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2화 (592/604)

전투 안정화를 위해 잡몹들과의 전투를 충분히 겪은 이후 보스전 후발대에 참가한다. 잡몹이라 할지라도 별칭이 붙을 정도로 강한 정예 몬스터들이었지만, 특성별로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 베스탈리스가 드라이어드를 흡수한 불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상대들이기도 했다.

드루이드들은 초반 보스전을 온전히 드루이드들로만 진행한다는 사실에 묘하게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들은 베스탈리스들을 아직 인정할 수 없다는 의사를 거리낌 없이 내보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베스탈리스들은 이러한 인식과 시선에 몹시도 익숙했기 때문인지 이에 대응해 반향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이제 팀을 짜 볼까 합니다. 각 4개의 문엔 해당하는 특성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건데, 이 문의 경우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포함되지 않는 대신 자가 회복 능력이 있거나 생명력이 강한 드라이어드를 위주로….”

본인의 드라이어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드루이드들이었기에 전략적으로 어느 문을 공략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모습들이 보였다.

가장 좋은 건 드루이드들에게 각자가 보유한 드라이어드들의 리스트를 받아 공들여 배치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전력이나 다름없는 패를 모두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이는 없을 테니 본인의 의사에 맡겼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차곡차곡 4개의 팀에 배치되었다.

“명심해 주세요. 이 팀은 드루이드가 중심이 아닌 드라이어드 특성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각자의 드라이어드가 4개의 문 공략에 뿔뿔이 흩어질 수 있음을 유의하고 전략을 짜 주세요.”

나 역시 드라이어드들을 여기저기 나눠 보냈다.

팀을 짰지만 모든 논의가 끝난 건 아니었다. 각 팀에 속한 드라이어드들을 살피며 드루이드들의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제 드라이어드는 생명력이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면 특수 능력이 활성화되니까 회복은 뒤로 미뤄도….”

“그 드라이어드와 제 드라이어드가 궁합이 잘 맞겠네요. 유사시엔 이렇게 조합을 해서….”

“기술 사용에 시간이 좀 걸리는데 혹시 따로 신경 써 줄 드라이어드가 없을까요?”

“광역 전달 기능을 보유한 드라이어드 없나요? 제 꽃이 시너지가 좋아서….”

“다름이 아니라 제 아이가 겁이 많아서 혹시라도….”

자신들의 드라이어드 능력을 간단하게 설명하며 실전에서 혹시 모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나처럼 4개 팀에 드라이어드를 나눠 배치한 드루이드들은 정말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하필 그 둘은 인연이 나쁘지 않나요? 모체 신화도 완전 적대적이라 떨어뜨려 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이고, 미처 몰랐네요. 붙여 놓으면 역효과만 날 겁니다. 최악의 경우엔 둘이 싸울 수도 있어요. 그 드라이어드는 저 팀에 배치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드라이어드의 중엔 인연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연은 세계수 안에서의 인연이 될 수도 있고 과거 모체 신화와 관련된 인연이 될 수도 있었다.

메스키트와 엘더처럼 인연이 잘 맺어져 있다면 함께 있을 때 서로의 기술로 시너지를 일으키거나 벨라돈나와 바곳처럼 모체 신화의 인연으로 멘토와 멘티가 되어 주는 장점이 있었다.

반대로 극성의 둘이 부딪힌다면, 원수 관계나 다름없다면 도저히 팀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까지 오나 보다.

난 반대의 경우는 아직 본 적이 없기에, 물론 실새삼이 분란을 만드는 성격이긴 하지만 인연과 관계는 없기에, 드루이드 둘이 호들갑을 떨며 드라이어드들을 갈라놓을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그런 점에서 실전에서 즉석으로 팀을 짜는 것보다 이렇게 논의를 하며 팀을 짜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팀 논의와 개인 정비를 끝내자 드디어 보스 출정 준비가 완료되었다.

다들 비장한 표정으로 보스전에서 사용할 전략을 곱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 방향으로 갈게요. 킹의 위치는 임시 처소의 정반대편에 있으니 도중 체력 소모를 심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만일을 대비해 베스탈리스들이 타고 온 전투 마차 하나에 의료품을 잔뜩 몰아 실었다. 다수의 인원이 함께 이동하니 마차를 호위할 전력은 충분했다.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갑시다!”

이 많은 인원을 모은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다들 군말 없이 따라 줘서 다행이었다.

길을 뚫는 선발대는 이미 따로 배정되어 있었다. 보스전을 진행할 전력이 최대한 좋은 컨디션으로 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길을 뚫은 후 곧바로 베스탈리스들과 함께 몰려드는 잡몹들을 담당하는 전력으로 빠질 예정이었다.

“저기 퀸이 또 이동하고 있어. 벌써 재료들을 많이 모은 건가?”

전장에서 갑자기 많은 수의 드루이드들이 빠졌기 때문인지 불의 수가 금방 불어나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이동하니 곧바로 어그로가 끌려 사방에 포진해 있던 불이 일제히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우리에게 맡기거라.”

스텔라는 베스탈리스들과 함께 외곽으로 빠질 준비를 하며 내게 말했다.

시간상 91번째 테라리움에서 정화 의식을 치르자마자 이동했을 테니, 아직 힘이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다들 머뭇거리는 기색은 없었다.

베스탈리스들이 스텔라의 지휘에 따라 일제히 움직이니 드루이드들의 관심도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그들이 불을 해치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가득했다. 불을 해치우는 능력은 오직 드라이어드의 전유물이었으니.

드라이어드 없이 맨몸으로 불에 맞서는 인간들이 대체 뭘 할 수 있겠냐는 기대 없는 눈빛도 다수 있었다.

“새로운 힘에 두려워하지 말도록. 언제나 불은 우리와 함께였다.”

스텔라가 주변인들을 독려하며 소리쳤다.

“달라질 미래를 위해 기꺼이 온몸을 불사지르도록.”

엄격한 목소리에 과거 그녀의 위상이 오버랩되었다. 스텔라가 인페르노의 수장이었을 적, 저렇게 교단원들을 통솔했겠지.

그녀는 먼저 시범을 보이려는 듯 초장부터 엄청난 기술을 선보였다. 길드전에 난입하여 수많은 드루이드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던 괴물에 가까운 그녀의 능력.

몇 번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필드에 거대한 불의 토네이도가 생겨났다. 그녀의 호전적인 성격만큼 주변의 모든 걸 날려 버릴 정도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토네이도.

“와, 저걸….”

정예 불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스텔라가 홀로 몇 구나 되는 불을 휩쓸어 버리는 걸 보고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폰 셋을 홀로 상대하는 드루이드를 보고 존경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았었지. 그런데 스텔라는 홀로 모든 걸 가뿐히 해내고 있었다.

베스탈리스가 가진 불의 힘이 강할수록 이에 비례하여 그 불에 내재되어 있는 정화의 힘도 강해졌다.

그녀가 발을 구르면 땅이 갈라지고 그 틈에서 용암과 같은 불이 샘솟는다. 저 공격에 수많은 드루이드들이 패닉에 빠졌고 큰 부상을 당했다.

그녀가 폭주했을 당시 나 또한 큰 벽을 느꼈고 끝내 세계수에 내 몸을 맡기는 불상사를 저지르고 말았었지.

지금의 스텔라는 이미 전성기가 끝났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런 강한 힘을 보고도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면, 그 이전의 그녀는 대체 뭐였단 말인가?

그녀가 사용하는 기술 몇 개에선 애쉬의 모습이 묻어 나오기도 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기술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테니 애쉬도 정화의 힘을 깨우친다면 스텔라만큼이나 대단한 전력이 되겠지….

“불로 불을 해치운다고? 이 무슨….”

“지금 내가 보는 게 진짜란 말인가?”

“저게 대체 무슨 힘이야?”

“불은… 불을 사용하는 사람은… 분명 악하다고….”

여기 모인 드루이드들 중에서도 베스탈리스에 편견을 가진 이가 분명 존재할 거다. 드루이드와 불은 떼려야 떼어 낼 수 없는 숙적의 관계임으로 불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그 인식이 과하게 발전해 불과 관련된 모든 걸 부정하다고 여기니 문제였지만.

“당신은 알고 있죠? 저게 대체 뭐죠?”

누군가 내 팔을 붙들며 물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92번째 테라리움에서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이 드루이드들과 합류했을 때보다 더 반응이 격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곧바로 베스탈리스들이 투입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스텔라가 압도적으로 불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일까?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의 힘은 천천히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려는 비교적 얌전한 성질을 가졌다면, 스텔라는 파괴의 신 그 자체였다.

정화의 힘을 얻게 된 이후로 홀로 불을 토벌하는 여정을 많이 다녔다 싶었더니 저렇게 거리낌 없이….

“보시는 것 그대로예요. 불이지요. 하지만 다 같은 불이 아니에요. 불이 세상을 침범해 우리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린 다양한 실생활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세상에 해가 되는 불이 있는 반면, 이득이 되는 불도 있는 거죠. 저들이 사용하는 불엔… 악한 불을 정화하는 힘이 담겨 있어요.”

“그건… 이 세계의 힘이 맞는 겁니까? 너무 이질적이지 않습니까?”

이젠 베스탈리스들의 힘의 근본을 의심한다.

“확실한 건 저들의 힘 역시 이 세계의 힘이 맞다는 것, 그들은 고대부터 존재해 온 불의 힘을 사용할 뿐이라는 것, 위대한 세계수는 저들의 힘을 지키기 위해 안배를 했다는 거예요.”

“세계수가 안배한 힘이란 말입니까….”

일부러 세계수를 언급했는데 예상대로 잘 통했다. 드루이드의 위대한 신, 세계수.

베스탈리스와 미미르의 샘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된 이후부터 그들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세계수를 함께 언급하는 걸 예전부터 생각해 왔다. 샘을 만든 건 세계수였으니 그들 역시 세계의 일원임을 신이 증명하는 것이라고.

스텔라가 시범을 보이자 다른 베스탈리스들도 곧바로 불의 힘을 사용했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불씨를 다루는 일이니 다들 아주 익숙하게 사용했다. 그저 그들의 공격이 향했던 곳이 이젠 우리들이 아니라 불로 바뀌었다는 것만 달랐다. 적이 달라졌으니 대처도 달리해야 하는 법.

“역시 인페르노라는 건가….”

불의 힘을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온건파들과 달리 저들은 전투를 끊임없이 해 왔기에 숙련도도 달랐다. 마치 이미 훈련이 된 전사들처럼 막힘없이 불을 해치워 나갔다. 온건파들이 투입됐을 때보다 몇 배나 토벌 속도가 빨랐다.

온건파 사람들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불이 소멸되는 걸 보고 감격에 차 멈칫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감동적인 결과를 차분히 느끼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오롯이 전투에만 집중하며 능력을 펼쳤고, 짧은 시간 만에 수많은 드루이드들의 인정을 받아 냈다.

적의 적은 아군, 불을 해치우는 목적 아래 모두의 단결력이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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