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탐식마(貪食魔)
남자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벌써 네 번째 였다. 화면에는 '누나' 라는 글자와 그 옆에 수화기 버튼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보아도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10년 전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회귀전 기준으로 1년 전, 죽은 자신의 누나가.
"대안이 없잖아. 대안이. 정신 차려라, 류 현. 덮어놓고 관두라고 한다고 누나가 듣겠냐."
자신을 타이르듯이 혼잣말을 해도 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집으로 오라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집으로 온 누나를 붙들고 당장 일 때려치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10년 전으로 돌아왔으니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별을 먹는 자, 불멸자, 용사냥꾼, 대적자 등. 수많은 호칭들은 없던 일이 돼버렸고, 자신에게 그 호칭들을 선사한 플레이어로서의 능력 또 한 사라진 것이다.
한마디로 빈털터리라는 소리다.
가진 것이라고는 19살 미성년자의 몸뚱이가 전부다. 그리고 경제적 능력이 전무한 피부양자라는 위치까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나의 몸을 좀 먹고 있을 일을 그만두게 할 수도 없고, 보호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인 것이다. 경제적 능력도 없는 놈이 가장인 누나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윽박지른다니 언어도단이다.
"그래도..."
류 현은 결국 다시 휴대폰에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수화기 버튼을 눌렀다.
***
"현아, 대체 무슨 일이야? 응? 누나한테 말해보라니까."
"별 일 같은 거 없어. 괜찮다니까."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지만 뭔가 확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숨결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 살아있다. 이렇게 숨 쉬고 자신을 걱정해 줄 수 있을정도로 건강하게.
"괜찮기는! 괜찮은 애가 뒤통수 깨져서는 전화 걸자마자 엉엉 울어?"
아무리 정신적으로 닳고 닳은 플레이어였다지만 일 년 만에 듣는 누나의 목소리는 그를 열 살짜리 꼬마로 되돌려 놓았다. 가까스로 통곡하는 것 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목이 메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누나는 그런 이상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류 현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미쳤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후회의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런 행동조차 그의 누나에게는 각별한 이상행동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류 현은 갑자기 자신의 손을 거머쥐는 누나의 손에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의 누나는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아, 응?"
"지...진짜 아무 일 없다니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그렁그렁 한 눈을 애써 외면하며 류 현은 가까스로 대꾸했다. 미친놈 각오도 안됐으면서 대체 왜 전화를 했냐. 이럴 거 뻔히 알면서.
류 현의 누나, 류세아는 언제나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세상에 동생과 둘 만 남겨졌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지만 동생에 대한 일이라면 벗은 발로 뛰어다녔다. 눈물을 아끼지 않은 것은 굳이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었고.
그런 사람이 전화통화로 동생의 울먹거리는 음성을 들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너무 뻔했다. 그녀의 가족이 아닌 이들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통화가 끝나자마자 세아는 곧바로 조퇴 신청을 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뒤통수가 깨져서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동생을 발견하자 그녀는 기절 정도로 놀랐다.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기절하진 못했지만.
그런데 정작 걱정되는 동생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세아로서는 애가 타들어갈 뿐이었다.
세아가 빤히 쳐다보고 류 현이 그것을 애써 못 본척 하는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결국 항복 선언을 한 것은 세아 쪽이었다.
"알았어. 지금 말하고 싶지 않으면 더는 안 캐물을게. 그럴 생각 들면 꼭 말해줘야 해?"
그리 말하곤 세아는 주방으로 향했다. 아직 이르지만 저녁 준비를 할 모양이었다. 류 현은 그런 세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고마워.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누나.'
***
즐거운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던가. 류 현이 느끼기에 정말 순식간에 두 달이 지나갔다.
유쾌하기 만한 두 달은 아니었다. 별로 좋은 기억도 없는 고등학교를 다시 다녀야 했으니까. 그리고 끔찍했던 수능도.
현역 고등학생일 때도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괴수 잡는 걸로 머릿속이 꽉 찬 29살로 등교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더욱이 아무것도 모르고 일을 나가는 누나의 몸이 계속 나빠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죄짓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부로 끝이었다. 막 수능이 끝난 고3들과 류 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울방학이 어제부로 시작됐으니까 말이다.
류 현은 멍하니 두 달을 보내진 않았다. 별 소질도 없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대신 그는 어떤 전문가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은 류 현의 손바닥 위에 놓이는 형태로 맺어지게 되었다.
위조 신분증의 모습으로. 류 현은 이 얇디얇은 플라스틱 카드 한 장에 오십만 원씩이나 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다시 속이 쓰려오는 듯 한 착각마저 들었다.
'대소환' 이후 각국 정부 혹은 군벌들은 주민 파악에 더욱 각별하게 신경을 쏟기 시작했고, 미성년자가 성인 신분증을 손에 넣기 위한 자금으로 오십만 원은 그래도 싼 편이었다. 미성년자면 일단 거르고 보는 전문가들도 꽤 있었으니까.
문제는 출처가 문제집 사야 한다고 누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받은 돈이라는 거였다. 첫날부터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누나에게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하는 건 정말이지, 수명이 뭉텅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세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돈을 내어줄 때는 전부 다 불어버릴까 싶었다. 그 짓을 세 번은 더해야만 했으니 류 현이 느낀 고역스러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꼭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누나."
다짐하듯이 말을 해보지만 복잡한 심사는 여전했다.
"재인 씨 뭐 하는 겁니까! 준비 안 해요?"
"아, 예! 갑니다!"
위조 신분상의 이름이 불리자 류 현은 부리나케 일단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는 땅에 놓인 군장 하나를 멨다.
운동과는 거리가 먼 19살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무게였지만 류 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도 제 몸을 깎아먹는 일을 하고 있을 누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젠장, 더럽게 무겁네.'
휘청거리는 그의 모습에 류 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원정대 대장이 기어코 혀를 차면서 쓴 소리를 뱉었다.
"쯔쯔, 그래서야 안 쳐지고 쫓아오기나 하겠어요? 싼 맛에 불렀더니 이거 완전히 맹탕이구만. 뒤로 쳐지다가 봉변당해도 모릅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류 현은 속없이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며칠 전부터 거의 밤을 새워가며 겨우 찾아낸 무경력 짐꾼도 채용해주는 원정대였다. 행여나 밑 보여서 쫓겨나면 곤란하다.
하지만 류 현은 게이트를 향해서 걸어가는 대장을 씹는 권리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레드 던전이나 도는 놈들이 유세는.'
레드 던전이라면 굳이 플레이어를 투입할 필요도 없다. 아홉단계의 던전 난이도 중 가장 하위의 던전을 가리키는 색깔. 레드 던전.
던전이 포화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괴수가 뛰쳐나오면 화염방사기 같은 걸로 갈겨버리면 그만이다.
실제로 '대소환' 초기 미국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레드 던전 입구를 틀어막고 정부 지원 전까지 버틴 적이 있었다.
아무리 괴수들이 화기에 저항력이 높다지만 레드 던전에서 나오는 괴수들의 쉴드량이라고 해봐야 뻔하다. 기껏해야 보통보다 좀 더 튼튼해진 짐승 수준인 것이다. 그것만 해도 굉장히 위협적이지만.
낮은 난이도만큼 레드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바로 윗급인 오렌지급에 비해서도 별 가치도 없다. 오직 결정체만 보고 도는데 문제는 클리어 시 나오는 결정체 수준도 형편없다는 것이다.
'대소환' 초기에는 그것도 없어서 못 팔았다지만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길에 굴러다니는 깡통만큼이나 흔해졌다.
가끔 '선악과'같은 희귀 아이템이 나오는 레드 게이트가 열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대형 길드나 정부에서 게이트를 통제해버리기 때문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정체 수급을 위해서 정부나 길드에서 지원금을 내놓긴 하지만 실력 있는 플레이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되었다.
그러니 레드 던전이나 도는 플레이어 수준은 높을래야 높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중소 길드에서 초짜 플레이어들 조련용으로 몇 번 돌리고 마는 정도다.
그도 아니라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 해서 허가가 안나서 레드, 오렌지 던전이나 전전하면서 기회를 찾는 플레이어 중에서 밑바닥 인생이던가.
거기에 지금처럼 개척된 던전이라면 말 다한 셈이다. 개척 던전. 이미 클리어 된 적이 있는 던전이다.
3차 '대소환'을 견디고 플레이어 중에서도 정점을 찍어본 류 현으로써는 레드 던전 따위, 그것도 개척된 레드 던전이 눈에 찰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 봐야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어 나이마저 속여야 하는 고3이지만.
'각성만 하면 된다. 각성만.'
류 현이 없는 돈을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마련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원정대에 끼어서, 괴수가 죽어서 내뿜는 마나를 흡수해서 각성에 이르는 것.
물론 마나를 흡수한다고 개나 소나 플레이어로 각성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구 대비 플레이어 각성비는 10000:1. 사짜 직업보다 희귀한 게 플레이어다.
3차 '대소환'이 터질 때까지 각성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못했지만, 각성 조건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서른 살 되던 날 아침이 되자마자 각성한 사람, 괴수에게 팔이 잘라 먹히는 순간 각성, 참선 도중에 갑자기 각성한 행자. 별의별 경우가 있었다.
각성하고도 자신의 각성 조건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일반인들은 각성 조건을 몰라서 일반인으로 남은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니 류 현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각성 조건을 알고 있을 뿐더러 그 조건도 어렵지 않게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류 현의 각성 조건은 일정량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회귀전, 누나가 병석에 눕고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며 겨우겨우 누나의 병원비를 대던 시절 류 현은 우연찮게 원정대 짐꾼으로 뛰게 되었고, 그 한 번의 기회는 반년 동안 지속되었다.
짐꾼 노릇을 시작한 지 반 년이 조금 넘어간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짐을 짊어지고 원정대 뒤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던 중 그는 자신의 각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무슨 조건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소거법으로 계속해서 추론해나가니 결국 부합하는 조건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던전 출입을 통한 마나 흡수.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눈에 불을 켜고 짐꾼 모집공고를 뒤적거리고 다닌 끝에 각성을 위한 첫발걸음을 떼기 직전.
어려울 것도 없다. 평범한 짐꾼처럼 원정대 꽁무니에 붙어서 걸어 다니기만 하면 원정대가 괴수를 쳐 죽여서 공짜로 각성 시켜줄 테니까.
그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각성 조건이었지만 류 현은 감사하기로 했다. 24살까지 살아있기 같은 게 각성 조건이었다면 정말 곤란했을 테니 말이다.
한시가 급한데 그런 제약에 발이 묶여있어야 하는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일단 누나가 일 그만두게 만드는 게 우선이다.'
3차 '대소환', 내전, 악룡 아지다하카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류 현의 머릿속은 그것으로 꽉 차있었다.
다른 준비에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 악룡상대로는 확실한 건 없지만, 계획대로만 된다면 이전보다 4년이나 빨리 각성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누나의 안위가 0순위다. 시간적 여유가 좀 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제 몸을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세아를 일에서 손을 떼게 설득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각성하고 보는 게 급선무였다.
제 아무리 동생을 어린애처럼 싸고도는 세아라지만 플레이어라는 직함 앞에서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는 못할 테니까.
플레이어로 각성한다고 바로 그럴 수야 없겠지만 각성조차 못한 상황에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수도 없다.
"자, 짐꾼들은 이리로 모이세요!"
류 현은 배낭끈을 움켜쥐고 짐꾼 무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