쇳내와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류 현의 기분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류 현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마력 쌓이는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빨라.’
세아에게 터주 인턴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 지 벌써 이주가 지났다. 해은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자유의 몸이 된 류 현은 지난 이주동안 정말 밤낮 없이 던전 사냥에 몰입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고리 원숭이 투성이인 던전이 세 번이나 나왔지만 지금의 그는 웃을 수 있었다.
‘이 속도면 한 달도 안 걸리겠어.’
그가 고지로 정해놓은 1단계 반절이 코앞이었으니까. 회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그 때는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데 일 년 가까이가 걸렸으니까.
‘역시 기본 마력량이 되면 흡수율이 높아지는 거였어.’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가설도 입증되었다. 1단계 개발 상태의 그의 능력은 괴수 섭식을 통한 마력흡수가 전부다. 그에 기반한 재생능력과 신체능력의 향상. 그 외에는 없다.
당연히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다. 다른 근접 계열들과 달리 무식한 마력량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싸움법을 익혀야 하니까. 다른 근접계열처럼 싸움법이 머릿속에 입력 되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괴수를 잡아 죽여서 마력량을 못 늘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효율이 떨어질 뿐이다. 그도 초반에는 흡수율이 높은 것도 아니었으니 상대적으로 전투력이나 성장면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회귀와 함께 어느 정도 돌아온 마력량은 그의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주었다.
기본 마력량이 확보가 되어 있으니, 솔플이 가능하다. 솔플이 가능해지니 괴수 고기를 독식할 수 있고, 마력량이 많으니 괴수 고기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효율도 회귀 전 초창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치 커다란 눈덩이가 작은 눈덩이를 삼키듯이 손실 없이 대부분의 마력이 그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세아에게 내세울 변명거리도 있고, 성가시던 서해란의 눈인 서해은도 길드로 복귀했다. 던전 사냥을 방해 할 요소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의 마력량은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옐로우도 간볼 때가 됐지. 내일..아니, 오늘밤에 개척던전으로 한번..’
슬슬 허들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류 현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소녀는 바쁘게 발을 놀려 어둠이 휘장을 드리운 복도를 가로질렀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문에 도달 할 수 있었고 문을 밀어젖히자 소녀를 반긴 광경은 소녀가 별로 원하지 않던 것이었다.
소녀는 등을 내보인 채 검을 살피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말을 걸었다.
“마스터, 꼭 가셔야겠어요? 길드 내부 분위기도 이상하고 호위도 없이 나가는 건..”
“둘이 있을 때는 언니라고 하라고 했잖아.”
“언니는 이렇게 불러야 들은 척이라도 하잖아요. 길드에서는 마스터라고 안 부르면 못 들은 척 하면서.”
“네가 길드에서 언니라고 부르면 잔소리만 하니까.”
자기보다 머리하나는 작아 보이는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노려보자 여자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아, 항복. 무슨 말 할지 알거 같아. 언니가 잔소리 안하게 행동해요?! 라고 할 거지?”
“아시면서 대체 왜 이래요? 진짜 언니 저 홧병나게 하려고 이러는 거예요?”
소녀의 째진 비명 같은 목소리가 공동을 윙윙 울렸다. 여자는 두 귀를 틀어막는 채하다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더 수련하면 유리잔도 깨겠다?”
“언니!”
“나한테는 이거 밖에 안 남았잖아?”
여자의 대답에 소녀는 허를 찔린 것처럼 헛바람을 들이켰다. 여자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당황, 슬픔, 분노. 그 중 가장 큰 것은 연민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못 본채 해줘. 부길마한테 걸려도 내가 수습하면 되니까. 내가 아무리 막장 길마라도 크게 뭐라고 하겠어?”
장난치듯이 말하는 여자의 눈빛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