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0화 (590/604)

데이지를 보며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라 실패가 두려웠을 텐데도 끝까지 용기를 낸 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같은 자생 필드의 드라이어드란 사실 외에 종도 다르고 특성도 다르며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꽃들의 영혼을 울리게 만든 그녀의 행동.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난 그녀의 행동을 본받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킹을 발견했어요.”

“직접 보셨다는 겁니까?”

“네, 그리고 상대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실패했죠.”

렉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 되었다. 킹과 전투를 했음에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내가 놀랍다는 듯이.

“저 혼자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어요. 그래서… 현재 전장에 있는 모든 드루이드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내겐 엄청난 가디언들이 있으니까. 새로운 힘을 깨우친 대단한 드라이어드들이 있으니까 지금 나만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패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건 아니에요. 킹을 상대할 방법을 알아냈어요.”

무작정 다른 이들에게 도와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드라이어드들이 킹과 맞부딪힌 끝에 공략법을 알아냈다.

난 종이에 킹의 모습을 최대한 묘사하여 그렸다. 4개의 문과 중앙의 구체로 이루어진 기이한 모습.

킹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렉스가 이런 모양의 불도 존재하냐며 놀라워했다.

“이 문들은 각각 특성 별로 불을 생성해 내고 있어요. 드라이어드의 특성에 맞춰서 말이에요. 하지만 공격이 시작된다면 불의 생산을 멈춰요.”

문 하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할 땐 해당 특성을 가진 드라이어드의 공격만 먹힌다는 점과 4개의 문을 동시에 공격할 땐 반대로 해당 특성을 가진 드라이어드는 페널티를 입는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다. 또한 페널티가 어떤 특징을 갖는지도.

“그렇다면 4개의 문을 동시에 공격하는 게 낫겠군요. 공격형 특성 외에 다른 특성들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특성이 나뉜 거지만.”

“네, 각각 특성별로 문을 공략하기보다는 차라리 균형 있게 조합을 맞춰 공략하는 방법이 나을 거라 보고 있어요. 애초에 경험상 이런 상태는 어느 하나가 먼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질 않을 테니까요.”

회복형 불을 공격할 땐 회복형 드라이어드의 지원을 받을 순 없겠지만 반면에 이를 제외한 방어형, 공격형, 지원형 드라이어드의 조합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남은 셋이 회복형 드라이어드의 빈자리를 메꾸며 싸우면 되는 거다. 다른 세 가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야 할 수도….”

회복형 드라이어드 자리가 공석인 걸 대체하기 위해선 회복이 없어도 버틸 수 있도록 좋은 방어력과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버프가 좋을 거다.

방어형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선 분담되는 대미지를 커버할 수 있는 광역 회복 기술과 회복력을 높일 수 있는 버프가 좋을 테고.

지원형은 버프가 없는 걸 전제로 해야 하니 방어, 회복, 공격의 정석적인 조합이 나서야겠지만 버프가 필요 없을 정도로 기초가 아주 탄탄해야 할 테고, 공격형은 제대로 된 공격력을 갖추기 위해 공격력을 높이는 버프와 특성이 다름에도 비교적 많은 공격 스킬을 보유한 드라이어드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즉, 어떤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라 할지라도 이 4가지 상황 중 어디에나 활약할 자리가 있다는 거다.

가령 광역 회복이 가능한 엘더의 경우 탱커 없이 방어형 문을 공격하는 조합에 포함시키면 된다.

난 내가 생각한 공략법을 렉스에게 설명하며 다듬었다.

“킹을 없앨 공략법을 생각해 낸 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를 행하려면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드루이드 인력 말입니다.”

그녀의 말엔 나도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많은 수의 드루이드가 한 번에 빠진다면 간신히 대치 중인 전장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킹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을 계속 이어 가야만 하죠.”

이 역시 맞는 말이었기에 렉스는 쓰린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그래서 지원자를 받을까 해요. 당신의 말처럼 모든 드루이드의 전력을 한 곳으로 돌릴 순 없죠. 킹을 상대로 긴 전투를 치러야 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무방비 상태인 쪽이 빠르게 무너질 게 분명해요. 그래서 드루이드 스스로에게 주위 상황을 판단하게 한 후 킹을 해치우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지원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전장은 아주 넓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 넓은 곳에 흩어진 드루이드들에게 소식을 전할 셈입니까? 직접 뛰어다니는 건 아주 좋지 않은 방법일 텐데요. 전령 새와 같은 동물은 불의 쉬운 먹잇감이 될 뿐이고 드라이어드의 능력 역시 막힐 겁니다.”

“보통의 드라이어드 능력이라면 그렇겠죠.”

“방법이 있는 겁니까?”

“어쩌면요….”

그리고 지금이 데이지의 행동을 본받아 내가 결심한 일을 펼칠 때.

나와 소속이 다른,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다른 모험을 겪어 온 사람들을 설득해 함께 협력하는 순간을 만들어 내야 했다. 많은 사람들과 큰 전투를 치른 건 길드전이 전부였지만, 그 마저도 함께한 사람들은 나와 같은 길드원들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 세계에서 불특정 다수와 한마음 한뜻으로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건 처음이 되겠지. 게임에서 일컫는 레이드와 같은 콘텐츠를 진행하는 것 말이다.

“가디언들은 드라이어드의 영혼에 직접 뜻을 전할 수 있으니 어쩌면….”

난 임시 처소의 밖으로 나와 다섯 그루의 가디언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의중을 설명했다. 드루이드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 곁에 있는 드라이어드들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전장에 있는 드라이어드들에게 한 번 더 전해 줄 수 있겠어? 이번에 전할 건 규율이 아니라 내 이야기야. 가디언의 권한을 날 위해 사용하는 거라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게 어떻게 이기적일 수 있나요? 테라리움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메스키트가 걱정하지 말라며 미소 지었다.

“이 땅을 위협하는 불을 해치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우선적인 규율이지요.”

“땅을 이롭게 만들기 위해선 불이 없어져야 하니까.”

가디언들은 모두 내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동의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다섯 그루의 가디언들이 일제히 기운을 뿜어냈다. 한 자리에서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필드의 기운 때문인지 임시 처소에 머물러 있던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이 놀라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엔 곧바로 가디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는 드라이어드도 있었다.

당장 전투를 할 수 없기에 임시 처소에만 머무르고 있던 이들이라도 가디언의 영혼의 부름은 닿았을 테니, 그들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93번째 테라리움을 위협하는 불을 몰아내기 위해 최후의 결전을 치를 때가 다가왔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킹이라 불리는 이 땅의 터주를 몰아내야 합니다. 단순히 강한 드라이어드들만으론 킹을 해치울 수 없습니다. 드라이어드의 다양한 특성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현재 전장에서 활동 중일 드루이드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가정하며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재 어떤 상황인지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차분히 설명했다.

한껏 기운을 끌어 올리며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가디언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데저트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이여.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사막의 전사들의 힘이 필요하다!”

메스키트의 외침에 노란 빛들이 햇빛을 받은 사막의 모래처럼 빛나며 일렁거렸다.

“스노우 필드의 친구들아. 어떤 상황에서도 뜻을 잃지 않고 침착할 수 있는. 동토의 은둔자들의 힘이 필요해.”

포인세티아의 부름에 새하얀 빛들이 하늘에 내리는 맑은 눈처럼 반짝거렸다.

“바이오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은 듣거라.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우위를 점하고 마는. 군림하는 약탈자들의 힘을 보여 줄 때가 왔노라.”

실새삼의 명령조에 가까운 목소리에 붉은 빛들이 떨어진 핏방울처럼 선명하게 빛을 냈다.

“노멀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은 들어 주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나눠 줄 수 있는. 친절한 도우미들의 손길이 필요해요.”

데이지의 간절한 요청에 짙은 녹색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눈앞에 거대한 숲이 생겨난 듯하다.

“친애하는 오션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에게 전하노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애로움을 보일 수 있는. 생명들을 보살피는 어버이들이 나설 때가 되었느니라.”

맹그로브의 선포에 숨이 막힐 정도로 시린 푸른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끝없는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가디언들은 모두 이 방어전을 끝낼 최후의 결전에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고 내 뜻을 비춘 그 호소는 마침내 전장에 널리 퍼져 나갔다.

가디언의 목소리를 들은 드라이어드들은 제 주인에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미처 듣지 못한 드루이드가 있다면 그에게도 전해 줄 것이다. 소식의 전파.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이를 들은 드루이드들은 고민하고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임시 처소로 드루이드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게 보였다. 함께 왔던 길드원들도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드라이어드들이 이상한 말을 해서 와 봤는데, 뭔가 있나 보군요. 최후의 결전을 치를 때가 왔다고….”

그들의 드라이어드들은 제대로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

“네, 이 테라리움 어딘가에 있는 악의 근원, 킹을 해치울 참이에요.”

모인 드루이드들의 수는 꽤 되었다. 물론 자원해서 방어전에 참가했기에 아주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함께 대규모 레이드를 펼치기엔 무리 없는 정도의 수라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부족하다고 느껴 아쉬웠다.

뒤늦게 도착한 드루이드들도 알 수 있도록 임시 처소에서 거대한 판을 빌려 작전을 작성한 후 어떻게 공략할지 설명했다.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크게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도 이게 최선의 수단이란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한참 설명을 끝낸 후 막 출전 시간을 정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밖에…. 마차 수가 꽤 많아 보이는데 혹시 저 마차들의 소속을 아시는 분이 계시나요?”

처소 밖을 살피던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에 잠깐 회의를 멈춘 후 밖에 나가 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듯한 설레는 마음에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꽤나 많은 마차가 테라리움을 빙 둘러 임시 처소가 있는 안전한 지역까지 진입하는 게 보였다. 마차엔 소속을 나타내는 어떠한 마크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보통의 마차와 달리 완벽한 내열 구조를 가진 전투 마차로 보였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서고 곧바로 가장 선두에서 누군가 내렸다.

아주 익숙한, 그리고 무척이나 기다렸던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나이만큼 점잖은 목소리, 스텔라였다. 그녀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길을 알려 주는 별처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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