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3화 (593/604)

마침내 모두가 함께 목도하게 된 킹. 킹의 기이한 모습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놀랍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저게 정말 불이라고?”

“여태 만난 형태와는 차원이 다른데.”

구조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거대한 불, 더구나 4개의 문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들.

“다들 설명드린 건 잊지 않으셨겠죠? 출발하기 전 짰던 팀 대로 모여 주세요.”

내 외침에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튀어나와 뭉치기 시작했다.

“잘 부탁드려요.”

보스에게로 향하는 무리 뒤로 베스탈리스와 드루이드들이 어울려 넓은 인간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 모습을 보니 산울타리가 떠올랐다.

“한 놈도 넘어갈 수 없게 만들마.”

“도중 보스전에 투입될 수도 있으니 유념해 주세요.”

“마음 같아선 직접 부딪히고 싶지만….”

스텔라가 킹을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여긴 이런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에게 맡겨야겠지.”

그 말을 듣고 정말 스텔라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루이드를 끔찍이 싫어하는 단체의 대표가 드루이드를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

“좋아요. 든든하네요. 그럼 전 방어전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가 볼게요.”

“행운을 빈단다.”

스텔라의 격려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자 벌써 네 방향의 문에 일사불란하게 모여 있는 드라이어드들이 보였다. 내가 네 방향의 문을 모두 살필 순 없으므로 각 문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살필 드루이드들도 지정해 뒀다.

그들을 찾자 나와 눈이 마주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됐다는 뜻이었다.

“대규모 레이드….”

테라리움 어드벤처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걸 하게 되는 순간이 올 줄이야.

“동시에 공격하는 걸 잊지 마세요.”

전장에 바짝 조인 긴장감이 흐른다. 난 간만에 총을 꺼냈다. 공격을 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 모두가 동시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 신호탄 역할이었다.

회복형 불의 문에 메스키트와 데이지, 방어형 불의 문에 엘더와 실새삼 그리고 포인세티아, 공격형 불의 문에 가막살나무와 맹그로브, 지원형 불의 문에 바곳과 민들레 아이들이 자리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 모인 드루이드 중 아마 나만큼 많은 드라이어드를 보유한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다들 준비하고….”

퍼엉! 신호탄이 쏘아지자 모든 드라이어드가 일제히 킹을 공격했다.

킹은 많은 수의 드라이어드가 작정하고 덤비니 우리가 정찰했을 때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땐 공격에 소극적이었는데, 위기를 느낀 것인지 킹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펼치며 발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흉내 낸 공격이 퍼부어졌다. 방어형 드라이어드들이 대신 공격을 받는 세 가지의 문은 상황이 나았지만, 방어형 불을 상대하는 곳은 탱커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다 함께 공격을 나눠 받았다.

“공격받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희가 있습니다!”

엘더를 비롯한 광범위 힐링이 가능한 드라이어드들이 큰 활약을 했고, 대미지를 낮추거나 방어력을 올리는 버프를 사용하는 지원형 드라이어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반면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없는 곳은 탱커들이 깡으로 버티고 있었다. 메스키트처럼 방어가 출중한 탱커들이 없었다면 가장 먼저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정도는 어림도 없지.”

“말할 정신이 있다니. 역시 방어형이라 다르다는 건가?”

기초 체력과 생명력을 늘려 주는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이 탱커가 더 버틸 수 있도록 도왔으며, 미리 나눠준 포션을 적절히 사용해 가며 전선을 지켰다.

어느 한쪽이 먼저 무너져선 안 됐다. 그렇다면 우릴 당황하게 했던 버프가 킹에게 생겨날 게 분명했다.

토벌 속도가 유달리 떨어지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없는 쪽이었다. 그쪽은 더구나 킹의 공격도 거세어 난전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유독 튀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들 힘내자고! 해치워 버리는 거야! 박살 내 버리는 거다, 아그들아!”

공격력이 하나도 없으면서 거기에 껴 있는 맹그로브였다.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공격력을 성량으로 커버하듯, 목소리 하나만큼은 가장 우렁찼다.

공격형 불을 상대하는 드라이어드들은 특성이 달라도 공격 기술을 많이 보유한 자들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문제는 능력 균형에 따라 그만큼 본인의 본래 특성이 약해진다는 데에 있었다.

공격력이 강한 방어형 드라이어드들은 그만큼 보통의 탱커보다 방어력이 떨어지고, 회복형 드라이어드 역시 회복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균형 있게 다 강한 메스키트와 같은 드라이어드가 있지만 스페셜 등급이니까….

그렇기에 공격력이 없는 대신 출중한 방어와 회복을 동시에 지닌 사기적인 특성의 맹그로브가 공격형 불에 맞서는 팀에 포함된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맹그로브가 대부분의 공격을 혼자 맞아 처리하며 스스로 힐도 하는 멀티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맹그로브가 많은 짐을 덜어 줄수록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공격이 더 자유로워졌기에 그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불만을 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관심을 나타내는 드루이드는 많았다.

“저거 대체 누구 드라이어드야?”

“혼자 막고 혼자 치료하고. 뭐 저런 드라이어드가 다 있어?”

“진짜 생긴 것도 그렇고… 독특한 드라이어드네.”

난 맹그로브를 향한 이러한 관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슬쩍 못 들은 척을 했다.

왕이 공격을 받자 바리게이드 너머에 있던 불들의 기세도 더욱 거세지는 걸 느꼈다.

“저건….”

멀리 땅바닥을 기는 퀸이 바리케이드의 빈틈을 뚫고 킹에게 다가가려는 게 보였다. 모아온 재료를 넘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공격받는 킹을 보조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퀸이 합류하도록 내버려 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장판과 같은 형태다 보니 퀸을 발견한 자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나 홀로 불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기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하, 쥐새끼가 있었군.”

사늘한 스텔라의 목소리가 휙 날 지나쳐갔다.

콰직, 그녀가 주저 없이 퀸의 위에 발을 내리꽂자 물컹거리는 게 짓이겨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화르륵, 뒤이어 그녀의 발에서 피어난 불이 순식간에 퀸의 몸체로 퍼져 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곤 이쪽을 향해 신경 쓰지 말라며 태연하게 웃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곳의 어린아이들은 영웅 같은 드루이드의 모습을 보고 드루이드를 동경한다.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님에도 되기를 소망하고.

만약 세상이 바뀌게 된다면 아이들이 베스탈리스를 동경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저렇게 멋있는데….

불을 잘근잘근 밟아서… 처리하는 스텔라를 뒤로 하고 킹의 레이드가 한창인 곳을 바라봤다.

다들 오늘 처음 만난 드라이어드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팀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오늘의 전투는 세계수가 보낸 권속들이 세계 최대의 적과 맞서는 모습의 일부분을 나타내는 듯했다.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이 힘을 합쳐 불을 무찌르는 전설 속 이야기 같은 모습.

거기에 세계 속 또 하나의 구성원인 베스탈리스들의 참전까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사명이었다.

드루이드들은 영혼 한 자락에 세계수의 축복을 심은 순간부터, 드라이어드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리고 베스탈리스들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던 힘을 일깨운 순간부터.

모두에게 세계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반이나 사라져 버린 지도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힘을 내고 있었다.

이대로 레이드가 잘 끝나기만 한다면….

하지만 불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모습을 보였고 모든 상황은 유리하게만 흘러가진 않았다.

일렁, 몸을 감싸는 포근한 기운의 농도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나 외에도 감이 예민한 드루이드들 역시 변화하는 공기를 느끼고 불안한 표정을 짓는 자가 있었다.

“축복의 기운이… 옅어지고 있잖아?”

93번째 테라리움의 간신히 되살려 놨던 세계수 가지의 축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일시적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시간이 다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땅의 피해 복구에 우선적으로 많은 힘을 쓰다 보니 축복의 지속 시간이 줄어든 걸지도 모른다. 더구나 현재 이 땅에 불의 기운이 너무 강하다 보니 오래 버티기엔 무리였던 거겠지.

그 축복은 내가 다이아를 내고 구매한 버프나 다름없어서 단기적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대로 축복을 이어 가려면 내 월렛에 가지가 빨대를 꽂는 수밖에 없었다.

한창 레이드가 진행되는 도중에 모두에게 힘이 되고 불의 기운을 억누를 수 있는 축복이 사라지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일렁, 다시금 축복이 한층 더 얇아지는 게 느껴진다. 이젠 모두가 이 변화를 알아차렸다. 불 역시.

“모습이 변하고 있어!”

문의 형태를 띠고 있던 불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며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억눌린 축복에 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단순한 모습을 취했던 것처럼 말이다.

4개의 문은 이전에 봤던 것처럼 각자 다른 무기를 든 거대한 인간 형태의 모습을 취했다. 방패를 든 탱커, 검을 든 딜러, 오브를 든 서포터, 스태프를 든 힐러의 형상.

직감적으로 2페이즈가 시작됐음을 알아차렸다.

방패를 든 불이 그 방패를 땅에 내리꽂자 사방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디버프가 걸리는 소리였다. 그러곤 곧바로 불도저처럼 방패를 들고 돌진했다. 직선거리에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큰 공격을 받고 나가떨어졌다.

방어형 드라이어드라면 이 공격을 버텼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쪽엔 방어형이 없었다.

무방비하게 공격을 얻어맞은 드라이어드들 중엔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이가 많았다.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이 수습에 나섰지만 불이 그걸 가만두고 볼 리는 없었다.

콰과광! 동쪽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고 불의 거대한 검을 간신히 막아 낸 방어형 드라이어드들이 보였다.

오브를 든 불은 쉴 새 없이 자신의 몸을 분열해 수를 늘리고 있었고 회복형 불은 무려 자기 재생을 통해 공격받기 전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발악한다는 건 거의 다 왔다는 거예요! 다들 포기하지 말아요!”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다들 포기하지 않고 킹에게 맞섰다. 그리고 어쩌면 베스탈리스들의 협력이 필요한 순간이 머지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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