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4화 (594/604)

2페이즈는 적어도 지금 각 불에 맞서고 있는 전력의 두 배 정도가 더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어김없이 부상자는 발생하고 몇몇 기술은 조건 때문에 제한이 걸리는 등 처음만큼의 위력을 길게 이어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에 가디언들은 본인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지치지 않도록 격려를 해 가며 전투를 이끌어 나갔다. 다만 여기에 가디언이 없는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은 격려를 받지 못한다는 걸 뜻했지만.

“카수스에게 간 두 필드의 가디언도 내가 데려왔으면….”

그딴 녀석이 스톤 필드와 리버 필드의 가디언을 데리고 있는 건 사치였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부릴 게 뻔하니까.

난 다시금 바리케이드 상황을 살폈다. 베스탈리스들은 기대 이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잘 해내 주고 있었다. 너무 잘해 주고 있어서 그들을 차출해 냈을 때의 여파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잡몹만 상대하게 두는 건 전력 낭비나 다름없었다. 킹의 반격이 더 거세지기 전에 단숨에 몰아붙여 끝내 버릴 힘이 필요했다.

베스탈리스들이 주변 정리를 잘해 줬으니 더 범람하지 않도록 딱 틀어막아 버텨 주는 방법만 찾으면 될 텐데….

“‘버티기만 하면 된다’라….”

싸우지 않고 버티기만 한다면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과거 누군가가 버티기 위해 썼던 방법이기도 하고, 나 역시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막살나무.”

난 공격형 불을 공략 중인 그를 불러들였다.

길드전에서 그와의 그래프트로 온전히 나 혼자 문 하나를 틀어막았던 걸 떠올렸다. 가막살나무와의 그래프트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그의 꽃말처럼 시전자가 죽기 전까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방어를 만들어 낸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스케어크로우가 자신의 생명력을 다 바쳐 거대한 불을 가뒀던 그래프트이기도 했다.

내가 길드전에서 사용할 당시엔 부끄럽게도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가막살나무와의 그래프트를 성공해 냈었다. 마치 강제로 치트를 사용해 이전까진 사용하지 못했던 기술을 오픈한 셈이라 나를 향한 그의 신뢰가 조금 소실됐었지.

더구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낸 그래프트가 아니었기에 완성도가 아쉽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의 난 정말 무척이나 어리석었다.

그때는 우리 둘의 교감만으론 그래프트를 사용할 순 없었지만 지금은 어떨까?

“그들이 뒤를 맡기고 갈 수 있도록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해. 최후의 방어선이 되는 거야.”

“내 충성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으나 그대가 미처 느끼지 못했을 뿐.”

쿵 하고 내리꽂은 그의 대검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의 말처럼 가막살나무는 나와 모험을 함께하는 팀에 속해 있다기보단 테라리움을 지키며 그곳에 머무는 팀이었기에, 그래프트를 사용하기까지의 교감이 부족하다고 나는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모험을 함께하면서도 아직 그래프트를 사용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드라이어드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줬다고 들었소. 어쩌면 계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르지.”

그는 땅에 꽂은 대검을 내버려 두고 뒤로 물러났다.

“기꺼이 내 무기를 버릴 테니 내게도 온전한 그대의 힘을….”

그가 그런 결정을 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라웠다. 세계수로부터 얻은 자신의 무기를 버리는 건 나와 교감이 넘치는 엘더도 못 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같이 붙어 다닌 시간과 교감은 그다지 상관없는 걸지도 모른다. 내 뜻을 상대가 이해하고 나 역시 상대의 뜻을 이해하는 게 교감이었으니까.

가막살나무와 나를 연결하는 매개는 스케어크로우였다. 그는 내게서 과거 자신의 군락지에서 살았던 그녀의 모습을 발견해 나를 따라왔을 뿐만 아니라, 나와의 여행보단 그녀의 흔적이 남은 28번째 테라리움을 지키는 데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막살나무가 나를 볼 땐 어쩔 수 없이 스케어크로우의 그림자에 가려진 모습을 본다고 생각했다. 내 드라이어드가 분명함에도 내 드라이어드가 아닌 듯한.

그런데 제 무기를 버릴 정도로 나를 향한 엄청난 신뢰를 보여 주다니. 어쩌면 정말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걸 수도….

“그땐…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그래프트를 사용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는 필요한 일이었기에 괜찮다고 말했으나 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서운함을 알아차렸다.

즉, 그는 자신과 나의 교감만으로도 그래프트를 해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내가 이를 믿지 못하고 세계수의 힘을 이용한 격이라 서운했다는 거겠지.

“그대와 함께한 이후로 내가 지켜야 할 세상이 넓어지는 기분입니다.”

처음엔 하나의 생명을 지키는 데에서 생명들이 모여 사는 테라리움으로, 그러곤 세상으로.

“마침 너와의 그래프트를 펼쳤던 시기에 스텔라를 만났었지.”

그땐 스텔라가 최후의 방어선을 뚫으려고 하는 적이었다면 지금은 최후의 방어선에 자신의 뒤를 맡기는 아군이 되었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벽을 느끼고 있던 건 나 혼자였는데.”

그가 내 드라이어드라는 점은 변치 않고 나를 스케어크로우의 그림자로만 봤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과 보여 주지 않았을 대단한 신뢰를 떠올렸다.

“넌 내 드라이어드가 맞는데.”

심호흡을 한 번 하자 이 탄내 가득한 전장 속에서 가막살나무의 꽃향기가 짙게 느껴진다. 몸 안에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하는 결연한 기운.

그가 버린 거대한 대검을 바라봤다. 보통의 방어형 드라이어드와 달리 그는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저 널찍한 검이 방패의 역할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높은 공격력을 낼 수 있도록 도왔다.

“세계수가 네 손에 쥐여 준 바람이 아닌, 내가 네 손에 쥐여 주고픈 바람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막살나무가 나타내는 게 있었다. 또한 수호의 시작이자 원동력이 되는 것.

내가 스케어크로우의 그림자를 걱정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아니었다면 소중한 드라이어드를 얻게 될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건 ‘인연’이야. 인연을 수호하는 드라이어드가 되어줘.”

가막살나무야말로 바로 인연의 상징이었다.

인연이 발전하여 지금의 우리들을 만들었다.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중한 관계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르침.

심장이 세차게 뛰며 몸이 뜨거워졌다. 가막살나무에게 느꼈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진 걸 깨달았다.

그는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날 향해 두 손을 내밀었으며, 난 내 영혼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내 손 안에 아주 뜨겁고 무거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걸 느꼈다.

그건 검게 응축된 빛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내 빛은 길고 거대한 형태로 몸을 불렸다.

마치 왕이 기사에게 하사하듯 내 손을 떠난 빛이 가막살나무의 두 손에 올려졌다.

와장창!

그가 버렸던 대검에 금이 가더니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그 단단한 검이 박살 나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그의 두 손엔 새까만 빛을 띠는 검은 대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기의 교체. 그는 세계수의 바람을 버리고 내 소망을 쥐었다.

어디선가 거세지만 친절함을 품은 바람이 불어와 가막살나무를 감쌌다. 그의 붉은 코트가 바람을 타고 펄럭이더니 이내 모습이 변하였다.

벼락을 맞은 나무처럼 그의 코트에 새까만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보호구는 더욱 정교해졌으며 잿빛을 닮은 은발은 더욱 밝게 빛을 냈다.

그 모습을 보며 가막살나무가 한 차례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대의 바람대로 인연을 수호하는 드라이어드가 되겠습니다.”

그가 때가 되었다는 듯 내게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당신 역시 준비가 끝났다면 일을 행할 시간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으로부터 요동치는 기운이 느껴진다.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강제로 교감을 끌어 올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기운을 속에서 품는 게 아닌, 내 몸 구석구석 터져 나갈 듯 증폭되는 거센 기운이었다.

그래, 응당 그래프트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가막살나무의 꽃향기가 아주 진하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자욱하게 퍼져 나갔고 우리의 영혼이, 마음이 하나로 이어짐을 느꼈다.

그의 모습 위로 푸른 잎과 붉은 열매를 잔뜩 머금은 나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맞잡았던 손에 아주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고 어느새 난 그가 쥐었던 새까만 대검을 들고 있었다.

드디어 세계수의 힘을 빌린 게 아닌, 우리 둘만의 교감으로 그래프트를 성공해 냈다.

난 대검을 들고 베스탈리스가 만든 바리케이드로 향했다.

“스텔라! 여긴 내게 맡기고 보스전에 합류해 줘요.”

스텔라가 서 있던 자리 옆 땅에 대검을 쿵 내리찍으며 말했다.

“설마 혼자 맞서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녀는 의심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해치우는 게 아닌 ‘막아서는’ 정도라면 해낼 수 있어요. 베스탈리스들을 이끌고 킹을 해치워 주세요. 드라이어드들이 절정까지 몰아붙였으니 끝을 낼 한 방이 필요해요. 베스탈리스들은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특성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어느 곳에 합류해도 상관없을 거예요.”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래프트의 힘을 모두 개방했다.

대검에서부터 시작된, 흑요석을 닮은 새까만 줄기가 마치 울타리를 치듯 퍼져 나갔다. 여기 이곳에 최후의 방어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적이라면, 허락되지 않는 자라면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

가막살나무와의 그래프트는 반드시 드루이드의 생명이 담보로 잡힌다는 점에서 방어가 힘들수록 수명을 깎는 격이었지만 나는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다이아가 이를 대체하며 밀려드는 불을 완전히 막아 냈다.

가막살나무와의 그래프트는 베스탈리스들의 빈자리를 완전히 메꾸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텔라가 믿어도 되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혼자서 막아설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대는 항상 내게 놀라움만 선사해. 오래 걸리지 않도록 금방 끝내마.”

그녀는 잡몹들을 상대하는 게 마치 준비 운동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풀며 베스탈리스들을 이끌고 킹에게로 향했다.

킹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흥미로워하던 그녀였기에 킹과 맞서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잘 알았다. 오랜 전투에도 지치지 않고 반짝이는 눈빛이 든든했다.

마침내 베스탈리스들이 보스전에 투입되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