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9화 (599/604)

“93번째 테라리움이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는 저희들이 킹이라 부르는 터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92번째 테라리움에서 온 불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생겨나 필드의 절망을 전부 집어삼키고 무섭도록 성장한 놈입니다.”

그렇다면 핵은 이미 곳곳에 존재하지만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닐까? 그리고 계속해서 불을 만들어 내고 있고.

만약 일대의 불의 침범이 극악에 달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미 지도상에 사라져 버린 뒤번대 테라리움 몇몇엔 핵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처럼 완전히 구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거나, 내가 들르지 않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라고 모든 뒤 번대를 샅샅이 다녀 본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야 핵이 모습을 드러내는 조건을 달성했을 수도 있고.

확실한 건 핵을 치우면 주변이 완전히 정화될 수 있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이 세계의 불의 침입을 몰아낼 제대로 된 방법이 생겼다는 거다. 드디어 세계를 구할 방법을….

“93번째 테라리움의 승리를 제대로 알려야겠어요. 현재 테라리움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이 될 거예요.”

“이제 구조대도 부를 수 있겠죠.”

내 말에 다들 이럴 때가 아니라며 토론하던 걸 멈추고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93번째 테라리움을 지켰어….”

어려운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끝내 해냈다.

드라이어드들과 베스탈리스들이 힘을 합쳐 전선을 구성하고 끝내 보스를 물리쳤다. 덕분에 핵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불의 침입을 완전히 막아 낼 수 있었다.

세계 지도의 무너진 반을 간신히 막아 냈다.

핵을 치우고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땅을 복구시킨다면… 지도를 복구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어깨가 무거워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해야 하는 일이, 내게 걸린 운명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세계에 희망이 생긴 거니까.

“다들 정말 수고했어. 우리가 해냈어.”

일부러 드라이어드들을 격려했다. 정말 힘든 싸움이었으니 모두가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나는 거의 마지막에 막타를 친 격이지만 드라이어드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가디언의 힘으로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격려해 주고 최전선에서 앞장서 전투를 전두지휘하고. 끝내 베스탈리스가 도착할 시간까지 벌어주었다.

“스텔라, 당신도 정말 고마워요. 킹을 해치우는데 베스탈리스들의 공이 아주 컸어요.”

특성에 구애받지 않는 이레귤러 전력들. 그들이 있었기에 킹의 까다로운 패턴을 쉽게 넘길 수 있었다.

“여기 있던 모두가, 함께 전투했던 모두가 증인이 될 거예요. 베스탈리스들이 어떠한 힘을 가졌고 그 힘으로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 지켜본 모든 이들이 증명해 줄 거예요.”

베스탈리스들의 성공적인 데뷔. 그들의 협력으로 마지막 경계선인 90번대 테라리움을 사수하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널리 알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큰 업적이었다.

물론 나 또한 나서서 그들의 업적을 알릴 것이다.

“이제 시작이구나.”

더 좋아해도 될 텐데 스텔라는 덤덤하게 지금부터 시작임을 알렸다. 전혀 만족하지 않는다는 그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네, 시작이죠.”

“끝이 아닌 시작의 선에 서 있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기회를 줘서 고맙단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별처럼 반짝거렸다.

드디어 굳게 닫혀 있던 93번째 테라리움의 문이 열리자 밀려 있던 보급품 지원이 빠르게 이어졌고 마찬가지로 중상자들을 다른 테라리움으로 이송하는 행렬이 시작되었다.

테라리움 안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밖으로 나오게 된 사람들은 완전히 정리된 필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 역시 기껏해야 소강상태를 예상했을 텐데, 주위를 둘러봐도 작은 불 하나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놀라웠을까?

좀 더 지난 후지만 92번째 테라리움도 정리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93번째 테라리움처럼 곧바로 모든 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시간 차를 두고 천천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 역시 93번째 테라리움에 있던 핵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알려야 할 정보가 참 많았다.

“곧바로 가시는 겁니까?”

떠나는 마차에 오르는 날 보며 제퍼가 물었다. 하루쯤은 푹 쉬어도 되지 않냐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전 이제부터 시작이죠.”

솔직한 마음으론 하루 정도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드루이드 제희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치더라도 행정 관리원 제희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번 방어전으로 많은 것들이 변할 터였다.

많은 행정 관리원들이 걱정했던 의무 지원 정책. 방어전이 성공적으로 끝나 80번대에 대한 위험이 대부분 사라진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돌아가며 의무적으로 전력 공급을 해야 했던 정책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해졌다.

내게 이번 방어전을 맡겼던 행정 관리원들은 목이 빠져라 소식만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스탈리스에 대한 건.

소식이 와전되기 전에 그들의 공을 제대로 전달해야만 했다.

스텔라가 포함된 강경파 베스탈리스들을 비롯해 에트나가 이끄는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은 내가 만든 가지 덕에 새로운 터전으로 탈바꿈한 테라리움들에 머물기로 했다.

근처 90번대 테라리움과 인접한 91번째 테라리움에는 온건파들이, 101번째 테라리움엔 강경파들이. 물론 방어전에 참여한 베스탈리스들을 이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누는 건 맞지 않지만.

더 위험한 곳으로, 더 불과 가까운 곳으로 가겠노라고 선택한 쪽은 스텔라였다. 스텔라가 이끄는 자들 역시 이 의견에 딱히 반대하진 않았다.

“그곳을 기점으로 ‘핵’을 찾아보도록 하지.”

그들 역시 쉬지 않았다. 전투의 여운이 남은 건지 한번 달아오른 몸을 쉬이 식히지 않으려는 모습은 마치 타고난 전투 민족처럼 보였다.

반면 에트나가 이끄는 무리는 91번째 테라리움에서 잠시 쉬어가겠다고 했다. 테라리움을 한 시라도 바삐 살기 좋은 곳으로 일구고 아직 주저하는 다른 베스탈리스들을 불러오는 데 주력하겠노라고 말했다.

다른 행보였지만 어느 쪽으로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기에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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