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1화 (601/604)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에 내 마음의 불만이 행동으로 표현되는지 준비가 더디기만 하다.

특수 잉크와 종이들을 챙겨 회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손님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을 지나쳐 가게 되었는데 제법 얼굴이 알려진 유명한 행정 관리원들이 가득했다.

행정 관리원이라고 다 같은 행정 관리원이 아니었다. 대부분 신상이 알려지지 않은 한 자릿수 테라리움과 다르게 10~20번대 테라리움들은 행정 관리원들이 대외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브랜딩의 한 방법이라고 들었다.

신비주의를 버리고 친근한 이미지를 택해 주민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방법이라고 했던가?

행정 관리원이면서 한편으로 드루이드인 사람들도 많아서 투기장과 같은 대회에 자주 참가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은 매번 순위권에 들지 못하면서도 꾸준히 투기장에 얼굴을 내보이는 자도 있었고.

한 자릿수 테라리움이 특출나게 대단하긴 하나 그렇다고 10번대 테라리움이 지나치게 급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최고의 차선책이었으니까.

“어… 저 사람은?”

다들 한 존재감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어떤 한 여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직감적으로 저 사람이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란 느낌이 들었다.

서기 일을 할 땐 논의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거도 중요했지만 분위기나 어조에 따라 뜻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관찰력도 꽤나 중요했다. 가령 기록상으론 심각한 이야기일 순 있어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농담조로 진행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므로.

녹음으로 남기지 못하니 최대한 이런 부분들을 반영해 기록을 사실적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눈에 익는데.”

모여 있는 사람 중 가장 젊은 여자였다. 정복을 차려입은 다른 이들과 달리 전투 장비를 입고 있었다. 이 자리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긴 했다.

1번째 테라리움에 발만 들여놓아도 사람이 바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도시에 온 순간부터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게 된다. 근사한 도시에 어울리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갑자기 비싼 옷을 입고 점잔을 빼고.

그런데 중앙 행정 관리부를 만나는 이렇게 중요한 자리임에도 전투 장비 차림이라니. 더구나 방금 전투를 치르고 온 것처럼 군데군데 흙먼지와 잿가루가 보였다. 대충 묶은 머리도 여기저기 올이 튀어나와 단정해 보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상한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녀의 그런 차림을 지적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대하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매무새를 좀 다듬을 수도 있을 텐데, 중앙 행정 관리부에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

동그란 이마, 올곧은 검은 눈, 강한 고집이 드러나는 꾹 다문 입. 그녀에게 느껴지는 익숙함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모습을 천천히 뜯다 마침내 떠올려 냈다.

“길드전….”

저런 유명인을 왜 이제야 알아차린 걸까?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거 아냐?

어쩌면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제이… 라고 했던가?”

그녀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아스키아 길드와의 길드전에서였다. 올해 최고의 연금술로 꼽히는 대나무 숲 상영 장치를 이용해 길드전이 진행되는 과정이 생중계되었었지. 아쉽게도 1번째 테라리움에서 그걸 확인할 순 없었지만 길드전이 끝난 직후 연일 그 사건만 다루는 소식지를 통해 대부분의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사진도 작게나마 소식지에 실려 있었다. 상영 장치의 매 순간을 찍어 낸 건지 소식지가 발행될 때마다 그녀의 사진이 다각도로 올라왔지만 크게 찍힌 사진은 없었다.

소수 길드로 내로라하는 대형 길드를 상대로 이겨낸 건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길드전이 끝난 이후로 한동안 그녀의 행적을 다루는 기사들이 연이어 쏟아졌었다. 항간에선 그녀가 거대한 해일로부터 해안 테라리움을 구해 낸 전설적인 드루이드라는 속설도 존재했다.

추측성이 다분한 기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소식지에서 말하는 그녀는 세상에 다시 없을 대단한 드루이드였다. 구해 낸 테라리움이 아주 많고 해치운 악당도 수백에….

그중 길드전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사건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관한 폭로였지. 세상에 그런 음지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참상을 드러내게 만든 위인이라니.

그녀의 행보에 집중하는 사람들 외에도 그녀의 재력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았다. 무려 세계 유일 두 개의 테라리움을 가진 행정 관리원이라니.

일평생 일해서 다이아를 모아도 뒤 번대 테라리움 하나 살 수 없을 정도인데 그녀는 번호도 아주 좋은 테라리움을 두 개나 소유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운영 중인 테라리움도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세금이 없다는 파격적인 운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대체 그 대단한 재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건지….

명예와 재력을 동시에 가진 드루이드.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대단한 사람.

그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드루이드 중 하나였으며 많은 이들의 롤 모델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를 추종하는 팬도 많았다. 더구나 그녀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런 쪽으로도 많은 팬이 생겨났다.

그녀의 하나뿐인 연인이 된다면 앞으로의 인생은 무척이나 화려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소설이 있다고도….”

유명인을 모티브로 만든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많았다. 현재 그녀의 팬들이 그녀를 대상으로 다양한 창작물들을 만들어 낸다는 소문도 들었다. 예술의 도시 2번째 테라리움에선 그녀와 그녀의 알려진 드라이어드들과의 모험을 그림으로 그려 한데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녀의 팬이었기에 소문이 들려오는 족족 귀를 기울였지만 매니아 층이 워낙 두터워 시장에 나오는 즉시 완판되는 바람에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어느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도 그녀의 팬이라고 하는데 재력도 대단한 수집가라, 프리미엄이 붙은 물건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들여 품귀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도 했다.

그자가 3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역시 1번째 테라리움에 입성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이 좀 더 좋았다면 저번 행정 관리원 소집령 때 내가 서기로 참가해 더 빨리 만나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혹시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던 걸음을 대기실 앞에서 멈춘 채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문득 늦었음을 깨달았다. 절대 해선 안 되는 실수였다.

평소 마음에 두었던 유명인을 만났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내가 지금 일터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더 담은 후 아쉬움이 철철 남는 걸음으로 회장으로 향했다. 오늘 일이 끝나면 만날 <불의 성자> 팬에게도 드루이드 제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줘야겠다. 소설 <불의 성자>에 등장하는 드루이드가 상당 부분 드루이드 제이와 닮아 있는 만큼 그자도 관심 있어 할 게 분명했다.

회장에 도착하는 게 늦었지만 아직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도 전부 자리해 있는 건 아니었다. 매번 자신들이 무척 바쁨을 지각으로 표현하는 이들이었기에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기를 위한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 곧 있으면 드루이드 제이가 이 회장 안으로 들어올 거란 생각에 설레어 손이 조금 떨렸다. 너무 떨려서 기록에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나둘 남은 자리가 모두 채워지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90번대 테라리움’, ‘방어전’ 등등의 단어가 들리는 걸 보니 오늘 회의의 안건은 소식지에서 지겹도록 다루는 그 사건인가 보다.

그런데 행정 관리원 소집령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다시 행정 관리원들이 찾아온 걸까? 혹시 의무 지원 정책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그래선 안 되는 걸 알지만, 만약 드루이드 제이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철저한 중립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내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어 버릴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왜 단체로 우르르 몰려왔는지 원….”

“어쩌면 잘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행정 관리원들을 불러 모으는 수고를 덜어 준 걸 수도 있으니.”

“준비가 끝났으니 귀빈들을 모셔와 주세요.”

회의 시작에 맞춰 안내원이 대기실에 있던 행정 관리원들을 불러왔다.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감추며 힐끔힐끔 입구를 곁눈질했다. 가장 먼저 열린 문으로 마치 개선장군처럼 그녀가 등장했다. 그 뒤를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에 잔뜩 힘을 준 행정 관리원들이 따라 들어왔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90번대 테라리움에 단독 파견을 요청했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제이입니다.”

금발의 남자가 마치 보좌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어 주는 게 보였다. 저 남자도 분명 행정 관리원일 텐데?

“굳이 소속을 한정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여기 있는 모두가 귀하께서 28번째 테라리움뿐만 아니라 16번째, 그리고 60번째를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귀하가 요청했던 단독 파견은 28번째 테라리움에 한정되어 있지만 의무 지원 정책의 순번이 돌아오면 16번째도 60번째도 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그저 습관입니다.”

얼핏 들으면 묘하게 공격적인 어조의 말에도 드루이드 제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금발의 남성이 빼어 준 의자에 앉으며 약간 지루하단 표정을 짓는 그녀가 놀라웠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마치 자리 쟁탈전이라도 벌이듯 주위에 있던 행정 관리원들이 좀 더 가까이에 앉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데 왜 중앙 행정 관리부가 그녀에 대해 묘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

부디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대화를 모두 기록하며 내가 잘못 느낀 건 아닌지 몇 번이나 곱씹어 읽어 보았다.

“그럼 방문 안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미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92번째 테라리움과 93번째 테라리움은 이제 안전합니다. 불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으며 지도의 면적이 줄어드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소식지에서 지겹도록 다루던 90번대 테라리움의 불의 침입. 그런데 그녀가 그곳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으로 사수해 냈다고?

오늘 이후로 더 팬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회장 안이 잠시간 웅성거렸다. 하지만 금방 체통을 지키기 위해 조용해졌다.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거란 말입니까? 너무 과장된 말은 향후 신뢰를 잃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일의 순서대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먼저 전력을 모집했습니다. 앞으로의 상황을 드루이드들만으로 해결해 나가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아 새로운 전력을 찾는 게 우선 순위라 생각했습니다.”

“전력이라 하면?”

“그러고 보니 귀하께선 소집령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대체할 새로운 전력이 있다고.”

난 내 두 귀와 착실히 말을 적어 나가는 내 손 그리고 적힌 글씨를 보는 두 눈을 의심했다.

새로운 전력이라니?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단어가 더 많은 뜻을 내포하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를 대체할 전력이란 말은 불을 해치울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뜻했으니까. 혹시 연금술사들을 말하는 걸까? 그들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 것이라면 말이 맞을지도….

“네. 이 세계에 어쩌면 드루이드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해 왔던 자들입니다. 이전까진 그들에겐 불을 해치울 힘이 존재는 하나 숨겨져 있었기에 그들 역시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전력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그 힘이 발현되어 현재는 드루이드와 마찬가지로 불을 상대하는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을 상대하는 전장에서 활약…. 순간 글을 쓰던 펜이 미끄러져서 잉크가 보기 흉하게 번졌다. 나중에 저 부분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듣는 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더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주시지요. 대체 그 전력이란 건 무엇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알고 있을 겁니다. 베스탈리스라는 존재들에 대해.”

이번엔 웅성거림을 넘어 회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점잖음 빼면 시체라 생각되는 이들이 체통을 잊고 시끄럽게 떠들어 댈 정도로 ‘베스탈리스’라는 단어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이런 반응이 생겼다는 건, 뭔가 아는 사람들만 아는 그런 단어인 걸까? 특히나 고위급들만 아는….

갑자기 내가 앉은 자리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져 작은 실수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중요한 자리에 나가는 건 경력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떤 회의에 참가하든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주고받는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주제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엄청난 부담감이 날 짓누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스탈리스가… 그 전력이란 말입니까? 귀하는 불을 숭배하는 이단 집단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

드루이드 제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을 멈췄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 새어 나올 뻔한 비명을 간신히 참았다.

이단…! 세계 곳곳에서 잔악무도한 짓을 펼치는 추악한 사람들!

감히 위대한 세계수의 은혜도 몰라보고 세계수의 안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짓들을 펼치며 우리의 숙적인 불을 숭배하는 미친 사람들 아닌가?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도 그 이단들이 벌인 짓이라고 했다.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불을 숭배한단 말인가?

“그 표현은 잘못되었다는 걸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설마… 그녀가 그 이단들을 지금 ‘옹호’하고 있는 건가? 표정을 찌푸리며 말을 멈췄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난 내 안에 자리한 드루이드 제이에 대한 정의로운 이미지가 조금씩 깨져 나가는 걸 느꼈다. 설마 그녀가 이단들과 한패라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이단을 이단이라 말하는 게 잘못됐다니?”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날 선 태도로 응수하는 중앙 행정 관리부의 태도는 처음이었기에 기록을 하는 나 역시 쉽게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어떻게 기억해야 하지? 어조를….

그때 드루이드 제이의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순 아주 잘생긴 미남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끼어들자 잠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말씀 도중 실례합니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발언권을 요청하는 건 무척 실례되는 행동이었지만, 여기 모인 자들이 전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그의 발언 요청은 승낙되었다.

“그대는?”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파필리온이라고 합니다.”

“굳이 지금 발언권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가 갑자기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람에 심장이 땅에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저기 앉아 계시는 서기 분을 교체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좀 전부터 이런 상황에 많이 익숙하지 않으신 분 같은데 혹시라도… 기록에 ‘실수’라도 하실까 걱정되는군요. 오늘 있을 회담은 아주 ‘중요한’ 회담이니 한 치의 실수라도 없었으면 합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펜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당황하고 있던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은 맞았다. 여기서 벌어진 일들은 보고 들은 많은 증인들이 있다 하더라도 회담이 끝난 이후 전해 듣고 공문을 내릴 이들은 내 기록을 참고할 테니 실수가 있어선 안 됐다. 더구나 기록에 내 감정을 싣는 일도 철저히 배제해야 했다. 나는 이 자리에 앉는 순간만큼은 철저하게 기계가 되어야만 했다.

“…이의를 수락하지요.”

그의 지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나를 주목한다. 대역 죄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요. 이런 회담은 처음 맡은 겁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오르덤… 입니다.”

“내부 회의에선 자주 봤던 분이십니다. 아무래도 담당 서기들이 일정이 바빠 급하게 배정된 분 같으시군요. 업무를 계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교체를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주십시오.”

내 의견이 중요할까? 난 입술을 깨물고 슬쩍 드루이드 제이가 앉아 있는 자리를 곁눈질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상황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의로운 영웅이니까.

“대체 왜 그런 거야? 왜 애꿎은 서기를 걸고 넘어가?”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블랙 릴리. 그대가 베스탈리스의 이야기를 꺼낸 이후부터 저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는걸? 기록에 편견이 들어간다면 그대가 이룩한 업적이 훗날 폄하될 수도 있는데, 그대를 사랑해 마지않는 내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사실 분위기 환기가 필요해 보이긴 했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객석 가까이 앉은 내겐 전부 들렸다.

결국 저자가 날 이용했다는 걸 깨닫자 조금 분통이 났다. 물론 내가 직업 윤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내가 기록을 오염시키는 아마추어와 같은 일을 하진 않았을 텐데. 난 엘리트 코스를 밟고 무려 1번째 테라리움에 힘겹게 합격한 인재라고.

“교체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는 건 내 경력에 오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자리가 앞으로 계속 생길 텐데 그때마다 경력 문제로 배제되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극복해 내야 나 역시 경력을 갖게 된다.

“이후 한 번 더 건의가 들어온다면 교체될 수도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난 허벅지 살을 쥐어뜯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내 뺨을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다 보니 별수 있나?

아직도 날 응시하는 그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앞으로 제대로 하는지 계속 두고 보겠다는 것처럼. 다신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머릿속을 비웠다.

“그럼…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귀하께서 하신 발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모든 베스탈리스가 불을 숭배한다는 인식은 잘못됐습니다. 정확히는 영혼에 박힌 불씨를 숭배하는 겁니다만…. 여러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는 데 많은 공헌을 한 건 베스탈리스들 중에서도 인페르노라는 교단을 만들어 활동하는 자들입니다. 인페르노는 제가 과거 이 자리에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미 설명드렸던 걸로 압니다. 그러니 다들 자세히 알고 계시겠지요.”

베스탈리스, 인페르노. 이해하는 걸 멈추고 기계처럼 받아 적는다.

“한편으론 인페르노에 가담하지 않는 베스탈리스들도 있습니다. 사회에 순응하여 지내는 자들로 어떠한 차별적인 대우라도 감내하고 있지요. 그들은 또한 모든 행적을 1번째 테라리움이 철저히 관리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모든 행적을 관리한다고? 그건 사생활 침해… 아냐, 기록하는 데 집중해.

“그런….”

중앙행정 관리부의 사람들이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드루이드 제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놀랍다는 눈치였다.

“불의 힘을 다룰 줄 안다는 걸 제외하면 영혼에 세계수의 축복이 심어진 드루이드와 같이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세상을 침범한 불에 의해 불을 다룰 줄 아는 모든 이들이 나쁜 인식을 얻게 됐고 핍박의 피해자가 되었지요. 다 같은 불이 아니라는 건 여러분도 잘 알지 않나요? 우리도 실생활에서 불을 이용하고 있잖아요. 베스탈리스가 다룰 줄 아는 불의 힘은 악한 힘이 아니라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보통의 불, 그런 불이란 걸.”

다 같은 불이 아니다. 베스탈리스라는 자들이 몬스터 불과 관계가 없단 말인가?

“물과 높은 친화력을 가진 넵튜누스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것과는 무척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죠.”

그 말에 2번째 아카데미에서 쉽게 권력을 차지한 넵튜누스 가문 출신 아이들이 떠올랐다. 불이 위협하는 이 세계에서 그와 반대되는 속성의 물은 확실히 인식이 좋았다. 그러니 넵튜누스 가문은 갈수록 환대받았고.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하루아침에 그런 인식을 깨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젠 세상을 위협하는 불과 베스탈리스들은 전혀 동류의 존재가 아니란 걸 증명할 방법도 있습니다. 바로 베스탈리스들이 사용하는 불의 힘엔 정화의 능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드라이어드가 불을 처치할 수 있듯 베스탈리스들도 정화의 힘을 사용해 불을 해치울 수 있습니다. 둘이 같이 편이라면 어떻게 해치울 수 있겠나요?”

회장 안에 정적이 흘렀다.

“믿기 힘드시더라도 이미 그곳에서 함께 전투를 치렀던 드루이드들이 증명해 줄 겁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지켜봤습니다. 베스탈리스가 불을 해치우는 모습을. 드라이어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수많은 불을 처리했어요. 드루이드들이 사회로 복귀한다면 앞다퉈 그날의 무용담을 전달하겠지요. 당장 용병으로 뛰었던 드루이드 하나를 섭외해 캐물으셔도 됩니다. 설마 전투에 참여했던 모든 드루이드들이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시진 않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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