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맞는데 좀 더 묘한 기운이….”
활활 타오르는 핵은 계속해서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마치 모닥불이나 벽난로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니 체력이 되시는 분들은 남은 불을 해치우러….”
93번째 테라리움이 완전히 안전한 구역이 된 건 아니었기에 곧바로 다음 전투를 위해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핵의 처리를 고민하기 위해 남는 사람들은 얼마 안 됐으며 대다수는 부상자 수습과 잡몹들 처리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좀 더 길게 승리감을 즐겨도 좋을 텐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실새삼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저러다 예상을 뚫고 뭐가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나겠군.”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그것보다는 뭔가 다른 느낌인데…. 그럴 리 없는데 익숙한 느낌도 들고.”
난 계속해서 내게 기이한 끌림을 일으키는 불덩어리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혹시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정화의 힘이 있는 건 베스탈리스니 한번 나에게 맡겨 보겠느냐?”
스텔라가 나서서 자신이 핵을 살펴보겠다 말했다. 정말 그게 답일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그녀 역시 핵 주위에서 꿈틀대는 기운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저걸 살펴봐야 하는 건 기운을 알아차린 내가 해야 되는 일이 아닐까?
“제가 먼저 살펴볼게요.”
물론 이 결정은 많은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안 돼요.”
“차라리 드라이어드들에게 맡기거라.”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것에 직접 다가가겠다고 하니 드라이어드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단순히 응집된 에너지가 아니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데 대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그러다 문득 머리를 세게 때리고 지나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 알?”
“알?”
“응,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저게 ‘알’과 같다고 느껴졌어.”
그다지 좋은 묘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알이란 대개 생명을 품고 있는 요람과 같은 것이니까.
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 않는가? 생명은커녕 죽음만 몰고 오는 존재들이기에.
“당신이 느끼고 있는 걸 모두 이야기해 봐요. 제희는 특별한 존재니까 우리와 느끼는 게 다른 걸지도 몰라요.”
핵에 마음을 쓰고 있는 날 주시하던 메스키트가 달래듯 입을 열었다.
“의심하지 말고. 어차피 네가 보고 있는 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내가 무엇을 말하든 믿겠노라고 말해 주는 드라이어드들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내가 핵에 다가가는 걸 막기 위해 필사적이란 느낌도 받았다. 차라리 어떻게든 해답을 도출해 내 내가 직접 무언가를 해야 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아… 왜 익숙한 느낌이 드는지 알았어!”
뚫어 버릴 듯 빤히 바라보니 영혼을 태워 버릴 것처럼 불길하고 지독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이다.
난 곧바로 스텔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 부탁이 무엇인지 눈치챈 그녀는 내민 손을 붙잡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구나.”
“아니길 바라지만….”
눈을 감고 맞잡은 손을 통해 그녀의 영혼을 살펴봤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정결해진 그녀의 영혼 상태. 그렇게 많은 힘을 사용했으면서도 오염된 곳이 없었다.
힘을 사용하는 족족 영혼을 태워 먹어서 매번 정화를 해 줘야 했던 애쉬의 영혼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는 그녀의 아티팩트에 있는 난쟁이들이 일을 아주 잘해 주고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영혼이 깨끗하다고 그녀의 영혼 아주 깊숙한 곳에서 보았던 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모든 베스탈리스의 영혼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기이한 틈. 그리고 그 너머에 자리 잡은 불길한 기운을 품은 불. 쉴 새 없이 악한 화기를 뿜어내 베스탈리스들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기이한 존재.
“아, 역시나….”
핵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은 어느 정도 베스탈리스의 영혼 틈에서 본 그 기운과 동일한 데가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불의 악한 성질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매우 지독한 기운. 이로써 이 동일한 기운을 각각 세 곳에서 느끼게 되었다.
하나는 전생에서 날 쫓아온 불에게서, 하나는 베스탈리스의 영혼 속에서, 또 하나는 바로 이곳 저 동그란 핵에게서.
세 가지 모두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베스탈리스의 영혼 속에서 틈을 봤다고 알려드린 적 있죠?”
내 물음에 스텔라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의 우리가 정화 과정 없이 본질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던 원인이라고도 했지.”
“네, 그 틈 너머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 저곳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져요.”
“그렇다면 대체 저걸 뭘로 규정할 수 있지?”
“더 알 수 없어졌어요. 역시 제가 직접 살펴봐야겠어요.”
“그건 안 돼!”
다시금 드라이어드들이 날 말린다.
“솔직히 위험하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순 없지만 내가 반드시 살펴봐야 할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어. 이건….”
내 안에 수많은 의문들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친다. 그러곤 그 답은 저곳에 있다며 소리친다.
내가 확인하려는 건 ‘세계의 비밀’이었다.
세계를 위협하는 불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어째서 전생의 날 계속 쫓아다니며 죽게 만들고 베스탈리스의 영혼 틈새를 통해 세상을 엿보고 있는지.
모든 해답은 알 수 없어도 어떠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내가 위험할 것 같으면 너희가 지켜 줄 거잖아?”
나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요, 그럼. 위험할 것 같으면 곧바로 도망가는 거예요.”
“제가 바로 옆에 붙어 있을게요!”
말릴 수 없음을 느낀 드라이어드들이 안전에 대비하여 저마다 어떻게 처신할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결국 난 메스키트의 철통 같은 방어 속에 핵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발을 뗄 때마다 지독한 열기가 날 덮쳐 온다. 이 열기를 버텨 낸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는 건 안 돼요. 드루이드에겐 힘들 거예요.”
난 메스키트의 방패 안에서 고개만 내밀어 핵을 바라봤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이질적인 기운이 날 맞이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더 알처럼 느껴져. 마치 안에 뭔가가 있을 거 같아. 조금만 더 가까이 가 보면 안 될까?”
“열기 때문에 무리예요. 화상을 입을 거예요.”
솔직히 지금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기에 메스키트의 걱정처럼 더 다가가는 건 무리가 맞았다. 하지만 자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답한 무언가가 있었다.
“불은 사람을 홀려요. 당신을 홀리게 해서 다치게 하려는 걸 수도 있어요.”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홀린 거라면? 하지만 정말 단순히 홀린 것뿐일까?
난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대신 핵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손이 닿기에도 터무니없는 거리였지만 그렇게 한다면 뭔가를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핵의 주위에서 꿈틀대던 기운이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 핵의 주변을 감돌던 화염이 날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고, 손을 거둘 새도 없이 화염과 맞닿았다.
깜짝 놀란 메스키트가 날 뒤로 물리려 했지만 온몸이 땅에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 역시 날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내 팔은 핵에서 시작된 화염과 하나로 연결되어 버린 것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손쉽게 날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메스키트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도 날 어찌할 수 없다는 게 이상했다. 그녀 역시 움직이지 않는 나에 당황하는 게 보였다.
“공격인가!”
“괜찮아요?”
화염과 맞닿은 손이 뜨거웠으나 기이하게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열기였다. 진작 내 손을 태워 먹고도 남을 화기가 내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화르륵, 활활 타오르는 손을 가진 채로 참 태평한 소리였지만 정말 난 괜찮았다.
“다들 진정하고 이걸 봐.”
화염은 내 손을 태우지 못했다. 오히려 내 손에 닿는 족족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베스탈리스가 사용하는 정화의 힘처럼, 화염은 속절없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내게 베스탈리스와 ‘같은’ 정화의 힘이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들의 영혼을 정화시켜 줄 순 있어도 몬스터 불을 정화하는 힘까지 갖는 건 아니었다. 둘의 정화는 다른 종류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말 그대로 정화였다. 베스탈리스의 영혼을 정화할 때 사용하는 그 힘.
난 내가 원치 않음에도 끊임없이 핵에서 화염을 빨아들여 정화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이에 따라 핵을 감싸고 있던 화염이 걷히며 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꼭 껍질을 벗겨 내는 행위와 같았다.
내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드라이어드들은 안도하는 눈이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화염과 가까이에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
어느 순간부터 단순히 화염을 정화하는 게 아닌, 그곳에 섞여 들어오는 어떠한 기운도 또렷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날 불쾌하게 만들었던, 요동치는 그 기운.
그건 소리가 되고 이미지가 되어 내 귀와 눈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파지직,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가 깨진 틈을 보았다. 베스탈리스의 영혼 속에서 봤던 것처럼 날카롭게 깨진 틈을.
그 틈에서 불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틈은 갈수록 더 벌어졌고 그럴수록 더 많은 불들이 넘어온다.
파작, 파자작. 지금 이 순간에도 틈이 벌어지는 건 계속되고 있다는 것처럼 깨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무섭고 두려운 기분이 날 엄습한다. 금방이라도 침범한 불로 인해 세계가 망해 버릴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거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그게 의문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깨진 곳’은 대체 어디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