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4화 (604/604)

“정식 공표된 사건 이외에도 불을 사용하는 자들로 하여금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니 그런 자들에게 이제 와서 인식 변화를 요구해서 되겠습니까?”

에우노미아와 같은 이들이 베스탈리스를 증오한다고 해도 이해는 됐다. 인페르노가 많은 악행을 벌여 온 만큼 수많은 피해자들이 존재할 터였다.

그들에게 온건파와 강경파는 다르다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오늘 중앙 행정 관리부와의 논의는 아시다시피 베스탈리스의 사회적 인식 개선을 주제로 진행되고 있어요. 제 목적은 오늘 회의를 통해 그들의 확실한 협조를 얻어 내는 거고요.”

“네, 90번대 테라리움을 지켜 내는 데 일부러 베스탈리스 분들을 움직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죠? 이야기가 잘 끝났으면 좋겠는데요.”

“당신과 자매들은 인페르노 악행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잖아요. 솔직히…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듣고 싶어요.”

“아,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이해했어요. 제 기분을 걱정하신 거죠?”

“당신이 과거의 사건으로 불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몬스터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불을 사용해야 할 때도요.”

에우노미아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망하진 않아요. 물론 저희 고향에 피해를 입히고 부모님을 죽게 만든 녀석들은 벌을 받아야 하지요. 원망의 대상이 다를 뿐이에요. 보고서를 통해 스텔라가 인페르노의 교단들을 회유시켜 전투에 참여시킨 건 눈치챘어요. 분명 잘한 일이긴 하죠.”

그녀는 마치 친구의 이름을 부르듯 스텔라의 이름을 언급했다.

“제가 모든 피해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녀는 말투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행된 후 처벌을 받는 건 그다음이라 생각할 뿐이에요. 합당하며 공평한 처벌을. 분명히 인페르노에 소속되어 있던 자들이라 하더라도 사회를 위해 힘을 쓸 순 있죠. 힘을 사용하는 목적이 달라진다는 건 환영할 일이에요. 사용하는 이들이 달라져 힘이 달리 쓰이게 된다면 좋을 일이죠.”

악행을 덮을 더 많은 선행을 할 기회.

“천천히 매듭을 푸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엉킨 쪽부터 하나하나.”

그녀가 두 손가락을 꼬며 말했다.

“어쨌든 저로서는 좋은 베스탈리스 분들을 위해서라도 응원해요. 그들이 사회에 자리 잡음으로써 더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되는 상황을 응원해요.”

에우노미아는 마치 속이 다 시원하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모든 베스탈리스들을 증오한다고 답변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좋은 베스탈리스들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응원하겠노라 말하는 성숙한 그녀의 모습에 속이 뭉글거렸다.

분명 에우노미아와 같은 의견을 내는 자도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까지 응원의 목소리를 내주니 힘이 생겼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회의가 재개될 시간이야.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잠깐의 휴식이 너무 달콤해 절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푹신한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전 하러 가야지. 이번엔 어떻게 무장해 왔으려나.”

“마치 전쟁터라도 나가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가 보시면 알 거예요.”

2차 회의부터는 에우노미아도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그녀라면 나와 다른 입장으로 회의를 지켜볼 수 있을 터.

문을 열자 파필리온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서 있었다.

“날 두고 둘만 들어가 버리고.”

“네가 주둥이를 덜 털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나도 명색이 보좌관인데 말이지.”

그는 자연스럽게 서류 더미를 넘겨받으며 서운한 티를 잔뜩 냈다. 옆에서 에우노미아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일단 파피루스 드라이어드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내 볼까 해. 무엇보다도 베스탈리스에 대한 역사의 토대를 확실히 다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들이 가장 동요하던 주제도 파피루스였고.”

“설마 그 늙은이, 크레아시온을 석방시켜 달라고 하려고?”

파필리온이 치가 떨린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직접 보고 들은 바론 둘은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마지막에 파필리온이 나로 갈아타게 되며 운명이 바뀌게 되었지. 파필리온은 16번째 테라리움에 남고 그는 1번째 테라리움에 연행되었다. 크레아시온 입장에선 파필리온이 끔찍한 배신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미워할 힘이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다 죽어 가던 모습이었으니까.

파피루스가 애타게 자신의 주인을 살려 달라며 간청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계속 감옥에서 지낸다면 그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파피루스가 입을 여는 조건이 그거였으니까. 자신의 주인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뭐든 한다고 했으니.”

“드라이어드란….”

자신도 드루이드이며 본인의 드라이어드들에게 과한 애정을 받고 있으면서 그런 말투라니.

파필리온의 드라이어드들은 인공 개량에 번개까지 맞아 가며 강화된 드라이어드로 충분히 그를 미워할 만한데 용케 아직까지 곁에 있었다.

우리 셋은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행정 관리원들과 함께 2차 회의를 위해 회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에우노미아를 본 서기의 표정이 묘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누구요?”

“저쪽에 서기 말이에요. 당신을 아는 눈치인데.”

“아, 어디서 본 얼굴인데. 제 기억력은 단기적으론 뛰어난 편이긴 해도…. 일단 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라 애써 기억하려고 하진 않았나 봐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반면 서기는 확실히 에우노미아를 알아보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이 들어와 착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시작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알렸다.

투옥되어 있던 크레아시온이 노환과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크레아시온이 사망했다고?”

이 소식은 파필리온 마저 당황해 웃음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드루이드의 수명은 보통 사람보다 길다. 크레아시온의 나이가 많은 건 알았지만 당장 노환으로 죽을 정도로 보이진 않았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그가 힘들어하는 건 느껴졌으나….

너무나도 죽음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수상하게 느껴졌다.

하필 파피루스를 언급한 오늘, 돌연 사망했다고….

그가 죽었다는 게 정말 사실일까? 혹시 누군가 그의 죽음에 개입한 건 아닐까?

덤덤하게 소식을 전하는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불쾌한 기분이 든다.

드루이드가 죽으면 영혼이 연결된 드라이어드도 함께 죽는다. 그러니 파피루스 드라이어드 또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감춰진 역사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저 말이 곧이곧대로 진짜라고 믿어?”

파필리온 역시 수상함을 눈치챘는지 내게 물었다. 솔직히 우리를 제외하고도 여기 앉은 모두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럴 리가. 너무 절묘하잖아?”

“죽인 걸까? 아니면 숨긴 걸까?”

“넌 빼돌릴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거야?”

“당연하잖아. 자기들만 알고 싶을 수도.”

그의 말엔 일리가 있었고 나 역시 의심하고 있었다.

파피루스가 입을 연다면 당장 베스탈리스에 대한 역사보다도 얻어낼 수 있는 정보들이 아주 많았다. 카수스가 과거 많은 정보를 은폐한 전적이 있으니 인위적으로 사라진 정보들을 1번째 테라리움이 독점할 수도 있겠지.

솔직히… 베스탈리스에 대한 과거를 감추자고 더 큰 손해를 볼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지.”

“그래. 증거가 없어.”

우리에겐 1번째 테라리움이 개입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그들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다. 대놓고 척을 지겠다는 태도였으니까.

“휴식 시간 동안 논의를 통해 베스탈리스들의 공헌은 분명하니, 따라서 중앙 행정 관리부도 세계를 지키는 데에 협조한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지부진할 것 같았던 논쟁이 의외로 쉽게 풀려 버렸다. 그들은 좀 더 베스탈리스에 대해 물고 늘어질 거라 생각했다. 베스탈리스들에게 압수한 재산을 돌려주기 싫어서라도 끈질기게 반의를 내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파필리온이 혀를 차며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크레아시온에 대한 안건에서 주의를 돌리고 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급하게 마무리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베스탈리스에 대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면 필연적으로 파피루스 드라이어드 쪽으로 눈을 돌리 수밖에 없으니까.

“중앙 행정 관리부의 앞으로 입장은….”

그들은 소식지와 공문 등 알릴 수 있는 모든 매체를 통해 방어전에서 활약한 베스탈리스에 대해 언급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베스탈리스 모두가 바랐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한 선한 인식을 심어 주어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길을 여는 일.

“그동안 드루이드들이 테라리움에서 받던 혜택의 일부를 베스탈리스들에게도….”

다만 1차 회의에서 그렇게 아웅다웅했던 것과 달리 2차에서 과할 정도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자 오히려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베스탈리스들의 처우가 개선되는 건 반길 일이지만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아니라 단번에 많은 계단을 한 번에 뛰어 올라간 느낌이었다.

즉, 이렇게 될 경우….

“오히려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겠는데?”

갑자기 갖은 핍박을 받던 이들이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된다. 사회적 지위로 치면 베스탈리스들은 아주 낮은 위치에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아래.

그런 그들이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갑자기 드루이드와 비슷하게 대우를 받는다고 하면 모든 이들이 곱게 볼까?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드루이드가 받는 혜택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테라리움은 주민들의 세금을 이용해, 중앙 행정 관리부는 법률 개정을 통해 드루이드에게 혜택을 안겨 줬다.

어느 한 쪽이 이득을 얻는다면 잃는 쪽이 존재하는 법.

드루이드에 대한 처우는 오랜 시간 동안 차근차근 준비되어 온 것으로 모두가 당연한 걸로 인식하게 바뀌었지만, 그 와중에도 차별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베스탈리스에게도 같은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면 차별은 느끼던 사람들은 더욱 분노할 테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생길 것이며 오히려 반발로 돌아오게 될지도 몰랐다.

더욱이 오랫동안 쌓여 있던 베스탈리스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테니 반발이 더 심하면 심했지….

분명 개선되는 방향은 그토록 원하던 방향이 맞았다. 선심 쓰듯 단번에 좋은 처우들을 줄줄 내뱉는 중앙 행정 관리부에 이의를 제의하는 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잖아?

마치 오히려 물 먹어 보라는 듯 구는 그들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반발이 커지면 그들은 명분을 얻게 되겠지.”

사람들이 반대하니 없었던 일로 하겠다, 혜택을 축소하겠다….

줄이고 줄이다 더 이상 반발이 나오지 않을 만큼 줄여 버리면 그게 베스탈리스의 한계점이 될 테고, 걸림돌이 된다. 반발의 역사가 남아 버렸으니까.

한꺼번에 많은 걸 줬다 빼앗아 버리는 것과 조금씩 주며 늘려 가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베스탈리스들을 사람들에게 더 알릴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필요합니다.”

난 그들에게 돌려 말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자고.

“물론 그에 대한 필요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많이 알아가는 것.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직까지 행정 관리원들의 의무 지원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정책의 내용이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베스탈리스들이 많은 전투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입니다. 혜택을 받는 만큼 일한다는 걸 보여 줘야 반발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중앙 행정 관리부 역시 그렇게 급진적으로 추진하면 사람들의 반발이 클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알고도 그렇게 구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일련의 제의들이 전부 하나의 정책을 위한 밑거름이었음을.

그들이 제의한 건 베스탈리스 징병 정책이었다.

베스탈리스라면 누구든 일정 기간 이상 불 토벌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정책.

드루이드에겐 강제 의무가 없었다. 그렇기에 드라이어드를 개화해도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모험은 등한시하고 가게를 차리거나 연금술을 공부하는 등 평범한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베스탈리스들에겐 강제로 의무를 지우겠다고 한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모든 베스탈리스들을 관리하겠다는 말인가요?”

“혜택을 주기 위해선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그들은 사회와 타협하길 원하는 모든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재산을 뺏고 활동을 주시하기 위해선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이젠 모든 베스탈리스들의 정보를 손에 넣겠다고 말한다.

이 세계에는 한국처럼 주민 등록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각각의 테라리움들이 자신들의 주민들을 관리하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테라리움을 떠나면 거기서 끝이었다. 행정 관리원의 월렛을 통해 모든 정보가 들어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베스탈리스들의 의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이 있을까요?”

그들은 비꼬듯이 말했다. 이게 최선이라는 것처럼. 여기서 더 반의한다면 전부 무(無)로 돌려 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하는 듯했다.

그들에겐 결국 베스탈리스는 이용하기 좋은 병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불을 해치울 수 있는, 휘두르기 좋은 전력.

오랜 시간 을의 입장으로 살아온 베스탈리스들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제도에 문제점이 있을 수 있으니 시범적으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제의한 혜택을 모든 테라리움이 일시에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존재하지만 테라리움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각기 다른 운영을 해 왔고 법도 제각각 달랐다. 번호 연계법이 아니면 강제되는 규칙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만 강하게 제의를 한다면 1번째 테라리움과 척을 지기 싫기에 마지못해 지키는 건 있었다. 의무 지원 정책이 그러했다.

이 자리에 있는 10번대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들은 다르겠지만, 이 자리에 없는 행정 관리원들은 베스탈리스에 대한 혜택 제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건 지키고 싶은 테라리움만 지키라는 게 아닌가요? 베스탈리스들은 강제로 징병되어야 하지만 혜택은 테라리움들이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너무 일방적이지 않나요?”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분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경제 상황이 힘든 분들이 많을 테니. 그러니 지원자를 받아서 테라리움 몇 곳이 우선적으로 운영을….”

어쩌면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은 전부 나서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베스탈리스에 대해서 철저하게 외면할 게 뻔하겠지.

대세를 따르려는 행정 관리원들 역시 한 자릿수 테라리움이 미지근하게 나온다면 모르쇠 할 수도 있고. 방법은 하나뿐. 자리를 끝내야겠다.

“중앙 행정 관리부의 입장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다만 베스탈리스들의 공헌에 대해 알리는 건 그대로 진행해 주시되, 발의한 정책에 대해선 시행일을 무기한 늘려 주시기 바랍니다. 베스탈리스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차피 이 자리는 92번째와 93번째 테라리움 방어전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리였으니 중대 사항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엔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회의에선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감안하겠습니다.”

다음 회의에선 이 정도까지 사정 봐주진 않을 거란 소리. 어쩌면 지금이 최선일지도 모르는 상황. 베스탈리스에 대한 처우가 더욱 나빠질 수도 있는 도박적인 선택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나서서 공헌을 알리겠다고 자기들 입으로 말했으니 지키긴 할 거다. 당장은 그거면 됐다. 그것만으로도 큰 시작이었다.

“애초에 저들에게 뭘 바라면 안 됐던 것일 수도….”

크레아시온을 처리한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음습한 집단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 앞길에 그들과 양립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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