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2화 (602/604)

저 말이 정말 사실일까? 이단… 들이 드루이드들과 함께 테라리움을 지키는 데 공헌했다고….

“세계 인구 중에 드루이드가 차지하는 비율은 낮을뿐더러 모든 드루이드들이 평생 동안 전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다 보니 사상자도 많은데 모든 이들의 실력이 동일한 것도 아니기에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기까지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고. 더구나 불의 위협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지요.”

세계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 불과 싸울 수 있는 전력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뿐인데 수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불에 의해 고통받는 테라리움이 많은데 그 모든 곳에 전력을 원활하게 보급하는 건 어렵다.

드루이드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병원은 연일 병실이 가득 찰 정도로 다치는 사람도 많고, 과수원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유족들에게 전사자에 대한 위로의 말을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근래에 전투가 잦다 보니 의뢰 게시판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빼곡히 차 있다고 했던가.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갈수록 의뢰 기피 현상이 커져서 악순환이 반복된다고도 했고.

이런 내용들은 회의 때마다 질리도록 다루는 안건들이라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사회 문제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파악하기 쉬운 내용들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새로운 전력의 등장을 누구보다도 중앙 행정 관리부가 있는 1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장 반겨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걸 제쳐 두고서라도 불을 해치울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베스탈리스들은 드루이드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옹호. 객석에 앉은 이들 중 우려를 표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 모인 모든 행정 관리원들이 드루이드 제이와 같은 뜻이라는 거겠지.

한 자릿수 테라리움만큼은 아니더라도 내로라하는 행정 관리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 이들이 지지하니 의견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도 더욱 말을 고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단들을 세계의 영웅인 드루이드들과 같은 취급을 해 달라니. 이 회의의 결말은 대체 어떻게 끝나게 될까?

“그 발언에 대해선 좀 더 진중하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베스탈리스들이 큰 공헌을 한 건 알겠습니다. 물론 중앙 행정 관리부는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정보를 모을 겁니다.”

어쩐지 한 발을 빼는 태도. 그들은 확실하게 베스탈리스의 공헌을 인정하는 게 아닌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얼핏 들으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듯하지만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중앙 행정 관리부의 어조와 어투를 기록하는 건 아주 신중해야 했으므로 그저 들리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다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베스탈리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인식 변화를 요구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드루이드 제이 표정이 와그작 구겨지는 게 보였다. 너무나 살벌하여 순간 흠칫 놀랄 정도였다. 옆에 앉은 남자는 오히려 이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끝내주는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불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잘못 덧씌워진 편견이지 않나요? 이럴 때일수록 중앙 행정 관리부에서 더더욱 나서서 인식 변화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최근 베스탈리스들이 많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정식 공표된 사건 이외에도 불을 사용하는 자들로 하여금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니 그런 자들에게 이제 와서 인식 변화를 요구해서 되겠습니까?”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모든 베스탈리스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는 인페르노에 소속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쉰 후 말을 이었다.

“악행으로 인해 종족 전체가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따지고 보면 드루이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갑작스럽게 드루이드를 폄하하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드루이드는 마냥 선량한 자들만 모여 있나요? 드루이드이면서 사명을 저버리고 힘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도 많을 텐데요? 그리고 이 말까진 안 하고 싶었지만….”

모든 베스탈리스가 나쁜 건 아니다. 모든 드루이드가 착한 건 아닌 것처럼. 하지만 그녀가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은 대체?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먼 과거 세상에 큰 재앙이 닥쳤다는 걸 아시는 분 계시나요? 중앙 행정 관리부이니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기 힘든 자료들도 많이 접하셨겠죠. 세계가 멸망 위기까지 갔었던 건 다양한 드라이어드들의 모체 신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어쩌면 간신히 남아 있는 기록도 있을 겁니다.”

“허무맹랑한 소리군요.”

“아뇨. 분명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먼 과거, 세상에 큰 재앙이 닥쳤다? 세계가 멸망 위기까지 갔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지?

위대한 세계수가 보살피는 이 땅에 멸망이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는 도통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기록할 때도 내가 맞는 글을 쓰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난 기록하며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을 살폈다. 표정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확실한 건 그중 몇은 무언가 아는 눈치라는 것이었다. 설마… 드루이드 제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꼭 필요한 겁니까? 이 자리는 확실하지도 않은 과거 역사 따위를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뇨. 필요합니다. 그 재앙을 몰고 온 자가 바로 드루이드였으니까요. 한때는 위대한 영웅이라 칭했던 자였을 겁니다. 어쩌면 최초이자 지금까지 단 하나의 순례자일지도 모르겠네요. 수많은 테라리움과 사람들을 불의 위협으로부터 구해 내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은 자. 세계수와 가장 가까웠던 자. 그런 자가 했던 짓은 영생을 얻고자 세계를 제물로 바쳐 끝내 재앙을 몰고 온 겁니다. 사람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드루이드가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귀하께선 이 자리의 엄중함을 잊으신 겁니까?”

결국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가 정말 농담을 하고 있는 거라면 왜 저분들은 아무 말 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드루이드 제이가 눈을 감고 신음하는 몇몇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체통을 잊고 소리를 쳤던 이가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경악하는 눈이 되었다.

“저 말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고서에 기록은 되어 있으나 완전한 사실이라 보긴 어렵지. 말 그대로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이니까. 실제로 보고 겪은 이들은 모두 흙먼지가 되었을 테니 누가 증명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지금으로선 단순한 옛날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아뇨. 증명할 이들은 존재합니다.”

꼴깍, 난 연신 터져 나오는 충격 발언에 침을 삼켰다. 급하게 오느라 물을 챙기지 않은 게 실수였다. 입 안이 타들어 가고 뒤통수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앉은 자리가… 무서웠다.

“존재한다고?”

“네. 첫째, 그 드루이드는 재앙이 닥쳐오기 직전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 즉 자신의 사람들을 바다 위 안전한 섬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렇게 위기를 피한 자들의 후손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그들은 선조들이 남긴 역사 기록을 통해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선조들의 죄를 고백하기 위한 증인이 될 겁니다.”

세상에… 자신의 사람들만 피신시키다니.

“핏줄이라…. 하지만 이 또한 신빙성이 부족하지.”

“그렇습니다. 아무나 데려다 연기를 시킬 수도 있지요.”

“둘째, 파피루스 드라이어드들이 있습니다.”

파피루스 드라이어드? 그건 무슨 드라이어드지?

그 드라이어드가 언급되자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의 반응이 묘하게 변했다.

“역사 기록에 특화된 드라이어드로, 아주 먼 옛날부터 드라이어드로 태어나 보고 들은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드라이어드. 그런 파피루스 드라이어드라면 세계에 재앙이 닥쳤던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요.”

그런 드라이어드도 있구나. 역시 드라이어드의 세계는 굉장해. 잠깐… 그런 드라이어드가 많다면 나와 같은 서기라는 직업은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기억력이라면… 선조부터 후대까지 기억을 공유하다니…. 뭐 그런 사기적인 능력이 다 있어?

“좋은 시도입니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발설하는 순간 역사를 오염시켰다고 생각하기에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파피루스 드라이어드의 목숨보다도 귀한 사명이기에. 애초에 그들이 입을 열었다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단 한 그루, 조건을 만족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역사 지식을 털어놓겠다던 파피루스 드라이어드가 있습니다.”

비밀을 지키는 걸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드라이어드인데 그걸 발설하겠다고?

드루이드 제이의 발언은 이번에도 가히 충격적이었는지 중앙행정 관리부 사람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입을 열겠다고 말한 파피루스 드라이어드가 있다고요?”

“네, 그를 통해 진위 여부를 확인하면 되겠네요. 어떤 고서를 들이밀어도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할 여러분들이지만 설마 파피루스가 하는 말까지 허구의 것이라 칭하진 않으시겠죠?”

“…….”

“어쨌든 증명은 차후로 미루고. 이를 통해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겁니다.”

그녀가 올곧은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사랑하고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드루이드도 인페르노에 버금가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며 그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뤘던 자도 끝내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람들이 드루이드에 편견을 가지진 않습니다. 불을 해치울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드루이드는 어딜 가든 환영받는 존재입니다. 편견으로 핍박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니 드루이드들은 악행을 덮을 더 많은 선행을 할 기회가 있어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리 대단한 힘이라도 쓰는 자에 따라 달리 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조차 없다면 그 힘이 쓰일 곳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베스탈리스에게도 드루이드와 마찬가지로 선행을 베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기회가 필요합니다.”

반례로 드루이드를 들었기 때문인지 중앙 행정 관리부는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1번째 테라리움은 세계수의 뜻을 우선시할 뿐.”

누군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고 끝내 1번째 테라리움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 세계수의 뜻을 언급하고 말았다. 하지만 난 그의 발언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위대한 세계수를 이용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틀리려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래요, 세계수. 그 말 역시 왜 나오지 않나 했어요. 세계수야말로 베스탈리스들을 보살펴 왔는데 세계수 뜻대로라면 더욱더 그들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감히 세계수를 모독할 셈인가!”

“베스탈리스들에겐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미르의 샘이라 불리는 샘물이지요. 본래 베스탈리스는 남자아이들은 배 속에서부터 살아남을 수 없었으나 이 미미르의 샘물을 마시면 온전히 태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미미르의 샘을 만든 게 누군지 아시나요? 바로 세계수입니다. 세계수가 베스탈리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요.”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연금술사들에게 미미르의 샘을 조사하라고 하면 바로 나올 겁니다. 세계수의 수액과 같은 정순한 기운을 그들은 바로 알아차릴 거예요.”

계속되는 충격적인 발언. 결국 회의는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휴식을 갖자는 말에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밀리는 걸 느끼니 도망가는 꼴 하곤.”

옆에서 파필리온이 혀를 차며 말했다. 좀 전엔 이 녀석의 돌발 행동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네.”

1번째 테라리움이 베스탈리스들을 곧바로 받아들이진 않을 거란 건 이미 예상했었다. 그렇기에 각오도 했지만 막상 직접 겪어 보니 치가 떨린다.

여기서 내가 빈틈을 보인다면 마치 베스탈리스들의 공헌까지 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배짱이 좋으십니다. 중앙 행정 관리부를 상대로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아주 능숙하더군요.”

키르켄이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를 한다. 무서울 게 없냐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 그저 진실을 말할 뿐이니까요. 두려울 게 없죠.”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게 지금까지의 관행이었으니 제이 님의 행보는 무척 흥미롭지요. 아,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전 지금 무척 흥미롭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난 마치 최전선에 선 탱커처럼 진이 다 빠질 것 같은데 그는 지켜볼 뿐이니 오죽 즐기기 좋을까?

“회의 도중 휴식 시간을 이렇게 길게 낸 건 저들끼리 할 이야기가 많다는 거겠지요. 우리도 그동안 차라도 마시며 머리를 식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키르켄이 나가는 문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아니, 그보다 그대, 배는 고프지 않아? 상태로 보아 곧바로 1번째 테라리움으로 올라온 거 같은데 여관에 잠깐 들르는 건 어때?”

파필리온이 내 상태를 살피며 다른 제안을 건넸다.

“시간은 충분하니 차라리 그렇게 할까….”

키르켄의 말처럼 중간 휴식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보통은 회의가 끝난 후 이뤄져야 할 내부 논의가 당장 급해졌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오늘 회의 자리에 나온 사람들 외에 다른 이들까지 소집해 논의를 할 수도 있고.

시간은 식사로 코스 요리를 즐겨도 될 만큼 넉넉했기에 파필리온의 제안대로 여관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씻고 싶기도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겠네. 생각해 보니 나만 장비 차림이잖아?”

“여기도 전쟁터나 다름없으니 장비 차림도 나쁘지 않지요.”

키르켄이 농담하듯 말했다.

“그럼 그대가 씻고 있는 동안 내가 옷을 따로 마련해 오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파필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입을 옷을 쇼핑해 올 테니 다이아를 달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마치 카드를 달라는 것처럼.

“보좌관들이 오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옷을 부탁할 수도 있는데?”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내 걸 사는 김에 겸사겸사 네 것도 사겠다는 마음을 알아차렸으니 하는 소리지.”

아주 뻔뻔하긴. 가끔 보면 쟤가 엘더보다 더하다.

“두 분은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는 우리 둘을 향해 키르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필리온이 이에 맞받아치며 느끼한 말을 퍼부을 기세라 막으려던 차, 대화를 끊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저기….”

서기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파필리온의 희생양이기도 했고.

“아, 안녕하세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이 회의장을 이용할 때마다 서기가 앉아 있는 건 봤다. 다만 다들 여태 존재감이 아주 없었기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러고 보니 그 자리에 있었지.’ 하는 정도였다. 오늘처럼 파필리온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서기의 존재에 대해 가볍게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인사하자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되며 고개를 숙인다.

“좀 전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 실수를….”

서기는 파필리온이 지적했던 일을 언급하며 내게 사과했다.

“아, 아니에요.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에이,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지. 아주 중요한 자리인데.”

파필리온이 끼어들며 밉살스럽게 말했다. 다만 여태 봐 왔던 그의 모습은 여성에겐 한없이 친절한 모습뿐이었기에 서기에게 날을 세우는 지금의 모습은 조금 생소하기도 했다.

자신의 말론 바람둥이와 같은 모습은 다 연기하는 거뿐이라곤 했지만 그다지 신뢰는 가지 않고….

뭐, 그가 서기에게 날을 세우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가 제기했던 이의처럼 이번 회의의 기록에 실수는 절대 있어선 안 됐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베스탈리스의 인식이 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점, 사회에 알려지는 첫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기에 훗날 트집이 잡힐 만한 흠이 남아선 안 됐다.

“앞으로 잘하시면 되죠. 이의 신청 이후 바로 고치셨잖아요?”

“아….”

내 말에 그녀는 크게 감동한 얼굴이 되어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전 오르덤이라고 합니다. 1번째 테라리움 소속으로 서기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좋아하는 건 맛집 탐방이고 취미는 독서에….”

다만 가벼운 인사 치고는 소개가 과했다. 난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저 그리고… 팬이에요!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네? 팬… 이요?”

“오호?”

파필리온이 이 상황을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며 자칫 무례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훑어봤다.

“네, 드루이드 제이 님을 다루는 모든 기사는 읽어 봤어요. 제이 님께서 이루신 많은 정의로운 일들에 흠모하게 되었어요.”

내게 팬이 있다고? 순간적으로 미미르와 로웰라가 떠올랐다. 그런데 뭔가 그녀는 둘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악수를 끝낸 후 손을 놓으려고 했는데 계속 붙들렸다. 얼굴을 보아하니 자기가 아직까지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곤 계속 횡설수설. 나쁘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솔직한 심정으론… 그녀는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열성적인 분들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그래도 항상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있었어요. 오늘 회의에 참여하신다는 걸 알게 된 후 얼마나 심장이 떨렸던지….”

그녀는 마치 내가 주인공인 악수회에 참여한 팬처럼 손을 꼭 잡고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냈다. 연예인들이 이런 기분인 걸까…?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위에 큰 손이 올라왔다. 그러곤 기다란 손가락을 이용해 틈을 파고들어 가르고 이내 힘을 주어 잡힌 손을 떼어 냈다. 파필리온의 행동에 자신이 여태 손을 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오르덤이 화들짝 놀라 손을 회수했다.

“앗 죄송해요!”

떼어 낸 내 손을 그대로 자신의 손과 깍지를 끼게 만들려는 파필리온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려쳤다.

“장난치지 마.”

“난 그대를 상대로 장난친 적 없어. 항상 진심이라니까?”

난 잡힐 뻔한 내 손을 주무르며 우물쭈물하는 오르덤을 바라봤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제게도 팬이 있다니… 조금 생소하네요.”

“그런…! 드루이드 제이 님의 팬이 얼마나 많은데요! 드루이드 제이 님을 모티브로 한….”

나를 모티브로 한?

“죄송하지만 저흰 휴식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분이 전장에서 전투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오신 거라 피로가 많이 누적된 상태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파필리온은 자신이 마치 연예인의 매니저라도 되는 것처럼 굴며 오르덤에게 선을 그었다.

“저… 그럼… 혹시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손도장이나….”

“네? 사인이요?”

“잠깐이면 되는데…. 기념으로 갖고 싶어서….”

그녀의 행동은 여러모로 날 당황하게 만든다.

“행정 관리원의 서명이 얼마나 많은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 함부로 하겠습니까? 손도장은 더욱 안 될 노릇이지요.”

파필리온은 일리 있는 말을 밉살스럽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도 팬이라고 하니까, 더구나 그 모습이 진실되어 보여 매몰차게 대하고 싶진 않았다. 날 좋아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인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그렇다고 하니 기념될 만한 다른 무언가는 어떨까요? 이런 것도 되려나?”

확실히 사인이란 게 결국 내 서명이니 애꿎은 데 사용될 수 있기에 해 줄 순 없고 손도장은 과한 느낌이라 선물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주머니를 뒤져 잡히는 걸 꺼냈는데 수공예 자수 팔찌가 나왔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관광 상품 개발 일환으로 이것저것 제작이 한창이었는데 그 샘플 중 하나를 나도 모르게 챙겨온 듯했다.

어차피 드루이드는 액세서리도 기능성을 우선시하기에 이런 꾸미기용 액세서리는 내가 착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설마 제게 주시는 건가요?”

“네, 제 테라리움에서 판매 예정인 시제품이긴 한데 이런 걸로 괜찮으시다면….”

“정말 기뻐요!”

그러곤 볼을 붉히며 팔찌를 받아 갔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선 수공예품을 밀고 나가게?”

“여러 상품 중 한 가지야. 아무래도 세금이 없다 보니 다양한 종사자들이 모여서 뭐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태가 됐거든. 주력 상품은 키르켄 님 도움으로 계속 찾고 있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키르켄이 으스대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정말 소중하게 여길게요. 감사합니다.”

받는 사람이 저렇게 기뻐하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내게 팬이 있다니….

선물을 주자 오르덤은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물론 미련이 남는 듯 힐끔힐끔 계속 여길 바라봤지만 나 역시 계속 붙잡혀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애써 시선을 피했다.

다른 행정 관리원들은 휴식 시간 동안 대기실을 그대로 이용하겠다고 했기에 나와 파필리온만 여관으로 향했다.

“이렇게 되면 다른 걸 걱정해야겠는데?”

“뭘?”

“좀 전에 서기 말이야. 부정적인 인식으로 기록을 망칠 걸 걱정했는데 그대의 팬이라고 하잖아. 그대를 향한 팬심으로 지나치게 미화해서….”

“주의를 받았는데 또 그러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 역시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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