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1화 (591/604)

그녀는 아닌 척하고 있지만 굉장히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를 많은 사건이 있었던 거겠지.

그녀의 뒤로 줄 지어 서 있는 마차의 수를 확인해 보았다. 의외로 온건파 베스탈리스들보다 수가 많았다. 인페르노의 본거지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대단한데 이만큼이나 많은 전력을 데려올 줄이야.

그녀를 걱정했던 건 괜한 일이었을까?

“마침 때맞춰 와 주셨어요.”

이건 입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스텔라는 적절한 순간에 도착해 주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91번째 테라리움에 들렀단다. 그들이 우릴 안내해 줬지.”

“그들?”

“순번을 뺏긴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물음에 스텔라는 슬쩍 말을 돌렸다. 그래서 그녀가 말하는 그들이 온건파들을 지칭함을 눈치껏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정화 의식도 치르고 왔다는 거네요?”

“그래. 다들 신기해하더구나. 솔직히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불신에 가득한 그들을 달래는 게 힘들었는데, 그런 상황을 직접 겪고 나니 다들 조용해졌지.”

91번째 테라리움에서 내가 만든 가지를 목도한 인페르노 교단원들은 어떤 모습을 했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서 참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전해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오자마자 쉴 틈도 줄 수 없어 죄송하지만 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을까요?”

“아무렴. 다들 의욕이 넘치니 마음껏 써 보려무나.”

그때 스텔라가 타고 있던 선두 마차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로브를 입은 모습이 엄숙해 보였다. 문득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그녀를 마중 나왔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

마치 시중들듯 스텔라의 뒤에 시립한 이들은 하나같이 못마땅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스텔라에게 설득되어 이 자리까지 왔지만 그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어쩌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온건파처럼 베스탈리스의 미래 개척에 제대로 감화되어 온 사람 외에도 그저 스텔라만 믿고 그녀를 따라온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일생일대의 가치관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스텔라가 뛰어난 리더였다는 거겠지.

“애쉬는… 별문제 없었나요?”

“내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어서 고마웠단다. 그와 마주치기 전에 떠날 수 있었지. 그런데….”

그녀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분명 추격대를 보낼 거라 생각했어. 아들이 보기엔 우리들은 배신자나 다름없을 테니, 자신을 거역한 이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내가 그렇게 키우기도 했고.”

그녀의 말에 뒤에 시립한 이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스텔라를 따르면서도 한편으론 수장인 애쉬가 두려웠던 거겠지.

“하지만 너무 조용했단 말이지. 몹시 평화롭게 올 수 있었어. 내 아들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말하며 즐거움을 가득 담은 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녀는 애쉬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나로 인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

“걔도 뭐… 많은 일을 겪긴 했죠.”

애쉬 역시 나와 함께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난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린 마지막까지 마찰이 컸으니까. 그저 쉬지도 못하고 계속 몰아쳤던 여행에 지친 건 아니었을까?

“여기 온 사람들은 인페르노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수가 이렇게 많은데 일부분이라고요…?”

“거의 대부분 나를 따랐던 사람들이지.”

그녀를 따랐던 사람들이라면 ‘상속되는 불꽃’에 속하는 파벌 사람들일 거다. ‘상속되는 불꽃’ 아래에 속한 점조직과 인물들은 모두 스텔라가 인페르노를 이끌 당시 활약했던 자들로, 지금은 은퇴한 원로들로 구성된 파벌이라고 파필리온이 알려 줬었지.

다만 애쉬를 가장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서 모두를 데려오진 못했을 것이다. 충성심이 강한 자들은 어떠한 말에도 잘 흔들리지 않으니까.

그러니 지금 여기 있는 자들은 애쉬에 대한 충성심보다 아직 스텔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이란 뜻이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 그대가 의심했던 대로…. 그쪽을 건드리니 가장 반응이 컸지.”

그렇다면 상속되는 불꽃 다음으로 가장 많이 그녀를 따라온 자들은 어쩌면 ‘내밀한 불꽃’의 파벌.

정보 수집과 은폐를 집중적으로 맡는 곳으로 이탈자가 상당히 많은 곳이라고도 했지. 온건파 베스탈리스들 중엔 그쪽에서 생겨난 이탈자들이 많다고.

‘너무 많이 알아 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스텔라에게 어쩌면 내밀한 불꽃의 사람들이 베스탈리스에게 정화의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스텔라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지만 그들이 어쩌면 고대 베스탈리스의 역사를 추적하다가 그런 정보를 얻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수긍해 줬고.

그래서 그녀는 그때의 이야기를 토대로 내밀한 불꽃에 속한 사람들을 공략했던 것이다. 이미 진실을 알고 있으니 더 쉽게 설득되었을 테지.

“일부라고 해도 충분히 많은 전력이 모였어요. 당장 인페르노 모두를 설득할 순 없겠지만 전 시작이 아주 좋다고 봐요.”

“그대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구나.”

한껏 인자해진 스텔라의 목소리에 그녀 주변에 선 사람들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지는 걸 느꼈다.

당장 모두가 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적어도 스텔라라는 고삐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렇다면 다들 마차에서 내려 주시겠어요?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 드릴게요.”

스텔라가 선두 마차를 텅텅 내려치자 많은 이들이 일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에겐 잘 벼려진 검과 같은 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러모로 온건파들과 분위기가 아주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손목에 하나씩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이 일순 풀어졌다.

끝까지 애쉬를 거부했던 난쟁이들과 달리 저들은 모두 선택을 받았구나. 그렇다면… 분위기만큼 상종 못 할 정도로 잔인한 성정을 가진 이들은 없다는 거겠지.

“당장 저기 보이는 불들을 해치우는 전투에 뛰어들라고 할 줄 알았는데? 92번째 테라리움은 누가 드루이드고 누가 베스탈리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엉겨 붙어 있더구나.”

다른 이들도 스텔라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눈빛이 고요했다.

“아뇨. 무작정 토벌전을 벌여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우린 이 모든 불의 왕이라 칭할 수 있는 터주를 해치워야 해요.”

“불의 왕이라….”

스텔라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 온 사람들 중 누구도 불안하거나 두렵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이들이 없었다. 준비된 전투 민족들처럼. 역시 온갖 일을 벌였던 인페르노 출신의 사람들이라서? 세상과 맞짱 뜨던 이들이었으니….

난 그들에게 앞서 온 드루이드들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금 킹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들에겐 ‘특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베스탈리스에겐 특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정화의 힘은 드라이어드의 능력과 달랐다. 베스탈리스가 다루는 불은 다루는 사람에 따라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특성을 명백히 규정하는 게 불가능했고, 본인의 기술만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그들은 다양한 형태로 응용이 가능했다.

“어쩌면….”

킹의 대항마는 베스탈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성에 따라 한정적인 전략을 취할 수 없는 드라이어드와 달리 베스탈리스는 전혀 조건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하지만 모든 건 아직 생각 단계일 뿐 실전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확인해 봐야 했다. 무엇보다도 베스탈리스들끼리면 모를까, 그들과 드라이어드들은 아직 원활한 팀플레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베스탈리스들에게 브리핑을 끝낸 후 드루이드들과 함께 대면시켰다. 함께 협력해야 하는 전투 상황에서 서로를 적으로 인식한다면 큰일이었다.

처음부터 드루이드에게 반감을 갖는 이도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인페르노의 표식이나 다름없는, 신체에 드러난 기이한 화상 자국을 알아보는 이가 몇 있었다.

인페르노가 갈수록 만행을 벌였기에 그들에 대해 많이 알려진 터라 경험 많은 드루이드들은 단번에 그들을 의심했다.

“저들은….”

시간이 촉박하긴 하나 드루이드들에게 베스탈리스들에 대해 이해시키는 일만큼은 공들여 행해야만 했다.

난 가장 먼저 그들의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를 가리켰다. 드루이드의 것과 비슷한 반구가 달린 팔찌를.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선 이들의 정체를 눈치챈 분들도 계시겠죠. 이들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순 없으나 불을 해치우기 위한 이 자리에 모여 준 것만으로도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 이들이란 점만 기억해 주세요. 더 이상 여러분들이 보고 들은 악행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돕기 위해 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뭘 할 수 있죠?”

“여러분처럼 불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힘이 있다면 왜 지금까지 조용했던 겁니까?”

“이제야 힘을 일깨웠거든요.”

불신이 가득한 눈들이 베스탈리스들을 향한다. 그럴 만도 했다. 아직 증명해 낸 건 아무것도 없으니 믿지 못할 수밖에. 하지만 이제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우리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리란 건 어떻게 믿죠? 적이었잖아요?”

누군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건 지금으로선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스텔라가 그 질문에 덤덤히 대답했고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득이 있다면 공격할 거란 말인가?”

“정말 이득을 추구하겠다면 이 자리에 모이지 않았겠지. 그녀의 말처럼 모두 돕기 위해 모였다는 걸 잊지 말게나.”

“믿기 어렵다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협력이 중요한 만큼 서로를 믿지 못하면 위험한 순간이 올 수도 있어요. 만약 위험을 느낀다면 본인의 안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도 괜찮아요. 다만 제 모든 걸 걸고, 제 행정 관리원의 자리와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사회적 명예를 걸고.”

내 얼굴은 이미 많은 소식지와 길드전으로 팔렸기에 난 더 이상 정체를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분이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약속합니다.”

“나 또한 그녀의 약속에 반드시 보답하겠노라.”

스텔라의 말은 드루이드들이 아닌 베스탈리스들에게 향해 있었다.

조금은 상황이 진정되자 난 주제를 바꿨다.

“전력을 이렇게 나눌까 해요.”

크게 보스를 공략하는 팀과 보스 공략 팀이 원활하게 전투할 수 있도록 주변에 몰려드는 잡몹들을 담당하는 팀.

보스전에 많은 불과의 전투 경험이 필요한 만큼 곧바로 베스탈리스들을 투입하기엔 리스크가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들이 전투에 익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겠는데….

“일차적으로 베스탈리스분들은 주변에 몰려드는 불을 저지하는 데 가담해 주세요. 보스전은 먼저 드루이드들이 진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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