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3화 (603/604)

여관은 파필리온의 소개를 받아 가장 고급스러운 곳으로 잡았다. 회의 이후 1번째 테라리움의 배를 불려 주는 게 아니꼬왔기에 다이아를 지불하는 내내 속이 뒤틀렸다. 내가 다이아를 쓰는 걸 아깝다는 기분이 들도록 만들다니.

민들레를 통해 보좌관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목욕을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막내인 에이레네는 최근 60번째 테라리움에 열을 올리느라 바빴고 디케는 28번째 테라리움을 계속 돌봐야 했으니 오고 있는 건 아무래도 에우노미아인 듯했다.

촤아악.

따뜻한 물에 재와 흙먼지를 씻어 내니 살 것만 같았다. 제대로 된 목욕은 정말 간만이었다.

카수스를 추적한 이후 쉴 새 없이 90번대 테라리움 방어전까지….

간단한 샤워 정도론 씻어 낼 수 없었던 묵은 먼지들이 물에 섞여 흘러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조금 민망해졌다. 자동으로 어느 정도 청결을 유지하는 포르타의 장비가 아니었다면 찝찝해서 살 수 없었겠지.

고급 여관답게 욕조도 아주 크고 넓어서 물 밖으로 머리만 내민 채 다리를 쭉 뻗어도 공간이 한참 남았다.

따뜻한 수온이 긴장한 몸을 녹이며 노곤노곤하게 만들었다.

“너무 쉴 새 없이 움직였지….”

그런데 이렇게 몰아치는 바쁜 일정에 몸이 충분히 적응된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과제로 밤을 새워도 부족한 수면을 며칠에 거쳐 갚아야 했고, 버티기 위해 쉴 새 없이 커피와 담배 연기를 몸속에 집어넣어야만 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의 도움 없이 쪽잠을 자며 먼 거리를 이동하는 강행군을 버틸 수 있는 데다 수면 부족을 호소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피로 회복제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자주 마셨다간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혼이 났기에 정말 급할 때만 뚜껑을 열었다.

“혹시 이게 바로 모험 근육이라는 걸까?”

공부 근육, 글 근육이라는 말이 있듯 모험을 많이 해서 버틸 힘이 생겨난 게 아닌가 싶었다. 어엿한 모험가가 된 거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똑, 똑….

고요한 욕실 안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회의 내내 적잖게 반감을 표하던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을 떠올렸다.

“얼마나 질질 끌려는 걸까….”

정보력으로 따지면 많은 부분에서 나보다 월등할 텐데 너무나 모르쇠로 일관한다. 차라리 세계수가 짠하고 나타나 다 설명해 줬으면 하는 답답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됐다면 베스탈리스들이 지금까지 핍박받는 일은 없었겠지.

그러고 보니 모험 초중반엔 종종 내 꿈에 찾아와 메시지를 전했던 세계수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연락을 끊어 버린 게 떠올랐다. 아마도 바곳이 제이와 나를 분리해 낸 그 이후부터겠지.

마치 메인 퀘스트를 제시해 주는 NPC처럼 종종 내게 방향을 잡아 주곤 했는데 말이야.

목욕을 끝낸 후 모쪼록 절대 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샤워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쇼핑을 끝낸 후 돌아온 파필리온이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신나게 쇼핑을 하고 돌아온 건지 소파 옆에 세워진 쇼핑백의 수가 꽤 많았다.

저 중 내 물건을 담은 쇼핑백은 몇 개려나?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다가가자 파필리온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날 아예 신경 안 쓰는 거야? 아니면 도발이야?”

“내 옷은?”

“신경 안 쓰는 쪽이구나. 이거야. 내 취향대로 사 봤는데.”

취향이란 말에 찝찝했는데 쇼핑백에서 옷을 꺼내자 의외로 단출한 블라우스와 바지가 딸려 나왔다.

“취향은 가격표에 있나 본데. 얼마짜리야?”

“뭐… 기성복이라 그렇게 비싸진 않아. 진짜 내 취향을 맞추려면 디자이너를 불러왔겠지만. 그럴 시간은 없잖아?”

내 물건이 든 쇼핑백은 하나란 거지? 그럼 나머지는…. 뭘 저렇게 바리바리 사 온 거야?

낭비벽이 심한 녀석을 흘기자 은근한 눈빛을 보내온다.

“그건 그렇고 모처럼 둘만 오붓하게 남았는데….”

“여기에 왜 우리 둘만 있어? 드라이어드는?”

“쳇.”

그가 아쉽다는 투로 혀를 찼다. 옷을 챙겨 방으로 향하는 등 뒤로 그가 말했다.

“1번째 테라리움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생태 숲이 있다는데 어때? 주변에 산책로도 잘 나 있고 분위기도 좋다는데. 회의가 끝난 후 잠깐 들러 볼래?”

“아, 거기.”

생태 숲이라면 행정 관리원 소집령으로 1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했을 때 칼미아가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시들링과의 데이트 코스로 추천하며….

결국 그날 카이시아의 일로 무산이 됐지만.

“어라? 알고 있어?”

“그럴 시간 없어. 여기 놀러 온 줄 아니?”

시들링과도 못 가 봤는데 너와 가겠니?

“테라리움 개발 참고용으로 방문해도 좋잖아?”

매몰차게 방 문을 닫고 들어가니 아쉬운 소리가 따라 들어오다 뚝 끊겼다.

옷을 입는 동안 파필리온이 밖으로 나갔는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 다시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 분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에우노미아가 도착해 그를 마중나갔었나 보다.

새 옷의 뻣뻣한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투를 위해 입는다고 하더라도 장비가 훨씬 편했다.

“아, 저 왔어요.”

방 문을 열고 나가자 에우노미아가 반색했다.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보좌관이 뒤늦게 따라온 이유가 있었다. 바로 방어전을 비롯해 회의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 후 전달해 주기 위해서였다.

방어전의 결과를 수치화하고 이후 들려오는 베스탈리스들에 대한 소문을 수집하고, 또한 부탁한 자료도 함께.

“여기 있어요.”

“고마워요. 오신 김에 회의에도 함께 참석하시는 건 어때요?”

“그렇게 할게요.”

그녀가 건넨 보고서 더미를 훑고 있는데 파필리온이 치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언제 봐도 아름다워. 그대를 꽃에 비유하자면 아침 이슬을 머금은 장미와 같다고 할까?”

“제가 아름다운 건 이미 알고 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네요. 전 장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글쎄요. 가시가 있어 사람을 다치게 만들잖아요?”

꼴사납게 추파를 던지는 파필리온도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게 맞받아치는 에우노미아도 대단했다.

듣기론 우리와 만나기 전 그녀가 꽤나 대단했다고 했는데.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있으니 가볍게 만나 보는 건 어때?”

“내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뭘 해 줄 수 있는데요? 아, 참고로 어지간한 선물은 질렸으니 아주 특별한 걸 준비해야 할 거예요. 온갖 희귀하고 값비싼 건 다 받아 봤거든요. 참고로 전 물질적인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에우노미아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관심을 끌기 위해 엄청난 선물 공세를 벌인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녀는 정작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고 ‘경험’을 중요시했다.

화재 사고로 인해 과거 기억을 잃게 되며 생겨난 습성 같은 것이었지. 특별한 경험을 일종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매개체로 여기기도 했고.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그녀와 만나게 된 것도 그녀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 환심을 사려던 누군가의 노력 때문이다.

“특별한 경험이라…. 블랙 릴리가 내게 해안 테라리움에 별장을 사 줬는데 같이 놀러 갈래?”

“별장은 질리도록 다녀 봤어요. 아마 온갖 특별한 곳에 있다는 별장은 다 가 봤겠죠. 겨우 그 정도인가요?”

“그것보다 내가 사 준 별장 가지고 뭐 하는 거야?”

“혹시 질투하는 거야?”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거지.”

회의가 시작되기 전 빨리 자료들을 훑으려는데 파필리온의 방해가 만만치 않았다.

“평범한 별장이 아니야. 나 같은 미남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특별한 경험이….”

에우노미아를 향한 파필리온의 잡소리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내 뒤로 에우노미아가 재빠르게 따라 들어왔다. 자기를 버리고 가지 말라는 파필리온의 징징거림이 들려왔다.

“원래 저런 놈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에우노미아에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많이 겪어 봐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것보다 텃세를 부리는 꼴이 너무 아니꼬워요. 혹시 보좌관인 제 동생들에게도 저러나요?”

“텃세?”

“마치 수컷 새가 조잘대며 경쟁자를 견제하는 꼴이잖아요. 자긴 다른 보좌관들과 다르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가 본데 꽁지깃을 잔뜩 펼친 공작새 같아서 우습기도 해요.”

그런 견해는 처음이었기에 제법 신선했다. 파필리온이 개수작을 걸어 대는 게 텃세를 부리는 거였다니.

“그것보다 부탁했던 자료 말인데요. 베스탈리스의…. 아, 빨간색 띠예요. 네, 그거.”

에우노미아가 가리킨 서류를 꺼냈다.

“협조를 받아 1번째 테라리움에서 압수한 베스탈리스들의 재산 목록을 작성했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규모가 상당해요.”

“그러네요…. 이렇게 빼앗아 먹고도 회의 땐 입을 싹 씻어 버린 걸 떠올리니 양아치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1번째 테라리움이 감시라는 명목으로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에게 빼앗은 재산은 아주 상당했다. 물론 베스탈리스들이 표면적으론 ‘기부’라는 형태로 1번째 테라리움에 전달한 거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갖은 사회적 제한이 걸리니 거의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런 행태가 만발하고 있다는 걸 미미르의 가정 방문 사건 때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과거 부를 축적한 베스탈리스 가문들은 아주 많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아주 강력했으니 강한 힘에 부와 명예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처럼 재산을 축적했을 터.

하지만 상황이 역전되고 현재는 그런 부와 명예를 그들과 상반되는 입장인 넵튜누스 가문들이 독차지 중이었다. 베스탈리스들은 재산도 뺏겨, 사회적 지위도 뺏겨. 더구나 숨어지내기까지.

“중앙 행정 관리부가 베스탈리스들을 더욱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겠네요.”

베스탈리스의 사회적 지위가 회복되면 아마도 그들은 더 이상 상납을 받을 수 없을뿐더러 받은 걸 다시 토해 내야 할 수도 있었다.

자료에 적힌 피해 가문들만 해도 수가 상당한데 이들에게 전부 돌려줘야 한다면, 1번째 테라리움의 경제가 휘청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은 사회적 인정만 받으면 피해 보상 따위 요구하지도 않을 것 같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베스탈리스의 사회적 인정엔 수많은 탐욕스러운 자들이 이해득실이 엮여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1번째 테라리움을 압박할 수 있는 뭔가가 더 없을까?

문득 파피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중앙 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던 게 떠올랐다.

역사를 발설하지 않는 건 파피루스 종의 신념과도 같은 것.

하지만 종자 보관소에서 파피루스 드라이어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그는 많이 엇나가 있었다.

주인을 위해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서슴없이 벌일 수 있다는 그 태도.

같은 종족인 드라이어드들을 인공 개량으로 공장처럼 찍어내는 데다 강한 드라이어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번개까지 맞게 했던 잔혹한 행위를 그는 묵인했었다.

사실 모두 인페르노의 주도하에 벌어졌기에 주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작정 따른 드라이어드보단 밖에 있는 파필리온 같은 놈들이 아주 나쁜 놈들인 거지만.

파피루스는 카수스의 드라이어드들을 떠올리게 할 만큼 위태롭게 느껴졌다.

종이 오랜 세월 지켜온 불문율을 깨뜨리려는 그를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해서라도 주인을 구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파피루스들이 관찰자의 입장으로 개입하지 않는 건 충분히 이해됐다. 마치 회의장에서 봤던 서기처럼 말이다.

모든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에 그들이 발설한다면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누군가는, 혹은 어떠한 단체가 감추려고 했던 역사가 드러나기도 하겠지.

과거에 대해 아는 건 이로운 면도 있을 테지만 한편으론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양날의 검과 같았다.

어쩌면 왜곡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만약 발설하는 과정에서 드라이어드의 해석과 인간의 해석 사이에 오해가 생겨 문제가 발생한다면?

베스탈리스를 위해 파피루스를 이용하는 게 옳은 선택인 걸까? 무엇보다도 그의 향후 처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유일하게 입을 여는 파피루스를 1번째 테라리움이 욕심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보를 독점하려 들겠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왜곡할 수도 있고.

주인인 크레아시온이 담보로 잡힌 이상 파피루스는 그들이 시키는 모든 걸 하려고 들 텐데….

“내용이 많이 심각한가요?”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깊은 생각에 빠진 내게 에우노미아가 물었다.

현재 내 시선이 고정된 서류는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의 재산 압류 건을 지나 90번대 테라리움 방어전에 대한 보고서였다.

임무에 참여한 드루이드 부상자들의 수와 재산 피해 정도가 심각했지만, 결과만 본다면 무척이나 희망적이었기에 심각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예 없어질 뻔했으니 이 정도 피해는 감수할만하지.

오히려 예상보다 빠르게 92번째와 93번째 테라리움이 재건에 성공할 것 같다는 의견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빠르면 2년 후에 정상적으로 수확제를 지낼 수 있을 정도라….

“아뇨, 다른 생각 중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에우노미아와 디케, 에이레네 세 자매의 고향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파피루스 드라이어드도 있을까?

“네, 말씀하세요.”

마침 이 자리에 에우노미아가 있는 게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회의는 베스탈리스의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자리. 그 안엔 온건파 베스탈리스뿐만 아니라 인페르노에 소속되어 있던 강경파 베스탈리스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악행에 대한 지탄을 받아도 충분한 이들까지.

물론 인페르노의 결성 원인에 대해선 1차적으로 그들이 핍박받은 데에 있었다.

권리를 되찾기 위한 목적을 넘어서 아예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욕까지 번지는 바람에 심하게 엇나갔지만. 그들이 존재해 왔던 고대부터 인페르노가 있었던 건 아니니 삶이 나았다면 그런 조직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 자매는 조사를 통해 자신들의 고향에 참사를 일으켰던 배경에 인페르노가 있음을 밝혀냈다.

‘개척하는 불꽃’, 인페르노에서 과격파들이 모여 있는 가장 난폭한 부류로 파괴와 같은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아서 할 뿐만 아니라 조직의 자금 수급을 맡는 파벌이었지.

그들은 세 자매의 고향에서 생산된다고 여겨지는 사파이어를 독점하기 위해 그곳의 폐광산을 사들였고 끝내 자신들을 속였다는 생각에 큰 폭발을 일으켜 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그 과정에서 세 자매의 부모님은 명을 달리하고 그들 또한 생이별하게 되었다. 에우노미아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에우노미아는 인페르노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중앙 행정 관리부가 밀고 있는 의견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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