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5화 (595/604)

그들이 떠나자마자 불들이 그 빈자리를 노리며 파고들었다. 와 닿는 압박이 마치 맨몸으로 거대한 파도를 막아 내는 것처럼 대단했다.

하지만 내 생명이 다하기 전까진 이 방어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베스탈리스들이 자리를 떠났어도 드루이드들은 남았기에 그들은 내가 그래프트로 시간을 버는 동안 쉬지 않고 불을 무찔렀다.

양쪽 모두가 마지막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 전투가 최후의 승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난 가막살나무의 대검을 꼭 쥔 채 합류한 베스탈리스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드라이어드들처럼 굳이 특성별로 팀을 나눌 필요 없이 눈에 띄는 전장에 곧바로 합류했다.

스텔라는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회복형 불을 노렸고 합류 즉시 공격을 펼쳤다.

역시나 베스탈리스들은 어떠한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불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성난 화염이 닿자 속성이 다른 두 불꽃이 부딪히며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드라이어드들은 폭발에 휩쓸리지 않게 처신해야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베스탈리스와 드라이어드드의 팀플레이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주변과 타협하지 않는 힘은 서로가 도와 시너지를 일으키는 드라이어드의 능력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다.

“아군의 힘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래도 이젠 아군이라 여겨 주는구나.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베스탈리스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는데.

화르륵, 맞부딪힌 불은 금방 양상을 달리했다.

겉으로는 비등하게 힘 싸움을 벌인다 싶었는데 실은 이미 먹이 사슬이 성립되어 있었다. 몬스터 불은 베스탈리스의 불에 잡아 먹히지 않으려 발악하고 있었다.

마치 맹수가 초식 동물을 덮쳐 단숨에 삼키듯, 정화의 힘을 담은 불이 몬스터 불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회복형 불의 재생 능력은 도저히 손상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베스탈리스가 가세하자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생겨 버린 것이다.

어떤 특성에도 속하지 않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막아 낼 수 없는 그 힘에 마치 킹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전장을 누비며 봐 왔던 힘과는 차원이 다른 종류이니 전혀 대처를 못 했다.

드라이어드들을 상대로 드라이어드처럼 싸우면 됐지만 베스탈리스들을 상대론?

안타깝게도 베스탈리스는, 특히 여기 있는 자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드라이어드가 적이라 여기고 지냈던 자들이었다. 공통의 적을 상대하는 대신 핍박의 원인을 왜곡된 곳에서 찾느라 드라이어드와 많이 다퉈 봤던 이들이었기에 불은 전투에서 어떠한 이점도 가질 수 없었다.

더구나 임기응변이 필요한 상황엔 드라이어드들이 나선다. 베스탈리스들은 그저 공격에만 집중하면 됐다.

그들의 손과 발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킹을 야금야금 좀먹었고 길게 끌어 갈 줄 알았던 전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소강을 앞두고 있었다.

사실상 어떠한 특성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조건만으로도 베스탈리스들은 최상의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콰과광!

땅이 흔들릴 정도로 큰 굉음이 터지며 스텔라가 가담했던 회복형 불이 가장 먼저 무너져 내렸다.

불의 스태프가 꺾이고 물을 끼얹은 장작불처럼 완전히 사그라들어 버렸다. 남은 세 구의 불이 회복형 불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중앙의 핵에 더욱 가까이 붙었다.

“하나가 먼저 쓰러질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동시에 해치우는 게 좋을 거라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다른 녀석들도 빨리 해치워야 합니다!”

넷을 동시에 해치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건 임시 처소에서 내가 당부했던 말이었다.

으레 전투를 동시에 시작하게 만드는 것들은 끝내는 것도 동시에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가 먼저 쓰러질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많은 레이드 경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이었으니….

“그렇다면 망설일 시간은 없지. 이대로 다음 녀석까지 해치운다!”

회복형 불이 쓰러지자 아군의 사기가 엄청나게 상승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진 않았지만 승리에 환호하며 소리를 지르는 이가 제법 많은 정도였다.

킹의 위기를 직감한 잡몹들의 반항도 더욱 거세져 그래프트로 울타리를 치고 있는 내 몸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다행히 남은 불을 해치우는 데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회복형 불이 쓰러진 뒤 그곳을 맡았던 팀이 분산되어 다른 팀을 돕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은 세 구의 불은 저마다 무기를 높이 들어 올리고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회복형 불이 쓰러졌기에 패턴이 달라진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저것들이 그 무언가를 완성하기 전엔 해치워야 했다.

베스탈리스의 힘을 확인한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협조했다. 이를테면 유효타를 낼 수 있는 상황을 베스탈리스에게 넘긴다거나 방어의 우선순위를 드라이어드가 아닌 베스탈리스로 바꾼다거나 하는 등으로 말이다.

베스탈리스가 드라이어드에게 맞춰 줄 수 없으니 실전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이 맞춰 주려 노력한 것이다.

회복형 불 다음으로 무너진 건 지원형 불이었다.

지원형 불은 잡몹 소환을 통해 실상 쪽수로 밀어붙이는 게 전부였기에 광범위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베스탈리스에겐 아주 쉬운 상대였다. 그들이 잡몹들을 막는 바리케이드 역할을 효과적으로 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서 있는 땅에 지옥을 불러올 줄 아는 스텔라였기에, 그녀가 폭주에 가까운 힘을 선보이자 지원형 불은 금방 수세에 몰렸고 마침내 쓰러졌다.

남은 건 둘, 가장 까다로운 방어형과 공격형 불이 거친 화염에 휩싸여 불길한 전조 증상을 내보이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은 남은 두 녀석을 부활시키는 거고….”

전부 쓰러지기 전까진 쓰러진 쪽을 끊임없이 부활시키는 아카시아 드라이어드와 같은 경우가 있었기에 절대 방심해선 안 됐다.

거의 다 왔다는 걸 직감한 드루이드들이 아껴 뒀던 그래프트를 펼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드루이드들이 피워 낸 나무들이 오색찬란하게 빛을 내며 현란한 기술을 내보인다.

아마 내가 평생 볼 수많은 그래프트의 반을 여기서 다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힘을 못 쓰기에 토벌이 더뎠던 공격형 불 쪽도 금방 무너져 내렸다. 전투의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게 탱커이듯 마침내 방어형 불만 남게 되었다.

피어나는 꽃처럼 3개의 각기 다른 화염에 둘러싸인 방어형 불은 필살기를 선보이려 하고 있었다.

“저놈만 해치우면 된다!”

“다들 힘내요!”

이곳에 있는 모든 전력들이 일제히 방어형 불에 공격을 가했다.

3개의 화염이 날개처럼 펼쳐지고 방어형 불이 든 방패가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눈부신 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위기의 순간.

콰아앙!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음이 터지며 따갑도록 밀려오는 새하얀 빛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토벌이 먼저였을까? 방어형 불의 최후의 발악이 먼저였을까?

두 눈을 뜨기 전까진 알 수 없었다.

방어형 불이 필살기를 사용하는 게 먼저였다면… 무척이나 끔찍한 상황일 테지만, 막판에 몰아친 공세를 버틸 수 없었을 거라 확신한다.

주변을 가득 채운 열기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해치운 건가?”

“결과는?”

다들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 아우성치는 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해치웠다!”

누군가가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고 이어서 결과를 알리는 소리가 우후죽순 터져 나왔다.

방어형 불이 최후의 기술을 사용하기 전, 해치운 속도가 더 빨랐다. 압도적인 딜로 찍어 눌러 패턴을 넘겨 버린 셈이었다.

“와아아!”

“이겼다!”

빛이 잦아들고 마침내 시야가 확보되었다.

네 구의 불이 있던 자리엔 이젠 핵으로 추정되는 동그란 불의 구만 남아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치웠다고 보기 어려웠으나 어쨌든 큰 전투는 넘어갔다. 불을 생성해 내는 문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이 전장 안에서부터 적의 전력이 더 늘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건 어떻게 하지?”

핵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둥둥 떠 있었지만 다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박살 내야 하지 않을까?”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남은 건 핵의 처리, 하지만 공격을 해 오는 4개의 문보다 아무런 반응도 없는 핵이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

“아….”

킹이 패배하자 잡몹들의 기세가 확 꺾이는 게 느껴졌다. 온몸이 부서져라 치대던 공격도 사그라들어 나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다들 큰 전투가 끝나 쉬고 싶었겠지만 멈추지 않고 잡몹들을 상대하러 뛰어와 주었다.

그래서 나도 안심하고 그래프트를 풀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보스전에 집중하던 그 짧은 시간, 방어의 여파로 엄청난 수의 다이아가 사라졌다. 이걸 생명력으로 치환한다면 난 이미 몇십 번은 죽지 않았을까?

바리케이드를 맡기고 킹이 남긴 핵을 살피기 위해 다가갔다.

전투가 소강된 후 경계를 서고 있던 드라이어드들과 스텔라가 날 반겼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스텔라가 내게 물었다. 그녀 역시 다짜고짜 공격하기엔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저게 대체 뭘까요? 저는 핵이라고 생각하는데. 여태 핵을 가진 불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의아하네요.”

아무리 경험이 많은 드라이어드들이라 할지라도 불의 핵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누구 하나 쉽게 답을 내지 못했다.

“잘못 건드렸다간 이 일대를 큰 폭발로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기운이 응집되어 있어요.”

외알 안경을 쓰고 책을 든 드라이어드가 핵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그렇게 생각해?”

“네, 여태 킹에게 느껴졌던 압도적인 기운은 다 저 구에서 시작된 거였군요.”

메스키트 역시 탐탁지 않은 눈으로 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사후 처리에 대해선 다른 드루이드들과 논의를….”

드루이드들끼리 머리를 맞대면 좋은 수가 떠오를 거라 여기던 때였다.

꿈틀, 핵의 주위로 기이한 기운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방금… 봤어?”

“뭘요?”

그리고 그 이상 변화를 감지한 건 어쩐지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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