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를 위해 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중간중간 내 테라리움을 방문했다. 그들 역시 행정 관리원이 참가한 방어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격려의 말도 전할 겸, 90번대 테라리움과 새로 태어난 테라리움들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막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주민들을 위한 물자는 하염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특히나 90번대 테라리움은 구호 차원에서 많은 테라리움과 기업들이 지원을 보내고 있지만, 91번째와 101번째는 무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아직 ‘인정받은’ 테라리움이 아니었기에 정식적으로 구호 물품을 받을 수도 없었다.
회생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는 것도 참 문제였다.
60번째 테라리움은 다른 테라리움보다도 의료진과 연구원들이 많았기에 방어전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우선적으로 받아 주기로 했다. 물론 이미 많은 수가 그쪽으로 파견 나가 있기도 했다.
2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했을 때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대강 소문을 전해 듣긴 했지만 쉽사리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의외의 인물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좌관들과 함께 등장한 이들은 키르켄을 포함한 1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었다. 그들은 이번 방어전에 베스탈리스들을 데뷔시키는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뒷받침해 준 사람들이기도 했다.
물론 정책적인 측면에서 최우선적으로 이득을 얻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한편으론 내 모든 행동을 그저 사업 동맹이란 이름하에 무조건적으로 믿어 준 사람들이기도 했다.
드루이드 외에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새로운 전력의 출현이라니.
방어전의 임시 처소에 모여 있던 드루이드들의 초반 부정적인 의견만 봐도,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만 믿고 내버려 둬선 자칫 잘못했다간 다음 의무 지원 정책 대상자가 덤터기를 쓸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도 다들 앞다투어 순번을 앞당기면서까지 내 의견을 지지해 줬지.
어쨌든 얼마나 애가 탔으면 다들 28번째 테라리움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소집령이 내려졌을 때도 다들 수확제 중간에 자리를 비워야 한다며 어찌나 성화였는데.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방어전이 승리로 끝난 게 맞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1번째 테라리움으로 가서 보고를 하려고….”
“아니, 곧바로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셨습니까? 너무 매정한 거 아닙니까? 기다리고 있던 저희들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키르켄이 반쯤 장난을 섞어 이야기했다.
사실 저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어지간한 소식은 다 전해 듣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90번대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지원 물자 중 10번대 테라리움의 마크를 박은 상자도 제법 많이 봤으니까. 현지로 지원을 보내며 겸사겸사 상황도 확인해 오라고 했겠지.
“드루이드 외에 불을 해치울 수 있는 전력이 있다는 건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고 오는 길입니다. 아마 그곳으로 용병을 나갔던 드루이드들이 각자의 테라리움으로 돌아간다면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더 빨라지겠지요. 92번째와 93번째 테라리움은 이제 안전해졌습니다.”
내 입을 통해 사실을 전달받자 그제야 다들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의무 지원 정책도 바뀌겠군요?”
역시나 가장 마음 졸이고 있을 안건.
다이아가 무한대라 경제 걱정이 전혀 없는 나와 다르게 주민들의 세금을 통해 테라리움을 운영해야 하는 이들은 걱정이 아주 클 테니까.
이번 일로 인해 천정부지로 치솟는 의뢰비를 직접 지켜봤으니 더 애가 탔을 것이다.
의무 지원 정책의 첫 번째 타자는 나였지만, 다른 테라리움들이 마냥 손을 놓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주변 시선들에 지쳐 직접 의뢰를 내걸어 용병들을 보낸 곳도 많았다.
내가 방어전에서 본 대다수의 드루이드들이 그런 의뢰를 통해 온 이들이었다.
“네, 90번대 테라리움을 완벽하게 지켜 냄으로써 80번대 테라리움들도 안전해졌으니까요. 어쩌면 지도의 경계선이 더 늘어날 수도 있어요.”
행정 관리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전달하고 싶은데…. 빨리 세상에 퍼뜨려야 할 이야기들이다 보니….”
“이럴 게 아니라 함께 가시지요. 보고 하시는 걸 직접 곁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조금 놀랐다. 이 많은 행정 관리원들이 1번째 테라리움까지 동행한다고?
급한 궁금증은 해결했으니 보고가 끝난 후 1번째 테라리움에서 정식으로 발행하는 공문을 통해 확인해도 될 텐데.
“뭐 마차 안에서 들어도 되고요.”
키르켄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결국 어떻게든 이야기를 더 들어 보겠다는 속셈에 어이가 없었다. 덕분에 보좌관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마차에 동승할 인원을 정하는 작은 소란이 생겼다.
행정 관리원들이 기다리는 통에 이야기를 짧게 끝내고 다시 오른 마차 안. 이들이 왔다면 당연히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물었다.
“그러고 보니… 파필리온이 없네요? 어지간히 결과를 궁금해할 텐데.”
“아… 그분이라면 아마 1번째 테라리움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진작 떠났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보고를 위해 당연히 1번째 테라리움으로 올 테니 먼저 가 있겠다고 했지요.”
키르켄이 혀를 차며 답해 주었다.
“그 녀석도 참 대단하네요.”
28번째 테라리움에 모여 날 기다리던 행정 관리원들도 대단했지만 한발 앞서 1번째 테라리움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녀석은 더했다.
난 마차 안에서라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무용담을 듣기 위해 동승한 이들이 하나 같이 눈을 반짝이는 통에 결국 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할 때까지 떠들어 대야만 했다.
중앙 행정 관리부에 보고하기 전 예행 연습을 하는 거라고 좋게 좋게 생각했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자주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던 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한 후, 간단히 소속을 밝힌 것만으로 곧바로 의회장으로 안내되었다.
1번째 테라리움의 분위기는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그다지 바뀐 게 없어 보였다. 난 방어전의 영향으로 조금은 어수선해져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90번대 테라리움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있든 말든 세계수의 바로 곁, 가장 안전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겐 남 일일 뿐이었다.
떠날 타이밍을 잡지 못해 93번째 테라리움 안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떠올랐다. 수없이 밀려드는 병자를 너나 할 것 없이 보살피며 굳게 닫힌 문만을 바라보던 이들도.
다들 기를 쓰고 앞 번대 테라리움에 입주하려고 하는 이유가 아주 명확히 잘 드러나는 현실이었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삶. 어차피 망하더라도 가장 나중에 망할 곳이니….
전쟁의 한복판에서 직접 겪고 온 나로선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로 가득 뒤덮인 새까만 땅과 건물과 모든 것이 새하얀 도시는 명확하게 비교되었다.
“의회가 준비될 동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소식을 기다리며 28번째 테라리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행정 관리원들과 달리, 내 도착과 동시에 이제 준비가 들어간 중앙 행정 관리부도 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방어전 소식은 분명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 일의 총책임자인 내가 이곳으로 이동 중이라는 소식도 전해 들었을 텐데…. 급한 자만 애가 탄다는 거지.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지만 대기실에서 꽤 오랜 시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1번째 테라리움은 어디까지 소식을 전해 들었을까? 새 가지에 대한 소문도 들었을까?
함께 온 행정 관리원들이 하나둘 불만을 내비칠 때쯤 준비가 끝났다며 안내원이 찾아왔다.
캘린더를 보며 오늘 딱히 잡힌 일정은 없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면 오늘도 가서 책이나 읽고 오겠네.”
출근 전 도서관에 방문해 읽을 책을 골랐다. 일정이 없어도 만일을 대비해 매일 출근해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근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든 자유였다.
내가 고른 책은 현재 1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드루이드와 일반인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 험난한 모험을 떠난 드루이드 연인을 테라리움에 남아 기다리며 서로 주고받은 연애편지의 내용이 주가 되는 소설이었는데,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이 도서관이 보유 중인 권수만 해도 20권이 넘었다.
이 외에도 1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장 잘나가는 장르는 소설이었다.
“어느 테라리움은 생존을 위한 필독서가 잘나간다는데 아무래도 여긴 그런 쪽과 거리가 머니까…. 그런 책은… 뭔가 마음이 불편해서 읽지 못하겠어.”
나처럼 수많은 경쟁을 뚫고 1번째 테라리움에 입성한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았다. 가장 안전하며 이상적인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
불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게 풍족하며 인프라가 좋다. 도시 안에 모든 편의 시설과 취미와 예술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시설들이 전부 갖춰져 있었다. 누구라도 1번째 테라리움에서 한번 지내고 난다면 두 자릿수의 테라리움은 전혀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대여하려고 하는데요…. 음, 소식지는 어때요?”
“늘 똑같죠. 90번대 테라리움에 관한 이야기예요. 불이 침입했다든가 드루이드 인력이 부족하다든가.”
“아직도 그런 이야기뿐인가요? 좀 지치네요. 좀 더 밝은 이야기로 피로감을 해소해 줄 수도 있을 텐데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소식지 배포는 과수원과 도서관이 취급했다. 보통 때와 달리 가득 쌓여 있는 소식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읽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는 거겠지.
“연금탑이나 투기장 쪽 소식을 더 알고 싶은데 말이죠. 아니면 공방의 신제품이나 요즘 잘나가는 공연이라든지…. 계속해서 그쪽… 이야기만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불이 침입해서 난리가 난 건 한두 해도 아니고. 어차피 어떻게든 해결될 텐데.”
“가장 중요한 소식을 다뤄야 하니까요.”
사서는 내 의견에 동조하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말이 맞아요.”
그때 뒤에서 대여를 위해 줄을 서고 있던 사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글쎄 때가 좋지 않다며 제가 기다리던 연극 일정이 연기된 거 있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할 예정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러곤 억울한 목소리로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염없이 소식지만 기다리는데 그런 내용은 다뤄 주지도 않고 온통 불의 침입에 관한 이야기뿐이에요! 세계의 반이 사라졌다든가 92번째와 93번째 테라리움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등….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을 달랠 수 있는 예술이 필요한 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세계의 반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너무 허무맹랑해서 와 닿진 않죠. 여기 사는 사람들은 그게 잘 실감이 안 나기도 하고요. 뭔가 저희들만을 위한 소식지를 따로 만드는 것도 좋을 텐데요. 그런데 어떤 내용의 연극이었는데요?”
“‘불의 성자’예요.”
“아, 그 내용 알아요. 소설로도 있었죠? 주인공이 살던 테라리움이 불의 침입으로 인해 반파됐는데 어떤 명망 높은 드루이드가 구하러 와 주었고 끝내 둘이 동료가 된다는 내용이었잖아요? 반파된 테라리움에 대한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인상 깊었어요.”
“역시 아시는구나! 전 동료로 발전하는 그 서사가 너무 좋았어요.”
<불의 성자>라면 꽤 유명한 소설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연극이 만들어질 거라고 전해 듣긴 했는데 최근 상황이 좋지 않아 연기되었다니. 그런데 왜 연극을 아무 상관도 없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연기하는 거지? 여긴 불의 침입과 그다지 관련이 없잖아?
“여기 처리되었어요. 대여 기간은 3일이니 꼭 잊지 말고 반납해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책의 대여 작업을 끝내고 가려고 하니 뒤에 있던 사람이 붙잡았다. 그러곤 <불의 성자>를 좋아하는 팬을 만난 게 꽤 기뻤는지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또 같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냐고 물었다. 좋아하는 게 같은 사람과 대화하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었기에 난 기꺼이 다음 약속을 잡았다. 바로 오늘 퇴근 후 도서관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 오늘은 뭔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인데.”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들고 회장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중앙 행정 관리부에 속한 이 건물은 온갖 행정에 관한 대소사가 논의된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회의에 참가해 그곳에서 논의된 모든 내용들을 기록하는 업무…지만 나 외에도 서기는 많이 있었고 회의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늘 한가한 편이었다.
회의가 없다고 행정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건 아니었고 주로 외부 손님과 함께 논의가 이뤄질 때 이 회장이 이용되었다. 가장 최근에 큰 사건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행정 관리원 소집령 때가 아니었을까? 그땐 서기도 세 명이나 기용되었었다. 물론 난 경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거대하게 느껴지는 회장 문을 지나쳐 서기실로 오니 벌써 출근한 사람들이 여유로운 얼굴로 내게 인사한다.
깨끗하게 치워진 책상에 앉아 오늘 대여한 소설을 올려 두었다.
“아, 그때 뉘앙스로 따져 보면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어제 회의에 참가했던 직원이 회의 내용을 리마인드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다른 어떠한 능력보다도 기억력이 가장 중요했다. 기록 저장은 연금탑에서 개발한 녹음 장치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중요 안건을 논한 자리가 그렇게 통으로 기계에 저장되는 걸 누구도 원치 않았다.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로 남기는 우리들의 일자리가 보전된 거지만.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엔 실수가 있을 수 있었고 기록을 남기는 우리가 실수했다간 큰일로 번질 수 있기에 논의된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남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여기서 큰일이란 테라리움 간 분쟁이었다. 실제로 과거 서기의 기록 실수로 분쟁이 일어났던 적도 있고.
그러니 보통 사람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이 우선되었다.
기억력이라고 하니 누군가 떠오른다. 나를 포함한 여기 있는 직원들 모두가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특히나 나는 명문으로 손꼽는, 자랑스러운 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 학생들의 다양한 지적 탐구를 위해 외부 초청 강사가 방문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 강사 중 한 명이 기억에 남았다. 아니 강사가 아닌 강사가 데려온 수업 보조 아르바이트생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였지. 신화 속 여신과 같은 엄청난 미모였어. 그곳에 있던 남자들 대다수가 아르바이트생에게 한 눈이 팔려 강의 내내 그쪽만 바라봤던 걸로 기억한다. 강의가 끝나고도 다들 앞다퉈 말을 걸기 위해 뛰쳐나갔고. 이름은….
“에우노미아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꽤나 유명한 부자이자 라이벌 관계였던 테사와 키멜리가 그녀의 환심을 얻으려 경쟁했던 일은 한동안 학생들의 뜨거운 관심사이기도 했다. 둘이 벌였던 경쟁이 워낙 대단했어야지.
학생도 아닌, 외부 초청으로 딸려온 아르바이트생에게 펼쳤던 물질 공세는 내가 평생 일해도 누려보지 못할 것들뿐이었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만 유통되는’, ‘1번째 과수원에만 납품하는’, ‘대형 길드의 간부급들만 사용하는’ 등의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선물들이 그녀에게 전달되었고 난 그때 그런 것들도 존재하는구나 하고 깨달았던 거 같다.
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에 다니지만 우리 집은 10번째 테라리움의 평범한 중산층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어쩌면 그때의 사건이 내가 더욱 1번째 테라리움으로의 입성을 갈망하게 된 원인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사는 세계가 한편으론 너무 궁금했으니까.
어쨌든 에우노미아라는 그 여자는 미모도 대단했지만 한편으론 뛰어난 기억력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 모든 걸 기억했었다.
강의 때 앉아 있던 학생들의 모든 이름은 물론 그들의 위치, 그날 입은 옷, 강의 동안 무엇을 했었는지까지…. 마치 그날의 기억이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것처럼 전부 기억해 냈지.
언젠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구석에 앉아 평범하게 강의를 듣고 있던 내 이름과 옷차림, 그날 강사에게 했던 질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말했을 땐, 솔직히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녀의 기억력이라면… 아마 지금 내가 하는 서기 자리는 물론 탄탄한 승진대로까지 이미 따 놓은 당상일 거다. 나 역시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했지만 그 정도는 되지 못했으니까.
에우노미아는 내게 물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뭘 하고 싶냐고.
조금 이상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아카데미에 머무는 동안 만나는 학생들마다 졸업하면 뭘 할 건지를 물었다고 한다. 나 역시 그 행동 범주에 포함되었고.
난 마지막 학기를 수료할 때부터 서기 일을 꿈꾸고 있었기에 시험을 치른 후 1번째 테라리움의 서기가 되고 싶다고 답했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였다. 아주 잠깐. 하지만 이내 여상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구나. 그건 정확히 뭘 하는 직업인데?”
“간단히 말해서, 회의를 듣고 기록하는 직업이죠.”
“으음…. 가만히 앉아서?”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건 좀 재미없지 않아?”
난 순간 그녀가 내 꿈을 폄하한다고 생각해 발끈했지만, 그녀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그녀는 현재 이 아카데미의 요주의 인물, 최고의 스타, 모두의 관심사. 굳이 그녀를 적으로 둬 내게 이로울 게 없었다.
“당신처럼 기억력이 좋다면 최고의 일자리일 텐데요?”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그녀의 칭찬을 하며 어물쩍 넘겼다.
“아, 난 좀 더 다양하고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일을 원해. 내가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거든.”
“서기 일을 하면 다양한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어요. 매일 같은 회의만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래? 그렇게 듣고 보니 그것도 참 대단한 일 같아.”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일은 없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서기는 ‘재미없는 일’이라고 규정된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나와 에우노미아의 만남은 끝이었지만 아직까지 기억이 선명할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때 무려 1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서기 업무를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 정도로 폄하했던 그녀가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하는 일보다 더 대단하려면….
“오르덤 씨, 오늘 일정 확인 부탁드려요.”
누군가의 부름이 상념을 깨뜨렸다.
“급하게 일이 잡혔어요. 당장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 다들 기록 검토에 바빠서.”
“네? 오늘 딱히 뭐가 없긴 한데… 갑자기라뇨?”
“행정 관리원들이 다수 찾아왔어요. 저도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못 들었어요.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이 준비되는 즉시 회의가 시작될 거 같으니 오르덤 씨도 준비해 둬요.”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흘러갈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